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김사범, 2026포스트시즌(나와 닮은 누군가)(2)
“스트라이크! 아웃!”
[케이시 마이즈 선수, 공이 아주 매섭네요! 네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냅니다!]
[애런 저지 선수도 스플리터에 헛스윙한 뒤 잠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죠? 패스트볼과 스플리터가 거의 구별이 되지 않고 있어요. 그만큼 마지막의 마지막, 끝에 가서야 공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굿, 보이.”
이삭이 던져 준 공을 받고, 마운드의 케이시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지? 오늘 거기서 좀 자고있어도 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케이시의 말.
'신경을 쓰니, 안 쓰니 해도 결국 신경 쓰이겠지. 당연히.'
벌써 5년째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부대끼는 상대인데, 쿨하게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타석에 들어서는 양키스의 5번 타자, 보 비솃 선수입니다.]
[오랜 메이저리그 팬이면 아실 그 선수, 단테 비솃의 아들이죠?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뉴욕 양키스로 옮긴 후 첫 시즌인 올 시즌, 2할 후반대의 타율과 3할 중후반대의 출루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토론토에 있을 때는 파워 포텐셜이 크지 않은 선수란 평가였는데, 올 시즌엔 달랐습니다. 32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군요.]
[단테 비솃도 담장을 곧잘 넘기는 타자였었습니다. 쿠어스필드를 벗어나면 조금 약해지긴 했습니다만, 그건 그 당시 로키스 선수들이면 모두 그랬으니까요.]
오늘도, 누군가의 아들이 타석에 들어왔다.
[아, 코메리카 파크 전광판에 마침 단테 비솃의 얼굴이 비치는군요. 양키스의 모든 포스트시즌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본다더니, 오늘도 역시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좋은 컨택, 평균수준의 발, 장타는 거의 당겨치는 코스에서 나오고…….’
땅을 고르며 잠시 데이터를 되새김질하다 본 전광판에는, 흰머리의 어느 노신사가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 사람이네. 단테 비솃.’
근데, 그 모습을 보다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누군가의 아들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이지?’
타석에 서있는 보 비솃도 올해 FA를 앞두고 800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나름 한 팀의 주전 2루수다. 하지만...
‘아버지가 경기를 보러 왔는데도 좋아한다기보단…… 씁쓸해 보이는군.’
“헤이! 붐!”
“어?”
“집중, 이제 시작이야.”
정신집중.
내가 지금 여기서 누굴 안타깝다고 생각한들, 아무 의미 없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다.
“볼!”
[아, 케이시 마이즈 선수의 초구가 아쉽게도 볼로 선언됐습니다.]
[좌타자 기준 바깥쪽에 아주 꽉 차는 공이었는데요, 하지만 이 정도는 구심의 존 특성으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타석에서 벗어나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며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녀석.
따아악!
그리고, 녀석은 케이시가 던진 두 번째 공을 힘껏 당겼다.
[아! 코스가 좋습니다!]
[외야 쪽 3루 선상에 맞으며 파울라인 바깥쪽을 구르는 타구! 일로이 히메네즈 선수가 재빨리 달려갑니다만...]
커트맨 역할을 하기 위해 재빨리 외야로 달려나가며 타구를 눈으로 쫓았다.
‘조금 깊은데? 일로이가 바로 던질 수 있으려나?’
공을 잡자마자 크게 도움닫기를 하며 2루를 향해 공을 던지는 일로이.
‘커트? 아니면…… 바로?’
마음 놓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고, 나는 2루에서 공을 기다리는 이삭의 시야를 막지 않기 위해 재빨리 몸을 수그렸다.
퍼엉!
“세잎!”
[2루타! 2루타입니다! 왼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태그를 피한 보 비솃 선수!]
좋은 수비, 좋은 송구였지만, 아쉽게도 보 비솃의 센스가 조금 더 좋았다.
“헤이, 이삭! 괜찮아. 열내지 마.”
괜히 베이스를 걷어차며 짜증을 내고 있는 이삭을 다독이는 케이시.
[아쉽습니다. 타이밍상 거의 동시였는데요. 보 비솃 선수가 2루에 살아 들어가긴 했습니다만, 사실 이건 조금 무리한 주루플레이였죠.]
[맞습니다. 결과가 좋았으니 다행이지만...]
곧 우리를 감싸고 있던 흥분이 가라앉고, 케이시는 아무 일 없다는듯 다시 투구를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을 통과하는 스플리터를 페이스 달턴 선수가 지켜봤습니다.]
[체력적인 이유로 포스트시즌에서 6번타자로 출전하고 있습니다만, 정규시즌에서 충분한 파괴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런 공은 아주 위험합니다.]
메히아로부터 공을 받은 케이시가 갑자기 몸을 돌려 2루에 있는 보 비솃에게 외쳤다.
“I'm going to balk!”
뭐야?
왜 갑자기?
그라운드에 있던 모두가 멍하니 서있는 와중, 케이시는 사인도 받지 않고 투구판에 발을 걸치더니 갑자기 오른발과 양손을 탈탈탈 털어 대기 시작했다.
“보크!”
당연히 이는 보크로 처리됐고, 2루에 있던 보 비솃은 똥 씹은 표정과 함께 3루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타임!”
이 어이없는 상황에 투수 코치가 타임을 외치며 달려왔고, 내야에 있는 우리들도 자연스럽게 마운드로 향했다.
“케이시, 무슨 문제 있어?”
“저 녀석이 사인을 훔쳤어요.”
“뭐?”
“프란, 맞지?”
“음…… 아마도? 안 그래도 사인 패턴을 바꾸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사인을 훔치는 게 짜증 나서 주자를 3루로 그냥 보낸 거네. 하하.
“제정신이야?”
내 입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비난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그리고 페이스는 아마 좌측으로 높은 타구를 보낼 거야. 내가 점수를 주고 말고는 네게 달렸으니까 집중해, 붐.”
“허허허…….”
투수 코치의 헛웃음이 우리를 대변해 줬다.
[아, 무슨 일일까요?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비디오를 보면…… 아, 보크가 선언되기 전에 이미 보크를 예고한 것 같은데요?]
[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고의로 한…… 고의 보크네요. 자세한 건 경기 후에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악!
케이시가 던진 네 번째 공, 슬라이더가 페이스의 배트에 걸렸다.
[높이 뜬 타구! 조금 물러나 수비하고 있던 일로이 히메네스 선수가 빠르게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아, 이거 애매해요. 수비위치를 너무 뒤로 잡았습니다. 텍사스 안타, 그러니까 행운의 안타가 나올 수도 있어요!]
케이시의 말대로 집중하고 있던 나는 타구음과 함께 재빨리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
달려오는 일로이가 잡기에는 조금 애매한 거리.
‘내가 잡는 게 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일로이의 콜은 울려 퍼졌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재차 콜을 해 봤자 일로이의 귓가에 닿긴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일로이 히메네즈…… 슬라이딩! 공을 잡았습니다! 태그업을 한 보 비솃! 홈을 향해!]
[아, 김사범 선수가 송구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홈을 향해 가는 공!]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실점 위기에서 구한 김사범 선수!]
“나이스 어시스트.”
“굿 잡.”
쓰러져 있는 일로이를 일으켜 세운 뒤, 같이 덕아웃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분명 잡은 건 일로이 히메네즈 선수인데, 김사범 선수가 공을 던졌습니다.]
[리플레이가 나오네요. 자, 여기서 일로이 히메네즈 선수가 공을 잡았고, 앞으로 미끄러집니다…… 아! 김사범 선수가 이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군요.]
[일로이 선수의 토스, 그리고 그 공을 잡은 김사범 선수가 그대로 강하게 송구, 다소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보살을 잡아냈습니다.]
[하하하, 제가 놀라운 건 어떻게 공을 잡고 미끄러지는 거리를 계산해서 거기 서 있었냐는 사실인데…… 워낙 수비 쪽에서 이런 슈퍼 플레이를 자주 보여 주는 김사범 선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네요.]
* * *
2회 말.
나는 2루에 서 있었다.
[아쉽게도 담장을 맞고 떨어지는 2루타를 기록한 김사범 선수입니다.]
[10cm만 높았어도 홈런이었을 텐데요.]
[초구, 존 중앙 약간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투심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투 같죠? 하지만 김사범 선수를 상대로 실투를 던졌음에도 홈런을 맞지 않았다는 건, 김병헌 선수의 투심이 그만큼 위력적이라는 겁니다.]
타석에는 일로이. 좋은 수비 후 타석에 들어선 만큼 조금은 기대할 만하다.
‘아니면…… 3루를 노려볼까?’
하지만, ‘김사범 학과’가 있다면 올 A+를 받고 과 수석을 차지할 만한 저 배터리를 상대로 도루를 한다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정정하자면 도루를 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긴장하는 상대들이다.
“야!”
2루 베이스 위에서 잠시 도루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는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보크 한다.”
뭐래?
이 미친놈이?
[아, 김병헌 선수도 고의보크를 하네요!]
[덕아웃의 애런 분 감독이 마른세수를 하고 있네요.]
[이야, 이건…… 자존심 싸움인가요?]
[어쩌면 월드시리즈가 달렸을지도 모르는 1차전에서……. 하하하,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피쳐 보크.”
허, 참.
내가 3루로 가긴 가는데, 하하하.
‘또라이인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또라이일 줄이야.’
그 페이스조차 마스크를 벗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아웃!”
“스크라잌! 아웃!”
“아웃!”
김병헌은 단 9개의 공으로 이닝을 끝냈다.
3루에서 주루 코치에게 헬멧과 장갑을 벗어 준 뒤 잠시 기다리자, 내 글러브와 모자를 가져온 이삭이 내게 속삭였다.
“붐, 집중해야 해.”
“왜?”
“케이시, 지금 완전 불타올랐어.”
“뭐?”
“봐봐, 마운드에서 계속 웃잖아.”
맙소사.
케이시가 마운드에서 웃다니.
저거, 정말 열 받았다는 소리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인가?”
“자주어언…… 뭐?”
“그런 게 있어. 너도 집중해라. 오늘 에러했다간 케이시가 널 그대로 멕시코까지 던져 버릴 테니까.”
“너야말로.”
이왕 두 천재가 싸우는 거, 우리 편 천재가 이겨야지.
* * *
코메리카 파크, 중계석.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김사범 선수가 타석에 들어왔습니다. 현재 스코어는 0-0.”
“바로 고의사구를 선언하네요. 오늘 김병헌 선수는 2회 말 첫 타석 이후 김사범 선수를 절대 상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92구, 김병헌 선수가 지금 시점에서 90구. 만약 연장에 들어가더라도 두 선수 모두 나올 가능성이 있겠네요.”
“케이시 마이즈 선수라면 몰라도, 김병헌 선수는 안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4차전 등판 후에 3일밖에 못 쉬었거든요? 제가 애런 분 감독이라면 절대 내보내지 않을 거예요.”
“果たして2人の選手が延長戦にも登板しましょうか。”
(두 선수가 연장전에도 등판할까요?)
“絶対登板しません。”
(절대 등판하지 않을 겁니다.)
“Los dos jugadores tienen tiempo libre.”
(두 선수 모두 여유가 있군요.)
“Bien, esta es una imagen maravillosa.”
(좋아요,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 주네요.)
세계 각국의 해설위원들이 두 선발투수가 연장 10회에도 나올지 토론을 벌이는 사이, 김병헌은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패스트볼? 싫어. 최대한 맞춰 잡는 쪽으로.’
김병헌이 생각하기에,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누가 더 오래, 그리고 강렬한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대한.
‘저 녀석을 넘는 건 힘들겠지만…….’
1루에 있는 김사범을 눈으로 견제하며 서서히 힘을 모으는 김병헌.
‘운이 좋아 좋은 동료를 만나 과대평가되는 투수 따위는, 넘어야지.’
“흡!”
그의 커터가 타자의 배트를 부수고 다시 마운드로 굴러오는 순간.
“케이시, 잘 생각해 봐. 아직 우린…….”
“나갈 겁니다. 나가게 해 주세요.”
디트로이트 덕아웃의 케이시 마이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쓸데없이 자존심 싸움을 할 필요가 없어. 다음 기회에…….”
“저 녀석, 곧 지쳐서 헉헉댈 겁니다. 장기적으로도 지금 불펜을 아끼는 게 나아요, 코치님.”
“후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고.
[케이시 마이즈, 연장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서 있습니다.]
김사범이 예상했던 대로, 두 투수의 자존심을 건 시작됐다.
“보스, 봤죠? 저도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