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김사범, 2026포스트시즌(나와 닮은 누군가)(3)
[김병헌 선수가 아이싱을 하지 않고 있는데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눈속임일 겁니다. 이미 7회 말부터 불펜 투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거든요? 지금도 보시면…… 네, 데이비 가르시아 선수가 몸을 풀고 있네요.]
[그렇군요. 자, 말씀드리는 순간 케이시 마이즈 선수의 오늘 경기 10번째 이닝이 시작됐습니다.]
“스트라이크.”
1회 초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다소 톤이 다운된 구심의 목소리.
- 우와아아아아!
- K!! 잡아먹어 버려!!
- K! K! K! K! K!
그라운드에서 오직 두 곳.
마운드와 관중석만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던지고, 휘두르고. 공을 돌려받고. 다시 던집니다. 마치 공을 던지기 위해 태어난 기계를 보는 것 같네요.]
[맞습니다. 훌륭한 투수의 덕목 중 하나로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꼽는데, 케이시 마이즈 선수처럼만 하면 됩니다.]
“스트라이크! 투!”
“볼!”
“……스트라잌! 아웃!!”
[지금 보세요. 까다로운 이닝 선두타자를 4구만에 삼진을 잡아냈으면서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하하하, 대단해요.]
이닝이 시작하기 전 짓던 미소는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케이시는 무표정한 얼굴과 매서운 공으로 양키스 타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코리가 온 이후로 더 심해진 거 같은데…… 투수끼리는 저런 노하우도 공유하는 건가?’
“스윙! 아웃!”
7번, 스테판 제이. 0-2에서 체크스윙, 아웃.
틱!
“아웃!”
8번, 안토니오 카베요, 1-2에서 파울팁 삼진.
[아…… 속수무책입니다. 적어도 투구 수라도 늘렸어야 했는데요…….]
[10이닝 103구. 정말 효율적인 투구입니다.]
케이시가 마운드를 내려가는 순간.
3루 측, 양키스 팬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엄청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 우와아아아아!!
‘뭐야?’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오늘 나 몰래 영화촬영 같은 걸 하는 건가? 쟨 또 왜 나와?’
김병헌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헤이, 숙녀들.”
론은 경기 중에 입을 잘 열지 않는다.
특히 이렇게 많은 선수들 앞, 그러니까 팀 전체에게 말하는 경우는 더 드물고.
“우리 디트로이트 숙녀분들이 로맨스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처절한 스릴러다. 그리고…….”
- Yes, boss!
- Ok. Sir.
- I know.
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았다고 외치는 동료들.
“……흠. 좋군. 좋아. 좀비 영화도 좋아들 하나? 다들 좋아했으면 좋겠군.”
* * *
[맙소사. 나왔습니다. 김병헌 선수가 10회 말, 경기에 나왔습니다.]
[9회 말까지 100개가 안 됐었기 때문에…… 네, 정확히 93개를 던졌네요, 아무튼,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더 중요한 순간에 나오지 못할 텐데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운드에 서 있는 김병헌 선수! 그리고 그와 반대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있는 애런 분 감독의 얼굴입니다.]
“맙소사, 케이시와 비슷한 녀석이 둘이라니.”
“애초에 투수란 종자들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게 이상한 거지.”
“그건 맞지. 음…… 그럼 이제 우린 코리안 케이시를 부수면 되는 건가?”
“‘마운드에서 기분 나쁘게 웃어 대는’이 빠졌어.”
이삭과 쉴 새 없이 대화하면서도 눈은 김병헌의 공에서 떼지 않았다.
퍼엉!
[존 정중앙을 통과하는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98마일이 나옵니다.]
[100개 가까이 던진 투수의 구속이 98마일, 하하하, 정말 국보급 투수네요. 김병헌 선수.]
“아! 이걸 쳤어야지!”
“스튜어트도 생각이 있겠지.”
“그냥 하나 보고 들어가려고 했던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보이긴 했어.”
사실, 공을 오래 보고, 타석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이런 전술은 보통 이런 부작용을 낳는다.
“그나저나, 스튜어트가 괜찮아야 할 텐데.”
애초에 무조건 초구를 흘려보내는 습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의 초구에 멘탈이 무너져 쉽게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보이기도 하니까.
“스트라이크! 투!”
[2구는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거의 땅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습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 맘이 조급해진 게 여기서도 보이네요. 침착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원바운드성 공을 던지라는 사인에 그대로 던지는 김병헌도 김병헌이지만,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블로킹하는 페이스도 정말…… 얄밉게 잘한다.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스튜어트는 4구째,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를 내며 삼진을 헌납했다.
“제길, 초구를 쳤어야 했어.”
덕아웃으로 들어서며 자책하는 스튜어트에게 혹시 몰라 말해 줬다.
“스튜어트, 만약 다음 타석이 돌아오면…… 절대 초구는 노리지 마요. 상대는 페이스니까.”
잠시 후.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양 팀 투수가 연장 10회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김병헌 선수가 맘먹고 삼진을 노리니 이렇게 무서워집니다. 이번 이닝에서 보여 준 모습만 놓고 보면, ‘BK’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에요.]
[아, 김병현 선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성기 때는 정말 무시무시한 공을 던졌었죠.]
[물론 두 선수가 닮진 않았습니다. 않았는데…… 저만 그런가요? 자꾸 두 선수의 모습이 겹쳐서 보이네요.]
[하하하, 아마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야구 내/외적으로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선수들이다 보니…….]
“케이시, 또 나가려고?”
“그래야지. 아직 던질 수 있으니까.”
글러브를 챙겨 제일 먼저 덕아웃을 빠져나가는 케이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대 감독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론도 불쌍하지……. 저러다 혹시라도 지면, 그 비난은 무조건 론에게 쏟아질 텐데.’
덕아웃을 나서며 힐끗 본 론의 얼굴이 오늘따라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 * *
- Go! Yankees! Go!
- Booooo~
누군가의 응원과 누군가의 비난이 울려 퍼지는 이곳.
우린 코메리카 파크의 마운드에 모여 있었다.
“케이시, 슬슬…….”
“아직 더 던질 수 있습니다.”
“프란, 어때?”
투수 코치의 질문에 슬쩍 고개를 젓는 프란시스코.
“그것 봐. 냉정하게 생각하자고, 케이시. 우린 아직 갈 길이 멀어.”
“후…….”
미련이 남은 듯, 전광판을 힐끔거리는 케이시.
“10이닝, 그리고 투아웃이면 충분해.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더 던지면 론은 내일 아침 변사체로 발견될 수도 있어.”
이삭의 말에 살짝 흔들리는 동공.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덤으로 곧 폴리가 풀려나면 널 물지도 모르고. 잘 생각해, 너도 폴리처럼 바보가 될 수도 있다니까?”
“……좋아.”
먹혔다.
이 교체는 내가 다 한 거다.
나중에 케이시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 꼭! 말해야지. 내가 그때 막지 않았으면 지금의 케이시는 없었을 거라고.
[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투수 교체입니다.]
[페이스 달턴 선수에게 맞은 2루타가 결정적이었네요. 그 전까진 아주 훌륭하게 막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미 패스트볼 구속이 91마일까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페이스 달턴 선수 상대로는 제구도 살짝씩 흔들리는 경향이 있었고요.]
[투혼을 보여 준 팀의 에이스에게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네, 박수 받을 가치가 있는 투구 내용이었습니다.]
- No. 77, 제이슨 폴리!
- 우와아아아아아!
디스토션을 잔뜩 먹여 아주 시끄러운 기타소리가 코메리카 파크에 울려 퍼졌다.
[바로 마무리 투수를 투입하는 강수를 두네요.]
[디비전 시리즈에서 등판이 없었던 제이슨 폴리 선수이니만큼 구위나 체력적인 면에선 아주 컨디션이 좋을 겁니다.]
몇 개의 연습투구를 마치고, 마운드 뒤편에서 스파이크에 붙은 흙을 털던 폴리가 아주, 아주 불길하게 웃었다.
“I'm going to…….”
그만해. 그만해 이 미친놈아!!
“B.A.L.K”
맹세컨대, 정말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갈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 마, 이 미친놈아!”
이삭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주 현란한 멕시칸 F 발음을 선보이며 비난했지만. 슬프게도 야구의 모든 플레이는 투수가 공을 던져야 시작된다.
“……보크!”
[아하하…….]
[하하하…… 중계를 하며 여러 에피소드를…… 이건, 참…….]
펑!
102마일. 몸쪽 꽉 찬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퍼엉!
얼씨구? 104마일. 바깥쪽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퍼어어엉!
잘 논다. 105마일. 하이 패스트볼. 삼진아웃.
[오직 3개, 3개의 공으로 나머지 아웃카운트 한 개를 잡아내는 제이슨 폴리 선수입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크크크크큭.”
난. 저 멍청이를. 죽일 것이다. 게임이 끝나면.
“분명 자기가 멋있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삭의 말대로, 그러고 있을 거다. 분명.
“그래도,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플레이로는 나쁘지 않았네. 붐, 도와줘.”
“콜.”
일단, 이 경기 좀 이기고.
* * *
‘오른팔이 빠질 거 같다. 무리했나?’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11회 말.
김병헌은 마운드를 떠나 아이싱을 준비하고 있었다.
‘볼넷 하나만 없었어도……. X발! 겨우 분위기를 가져왔는데…….’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 김병헌의 눈에 비친 선수단의 모습은 참담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패배에 절여진 선수단.
그럴싸한 단어들로 어렵게 포장된, 양키스의 패배를 점치는 기사들.
김병헌은 그걸 다시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던졌는데. 볼넷 하나 때문에…….’
사실, 볼넷 하나 때문은 아니다.
지난 이닝에 비해 확 떨어진 구속, 그리고 예리한 맛이 사라져 버린 변화구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나서, 두 번째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지 않았더라도 페이스는 벤치에 교체 사인을 냈을 거다.
‘이렇게 된 이상, 꼭 이겨야 한다. 꼭. 오늘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5년 만에 깔린 무대다. 무대, 주인공, 드라마까지.
김병헌이 생각하기에 이 악연을 지금 끊지 못한다면 양키스는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잭, 조금만 더 빨리 해 주세요. 빨리 나가 봐야 해서.”
“음? 네. 알겠습니다.”
빨라지는 트레이너의 손, 점점 차가워지는 김병헌의 오른팔.
마침내, 그가 다시 덕아웃으로 나왔을 때, 경기장은 시리도록 차가운 오른팔과 반대로, 아주 뜨거워져 있었다.
쿵!
- Boom!
쿵! 쿵!
- Boom! Boom!
디트로이트 팬들이 일어서서 굴러 대는 발소리에 구장이 울렸다.
[원아웃 주자 만루, 타석엔 김사범 선수가 들어섰습니다.]
[양키스의 벤치가 움직여 보지만, 늦었어요. 조금 더 빨리 움직였어야죠.]
[단 2구 만에 2개의 안타를 헌납한 조나단 로아시아가, 하지만 불펜은…… 움직이지 않는군요.]
점점 시야가 아득해지는 느낌에 김병헌은 옆의 벤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빠아아악!
‘괜찮은 내셔널리그 팀 없나? 저 X끼 없는, 그런 데.’
김병헌은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처음으로 팀을 옮기는 걸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홈 2연전 모두 승리. 제2의 고향, 뉴욕으로.]
[애런 분, ‘킴의 4차전 등판은 없다.’]
[케이시 마이즈, ‘감독님이 허락한다면, 마지막도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
[론 가든하이어, ‘No.’ 단호한 거절.]
“오빠, 준비됐어?”
“응. 다 챙겼어. 근데…… 자기. 내가 더 어린…….”
“조용히. 나, 나쁜 소리 들으면 안 돼.”
“아니, 그게. 이게 나쁜 게 아니라 사실……. 난 좋아. 좋은데, 그래도 그게 참…….”
“빨리 가서 월드시리즈 진출 확정시키고 와. 그래야 내가 선물을 주지.”
“선물?”
“이번엔 정말 엄~청 대단한 거니까, 기대하고.”
“언제 줄 건데?”
“월드시리즈 우승하면?”
“그럼, 우승 못 하면?”
“어…… 그래도 주긴 줄 거야. 안 주면…… 큰일 나거든.”
“아, 그때처럼 음식이야? 너무 많이 준비하지 마. 그때도 힘들었잖아.”
“그건 아닌데. 아무튼, 다녀와요. 오. 빠.”
“어…… 어어…….”
[붐, 3차전 멀티 홈런! 절규하는 양키스 팬들.]
[어제도, 오늘도, 당연히. 늘 그렇듯 승리하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이삭, 수리가 준비한 선물이 뭘까?”
“그때처럼 뭐 이벤트 같은 거 아냐?”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어제부터 이 질문을 한 10번 정도 받은 것 같은데.”
“아, 미안. 그냥 머리 비우고 빨리 우승이나 해야겠네. 그게 낫겠어. 수리가 나쁜 걸 줄 리도 없고.”
[챔피언십 시리즈 스윕, 아메리칸리그 월드시리즈 진출팀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병헌 킴, ‘패배에 익숙해지는 건 프로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
[애런 저지 ‘킴의 말이 맞다. 지금 상태에서는 절대 타이거즈를 이길 수 없다.’]
[월드시리즈 우승팀은? 아직 상대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95%의 지지를 받은 타이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