158화 김사범, 그리고 헤븐(3)
서울, 강남.
“이건 어때?”
“이쁘다, 정말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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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것도 이쁜데? 근데, 수리. 우리 여기 말고 저기 옆에…….”
“싫어. 거긴 너무 답답한 디자인밖에 없어.”
아니, 그렇다고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일반 매장에서 파는 원피스로 입기엔 좀 그렇잖아.
“내가 한번 찾아볼게. 여기서 말하는 웨딩드레스 같은 느낌 말고 조금 더 편한 디자인이 좋은 거지?”
“응. 어차피 가족들하고 친구들 초대해서 노는 건데, 너무 화려한 건 힘들잖아.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이럴 때마다 수리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내 기준엔 그런 결혼이 너무, 뭐랄까…… 대충 하는 느낌인데.
그래도 인생에 한 번 있을 이벤트인데 조금 화려하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리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알겠어, 장소는 그때 봤던 거기 괜찮지?”
“응, 좋더라. 나는 한국에서 제일 좋은 게 한옥이야.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잖아.”
결혼식 장소도 웨딩홀이 아닌 경기도의 어느 한옥펜션을 빌렸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면서 신나게 놀다가 다음날은 그냥 발길 가는 대로, 느낌 오는 대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돈이 많으니 이게 좋긴 하다.
비자 같은 행정절차가 없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맘에 드는 곳으로 바로 떠날 수 있으니까.
아무튼, 이제 일주일 남았다.
청년 김사범이 남편 김사범으로 바뀌기까지.
그 전에 처리할 건 싹 다 처리해 버려야지.
* * *
얼마 뒤.
“안녕하세요. 신영호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나는 경기도 구리의 어느 카페에서 헤븐의 개발팀장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죠,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김사범 선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아,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덕분에 스트레스 아주 잘 풀고 있습니다. 아, 그나저나…… 저희 회사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네. 관심도 있죠.”
“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개인 연습용 VR기기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죠?”
“네. 물론 그 기기도 탐이 나지만, 그거보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뭐, 그 기기에 별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구실이 필요했던 거지.
“음…… 그럼 저와 이야기를 하셔 봤자 중요한 이야기를 들으실 순 없으실 텐데. 깊은 이야기라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투자요.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돈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 있나.
이럴 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대는 게 편할 수도 있다.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풉, 아. 죄송합니다. 투자요? 음…… 투자는 정말 제 소관이 아니라…… 잠시만요.”
먹던 아메리카노를 다시 컵에 뱉을 정도로 놀란 신 팀장이 핸드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떴다.
‘오늘 안에 확답이 됐으면 좋겠는데……. 절실하면 만나러 오겠지. 아니면 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되고.’
사실, 발렌 사가에 대한 궁금증만 아니었다면 그냥 내 자산관리사에게 적당히 한마디만 건넸으면 됐다. 아니, 오히려 그 방법이 더 깔끔했겠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투자가 아닌, 조금 더 깊은 정보를 얻는 거다.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김사범 선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가능하면 저희 본사에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물론이죠. 이 근처죠? 가시죠.”
이것 봐.
진짜 다급하니까 먼저 물잖아.
헤븐 본사.
“안녕하세요. 정찬열입니다. 부족하지만 헤븐이라는 회사를 이끌어 나가고 있죠.”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헤븐의 정찬열 대표.
내가 한참 게임을 했을 때 관련 기사에서 몇 번 봤던 얼굴이다. 물론, 그때보다는 조금 젊어 보였지만.
“제가 개발자 출신이다 보니 말을 잘 못합니다. 그…… 투자 의향이 있으시다고?”
“네, 맞습니다. 이번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 혹시. ‘발렌 사가’ 프로젝트 말씀이신가요?”
“네, 그런 이름이었죠? 아무튼, 뇌파인식 VR 게임이라고 들었는데요.”
사실, 아주 잘 안다.
여기엔 존재하지 않는 완성품을 직접 플레이해 보고, 거기서 1등도 해봤는데.
“아…… 김태연 선수에게 들으셨나 보네요. 하하, 이게 나름 비밀 프로젝트라 주의를 부탁드렸는데…….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맞습니다. 세계 최초로 뇌파인식 VR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개발을 막 시작하신 거죠?”
“조금 됐습니다. 올해 초부터 시작했으니까요.”
어.
상태창이 깨진 게 올해 중순 정도 아니었나?
아닌가? 내가 알아챘을 땐 이미 깨져 있었으니까…… 시즌 초부터 깨져 있었을 수도 있겠네.
“아…… 음, 그럼 지금 개발 진행이?”
“아직 뇌파인식 기술이 연구 단계라 게임 시스템은 크게 개발이…… 아, 이건 전부 다 말씀드리긴 어려울 거 같네요. 아직은 투자자가 아니시니까.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조금 조심스럽게 개발을 하고 있는 거라서요.”
“알겠습니다. 음…… 투자 규모는 상관 없는 거죠?”
“아, 그것도 아닙니다. 이게, 보시다시피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니다보니 스톡옵션 용도 외의 주식이 많지 않아서요. 너무 많은 투자를 받게 되면 이게 또…… 아시죠?”
모르는데.
뭐, 경영권 그런 이야기겠지.
그런 건 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다.
“전 이 사업이 굉장히 탐이 납니다. 아니, 가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많은 금액을 투자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 그, 의결권 없는 주식이라는 게 있다던데요?”
떡밥 던졌고.
이제 남은 건 자산관리사가 알아서 해 줄 거다.
난 그냥 규모만 정해 주고, 뒤로 빠져야지.
“자세한 건 제 대리인과 이야기해 보시죠. 아마 규모도 그렇고 조건도 그렇고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음…….”
“사실 이 방법이 제일 깔끔하고 좋은데 제가 찾아온 이유는, 연구 진행 과정이 궁금해서입니다. 각서라도 쓰고 한번 둘러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크음…… 네, 각서는…… 조금 있다 쓰시죠. 신 팀장? 안내해 드리세요.”
됐다.
‘안내’라는 단어를 들은 다음부터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여기가 인넷 게임 개발부서입니다. 아, 인넷이라는 건 뇌파인식 시스템상에서 구동되는…….”
신 팀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뇌파인식 시스템 관련 부서를 제외한 게임 개발 부서를 견학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쪽은 별 관심 없으니까. 게임 개발 쪽만 둘러보면 되겠지.’
“……입니다. 지금은 게임의 겉부분만 개발하고 있어서 크게 보실 게 없으실 텐데……. 그래도 한번 보시길 원하신다면…….”
“네. 이게 그 게임인가 봐요? 발렌 사가?”
“아, 네.”
투자자가 와서 그런지, 엄청나게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 대고 있는 개발자들.
조금 둘러봤지만 무슨 매트릭스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글자들에 곧 흥미를 잃고, 그나마 볼 게 있는 디자인 팀으로 향했다.
‘오, 골든 햄머다. 초반에 저거 주워서 상점에 파는 게 나름 짭짤했는데.’
‘저건…… 이펙트를 보니까 데들리 어택인가? 처음엔 조금 심심했네?’
‘엇, 저건…….’
“저기 저분이 담당하시는 게 게임 내부 UI인가 봐요?”
“어떤…… 아, 네. 맞습니다. 아직 개발 중이긴 한데, 저렇게 초안은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편하거든요.”
목표물을 찾았다.
“한번 봐도 될까요? 방해가 안 된다면.”
“네, 물론이죠.”
아무래도 디자인 쪽이 제일 덜 중요했는지, 신나서 날 안내해 주는 신 팀장.
“정미영 씨? 여기는 이번에 투자를 해 주실 김사범 선수입니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안내 가능한가요?”
“꺅! 아, 죄송합니다! 실물이 훨씬…… 아, 그게 아니라. 이게 뭐냐면…….”
그때부터 시작된 설명. 나는 20분이 지나서야 내가 목표로 한 상태창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발렌 사가의 상태창이에요. 보시면 알겠지만 힘, 민, 지, 내구 이렇게 간단하게 구성했는데…… 이건 게임이 어떻게 개발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항이고…… 그리고 여긴…….”
“스킬이 들어가겠네요?”
“네?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뭐 그냥…… 게임이 다 비슷하잖아요. 찍은 거예요. 하하.”
“다른 게임들은 이렇게 상태창 하나에 스킬 설명을 넣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어어…… 그런가?
내가 다른 게임을 해봤어야 알지.
“감이 좋으시네요! 네, 아마 스킬창이 들어갈 거예요. ‘최대한 간단하고 심플하게!’가 이번 디자인의 주제거든요.”
음…….
갑자기 생각난 건데, 돈이 정말 너무 없어서 이런 상태창이나, 다른 UI들도 간단하게 만든 건가 보다.
아니면 이렇게 한 개의 창에 다 때려 박을 이유가…….
“거의 다 완성된 거죠? 이 디자인?”
“네. 디자인은요. 아마 게임 개발이 진행되면 이 디자인하고 게임 시스템하고 연동이 될 거예요.”
“아…… 신 팀장님, 혹시 이쪽 시스템은 개발 중인가요?”
디자인은 완성됐으니, 이것 때문에 상태창의 오류가 낸 건 아닐 거다. 저게 문제였으면 진작에 이상한 글씨가 내 상태창을 점령했겠지.
“음…… 아마 개발 중일 겁니다. 아마 아우터라인은 잡혔을 거예요. 각 수치별 공식은 아마 확정된 걸로 알고 있고…….”
들어도 모르겠네.
“음…… 퍼센트로 따지면 어느 정도 진행됐다고 볼 수 있나요?”
내 질문에 고민하던 신 팀장은 곧 웃으며 대답했다.
“한 10퍼센트……? 아직 개발 초기라서요.”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갓길에 차를 세운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이름 : 4번 타자
칭호 : 힘이 999인
직업 : 전사
스♡
힘 : 999+(현재 적용 : 999)
민Ф : 10
지능 : 10
%구 : 13
스킬
Δ안(펼치기)
999999번^ 스윙(펼치기)
기분 나× 선생님(펼치Γ)
◎킬 묶음(펼치기)]
‘하나, 둘……. 글자는 80개 정도……. 깨진 글자가…… 8개. 저번에는 조금 더 많았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가설이 맞는 것 같다.
‘게임이 완성되어 갈수록 내 상태창은 깨진다.’
그때그때 글자가 달라지는 건 -달라지는지 아닌지는 좀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아마 개발하던 사항을 엎고, 다시 개발하고 이러는 과정에서 달라지는 거겠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개발을 방해해야 하나?
앞으로 내가 가질 위치면…… 충분할 수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몇 달, 혹은 몇 년 투자하다가 나에 대한 의존이 심해질 때쯤 투자를 끊으면 되니까.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불확실한 추측 하나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쏟은 노력을, 시간을 물거품으로 만들기엔…… 내가 겪었던 답답함과 울분이 너무 컸으니까.
‘어차피 7년, 혹은 8년이 남은 일이야. 만약 게임이 완성되면서 내 능력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전에 전설로 남을 커리어를 완성할 수 있다.’
만약 내 생각대로 완성과 동시에 능력이 사라진다면…….
물론 아쉽겠지.
물론 힘들 거고.
그래도…… 내 생각엔 이게 맞다.
아마도, 맞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