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김사범, 2026포스트시즌(나와 닮은 누군가)(1)
[‘붐’의 고향, 한국에서 가장 힘든 직업. ‘주모’
- 어느 날, 메이저리그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어린 얼굴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는 별다른 적응기 없이 리그를 폭격했으며, 곧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붐 킴’ 그리고 고향은 코리아다.(당신이 생각하는 ‘그’ 코리아가 아닌 남쪽의!) 그리고 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해 미국의 인터넷 야구 영토를 유린하고 있다.
그가 홈런을 치거나(거의 매일 친다), 전 타석 출루를 기록하거나(거의 매일 한다), 팀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타점을 올리는 날이면(마찬가지, 거의 매일이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JUMO’. 인터넷상의 누군가는 이들을 보고 ‘JUMO GANG’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의 응집력을 보면 이 별명이 아주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리한 팀의 뒷면엔 패배한 팀이 있는 법이고, 패배한 팀의 팬들은 어김없이 승리한 팀의 최고 선수를 욕하는 댓글을 남기기 마련인데, 디트로이트를 상대하는 팀의 팬들은 그 ‘사소한’ 행복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이 인터넷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누군가가 ‘#bomb’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그를 욕하는 글을 올리는 순간, ‘JUMO GANG’은 출동하여(그들의 표현대로라면, ‘JUMO DAN’) 게시자를 뭉개고, 으깨며, 부수는데, 화이트삭스의 팬이자 악플러로 유명한 어떤 이는 그가 단 인종차별적인 댓글이 회사 게시판에 도배되면서 직장을 잃기까지 했다.
자, 여기서 궁금증 하나. JUMO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론, 한국의 전통 술집의 주인을 의미하며, 주로 혼자서 술집을 운영하던 여성 주인을…….
……중략……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구속받는다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사이버 공간의 일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것보단 나으니까.
적어도 인터넷, 그리고 게임 세상에서 코리안을 건드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칼럼을 작성…….]
└ JUMO!
└ JUMO!
└ JUMO!
.
.
.
└ 빌어먹을 J. GANG! 이건 너희에게 유리한 기사라고!
└ 틀렸어, 오늘은 타이거즈가 챔피언십 시리즈에 올라간 날이라고. 이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거야.
└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모든 야구 페이지가 점령당하겠지.
└ 이 정도면 타이거즈가 그를 방출해야 하는 거 아냐? 이 개자식들이 좋아하는 녀석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자!
└ 멍청한 미국인. 네 아이클라우드를 조심해. 곧 네 누드 영상이 인터넷에 퍼질 테니까.
└ 불쌍한 녀석.
└ I Miss You.
└ J
└ U
└ M
└ 제발 살려줘, 난 그런 의미가 아니라…….
└ O
└ 끝났군. 쯧쯧.
* * *
[2020년에 들어오고도 6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양키스가 네 번째 도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지난 세 번의 도전은 타이거즈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는데요. 과연 올해는 어떤 팀이 월드시리즈에 올라가게 될까요?]
[이틀 뒤, 코메리카 파크에서 확인해 보죠.]
“양키스가 올라왔네, 붐. 네 예상대로.”
“다른 팀들은 모두 수습하느라 정신없잖아? 당연한 결과지. 애초에 모두 양키스가 올라올 거라고 예상했었지.”
“불쌍한 양키스, 불쌍한 ‘붐’의 친구.”
이삭의 말에 매섭게 반격해 대는 케이시와 폴리.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이삭의 집에 모여 양키스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 정도쯤 되면 이것도 징크스나 루틴으로 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연한 걸 당연하게 만드는 게 바로 내 위대함이지.”
“꺼져.”
“이삭? 폴리가…….”
“폴리, 네가 꺼져. 여긴 내 집이니까.”
“틀렸어. 여긴 마마의 집이지 네 집이 아니니까.”
멕시칸이 미국에서 내리는 추방명령, 그리고 그에 불복하는 미국인이라니. 내가 이런 광경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폴리. 내 집에서 나가렴.”
“마마…….”
간식거리를 들고 나타난 마마의 한마디가 덩치 큰 양키를 무너트렸다.
“푸흐흐, 그러니까 나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이번 시즌 들어서 이삭이 붐에게 뭐라 하는 거 봤어?”
케이시는 그런 폴리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아, 잠깐, 양키스가 올라온다는 건?’
“케이시, 자신 있어? 이번에 김병헌을 완전 뭉개 놔야 사이영을 타든 말든 뭐라고 할 말이 있을 텐데.”
정규시즌에서 21승 7패, 2.25의 성적을 올린 케이시와 19승 9패, 2.10의 성적을 올린 김병헌은 이번 시즌에도 사이영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세부적인 스탯도 어느 누가 낫다고 말하기 힘드니까……. 완전 기자들의 취향 싸움이 될 거 같은데.’
“어차피 투표도 끝났는데 뭐. 그리고 이런 말은 아주 구시대적인 발상이지만…… 비슷한 성적이면 승수가 많은 내가 유리하지 않겠어?”
“어. 아닌데.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2018년 제이콥 디그롬의 사이영 수상 이후, 투수의 승수가 선수 가치판단에 중요하게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이기는 경기에서 5이닝씩만 투구하고 내려간 게 아니잖아? 올드스쿨로 분류되는 기자들은 날 뽑을 게 분명해.”
“애초에 그 기자들은 무조건 널 뽑아 왔잖아. 그 녀석들이 동양인에게 표를 주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내 말에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무는 케이시. 그런 케이시를 보며 웃는 폴리의 얼굴이 아주 해맑았다.
“자, 이제 내일모레면 드디어 워크 데이가 8일 남은 건가? 휴가를 신나게 즐길 일만 남았네.”
이삭의 말처럼, 긴 시즌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홈런입니다!]
[날카롭게 1루수와 베이스 사이를 빠져나가는 안타!]
[홈런입니다!]
[중요한 순간인데요, 아! 역시 홈런이군요!]
“이건 사기야.”
“뭐가 사긴데? 다 자기가 못 던져서 그런 거지.”
“아니, 메이저리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녀석이 몸 관리를 이 정도밖에 못해? 120구가 넘어가니까 구속도 안 나오고, 제구도 안 되고…….”
“헤헹. 변명이지, 변명이야. 약속대로 오늘 설거지는 자기가 하는 거다?”
“아니, 수리. 나 오늘 월드시리즈 1차전인데…….”
“어차피 이길 거 아냐? 그럼 됐지 뭐. 나 TV 보고 있을게~ 다 하면 말해!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괜히 수리를 도발하는 바람에 안 해도 될 설거지를 하게 됐다.
‘양키스 1선발이라는 놈이 대체…….’
나는 김병헌으로, 수리는 나로.
헤븐에서 매년 제공해 주는 VR기기는 날이 갈수록 쓸 만해지고 있었는데, 특히 이번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보내 준 기기는 작은 부분이지만 뇌파 컨트롤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수리! 다시 하자! 이번엔 이삭으로 해!”
“싫어. 난 질척이는 남자가 그렇게 싫더라.”
그리고 난 수리를 한 번도 못 이겼다. 이 기계의 포장을 뜯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내 전용 기기라 김병헌을 좀 너프시킨 건가? 아니, 그러진 않았을 텐데……. 다음 번엔 내가 타자로 한다고 해야지. 투수는 아무래도…….’
수리에게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이런저런 볼배합과 작전을 짜면서 설거지를 끝내고, 수리와 함께 코메리카 파크로 향했다.
부르르릉.
수리가 운전대를 잡고 거리로 나서고, 곧 도심지에 들어섰다.
“난 지금 이 광경이 아직도 신기해. 이게 가능한 일이긴 한 거야?”
“글쎄, 나도 신기해서…….”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광경.
GM이 오직 나를 위해 커스텀해 준 픽업트럭을 몰고 거리에 나오자마자, 마치 긴급출동 차량이 사이렌을 울릴 때처럼 슬금슬금 내 앞 차선을 비워 주는 시민들.
내가 출근을 하는 시간이 제법 일정하고, 차가 많이 없는 시간대여서 망정이지, 만약 출퇴근 시간에 이랬으면 난 기껏 받은 이 차를 몰고 나올 생각도 안 했을 거다.
‘이것도 관광상품이라고, 이런 광경을 보려고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우자, 양옆에서 약속이나 한 듯 열리는 창문.
“붐! 오늘도 부탁해요! 이길 거죠?”
“하하하, 당연하죠.”
“오늘은 미세스 킴이 운전하네요?”
“이것도 아내의 징크스라, 하하.”
적당히 대꾸해 주다 적당히 같이 사진도 찍어 주길 몇 번, 나는 코메리카 파크에 도착했다.
“나는 로라하고 같이 근처에 있다가 경기 시작하면 올게! 오늘은 제이슨 주니어도 온대.”
“벌써 구경 올 나이가 됐나? OK. 좀 이따 봐 자기.”
가벼운 키스를 마지막으로, 나는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플레이 볼!”
어느 팀에게는 긴장되고, 어느 팀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그런 경기가 시작됐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록, 포스트시즌 55연승을 기록 중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자신만만하며, 강한 도전자. 뉴욕 양키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가 시작했습니다.]
[디트로이트도, 양키스도 라인업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습니다. 선발투수도 마찬가지죠? 디비전 시리즈 1, 4차전에 나온 김병헌 선수와 디비전 시리즈 첫 경기에서만 공을 던진 케이시 마이즈 선수의 맞대결입니다.]
[체력적인 면에선 김병헌 선수가 조금 힘들겠군요]
오래 쉬어서일까, 오늘따라 유달리 컨디션이 좋은 케이시가 3개의 삼진으로 순식간에 지워 버린 1회 초가 끝나고, 나는 조금 이르게 보호장구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컨디션이라면, 셋 중 한 명은 나갈 거다. 분명.’
김병헌은 정말 훌륭한 투수로 성장했지만…… 야구란 스포츠는 스펙 하나만으로 게임의 승패가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따악!
“아웃!”
3구 만에 마치 싱커를 연상케 하는 투심을 던져 이삭에게 땅볼 아웃을 뺏어낸 김병헌이라도, 언제나 예외의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딱!
[아, 라테 헤미체 선수의 타구가 내야를 벗어납니다!]
[김병헌 선수의 투심을 거의 배트를 던지듯 스윙하며 굴렸는데요, 이 타구가 코스의 도움을 받아 안타로 둔갑했습니다.]
바로 지금같이.
‘아침에 수리에게 진 게 도움이 됐나? 오늘 감 좋은데?’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싫은 패배를 당하고 와서인지, 오늘 내 감각은 아주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이제 라테가 1루에 나갔으니, 클리어는 헛된 코스의 공에 배트를 내지 않을 거다.
‘그럼 자연스럽게 던지는 공이 늘어나고, 이대로 조금씩…….’
딱!
“아웃!”
쉬익, 펑!
“……아웃!”
[클리어 선수에게 병살타를 뺏어내는 김병헌 선수! 기가 막힌 커터였습니다!]
[분명 주자 1루, 뒤에는 김사범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공을 띄우는 스윙을 하려 했을 텐데요. 그런 스윙을 이겨 내고 땅볼로 만들 정도로 오늘 김병헌 선수의 구위가 좋다는 말이겠죠!]
어……?
“제-길! 페이스의 말을 믿는 게 아니였는-데!”
아, 저쪽 포수가 페이스지.
차가운 녀석. 아저씨의 동심을 울리다니.
뭐가 어떻게 됐건, 이제 2회 초다.
이제 내가 저 듀오의 심장을 차갑게 만들 차례라는 거지.
* * *
- 우와아아아아…….
“맘! 대디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
“대디가 어떤 투수라고 했지?”
“소방관 아저씨요!”
“그래, 그러니까 타이거즈가 아주 위험한 수간에 나올 거란다. 조금만 기다려볼까? 그래, 착하네 우리 제이슨.”
구단 측에서 수리와 로라를 위해 잡아 준 코메리카 파크의 스카이석. 로라는 능숙하게 제이슨 주니어를 달래고 있었다.
“로라, 대단해요. 나는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잘 못하겠던데.”
“수리도 곧 방법을 알게 될 거야. 남자아이는 보통 아빠를 닮기 마련이거든.”
“그런가요?”
“큰 아이를 다룰 때처럼 작은 아이를 다루면 돼. 익숙하지?”
“그럼요.”
“그나저나, 붐에겐 언제 말할 거야? 이제 곧 배도 불러 올 텐데…….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때 말했어야 했어.”
로라의 말에 조금 어두워진 수리의 표정.
“로라도 알지만…… 제 몸이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잖아요. 의사도 기적이라고 했고……. 그래서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이젠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까 말해도 될 거야. 아, 주변에 뭔가 던질 게 있는 곳은 피하고.”
“네?”
“저번 월드시리즈 때 보니까, 붐이 너무 신나면 주변 사람들을 막 던지던데? 그러다가…… 알지?”
수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게 농담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진짜예요.”
“어?”
“너무 좋으면 그게 잘 주체가 안 되는 거 같은데…….”
로라도, 수리도 침묵에 빠진 시간.
제이슨 주니어는 신나서 외쳤다.
“맘! 엉클 붐이 던졌어요!”
“뭐?”
“저기에서 저기까지 엄청 빠르게 공을 던졌다니까요!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