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72화 (172/175)

172화 김사범, 그리고 쿨몽둥이(2)

다음 날, 코메리카 파크의 그라운드.

제이슨 폴리와 김사범이 마치 다른 팀인 양 1루와 3루 덕아웃 앞에서 각자 몸을 풀고 있었다.

“감독님,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시즌 초반이 막 지나가고 있는데 혹시 둘 중 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그걸 방지하자고 우리들이 여기 있는 거 아닌가? 일단 붐을 믿어보지. 입 밖으로 낸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만. 정 불안하면 시뮬레이션 피칭이라고 생각하게. 다를 것도 없지 않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거의 모든 코칭스탭이 그라운드에 나와 있었고, 심지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의료진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후…… 알겠습니다.”

* * *

반대쪽 덕아웃에서 몸을 풀던 폴리가 마운드와 홈플레이트 중간 부분부터 천천히 포수와 공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배트를 잡아야겠네.’

아무래도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선발 투수들보단 훨씬 빠르게 어깨가 달궈질 거다. 뭐, 마무리 투수들이 다른 불펜투수보다 조금 천천히 몸을 푸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 봤자 10~20분이면 몸이 풀리겠지.’

당연하지만, 폴리와의 맞대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스프링 캠프 때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게 시뮬레이션 피칭이고, 론은 청백전을 꽤 자주 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르다.

일단 어느 한쪽이 몸이 덜 만들어진 캠프 때와는 다르게 둘 다 충분히 몸이 만들어져 있고, 반쯤은 장난으로 상대하던 그때와 또 다르게 서로에게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니까.

“붐, 꼭 해야겠어? 이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어제, 폴리와의 대화 이후 자초지종을 들은 케이시가 내게 말했다.

“몸이 아픈 거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저 녀석이 지금 앓고 있는 건 마음의 병이야. 그리고 내 판단으론…… 이게 유일한 약이거든.”

오랜만에 꺼낸 새 배트가 오늘따라 유독 빛나고 있었다.

“후…… 둘 다 말이 통하질 않는군. 좋아. 이왕 할 거면 화끈하게 붙어. 둘 중 하나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폴리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폴리는 리그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마무리 투수고, 사적으로는 내 친한 친구다.

‘우정 어린 쿨몽둥이 맛을 보면 정신을 차리겠지.’

오늘이 지나고, 혹시 또 다른 이유로 이곳이 지루하다 여겨지더라도 내 배트를 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내가 폴리에게 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붐, 준비됐나? 폴리는 준비됐다는군.”

“물론이죠.”

코치가 준비가 다 됐음을 알리고, 어느새 꽤 모여든 사람들을 관중 삼아 타석에 들어섰다.

* * *

“케이시, 제이슨이 무슨 공을 초구로 던질까요? 역시 패스트볼이겠죠?”

“글쎄…….”

“패스트볼 비율이 80퍼센트 가까이 되는 사람이니까, 분명 패스트볼로 나갈 거예요. 내기하실래요?”

“아니, 난 그런 내기는 안 해.”

덕아웃에서 이 대결을 지켜보던 케이시는 옆에서 조잘거리는 이 루키가 굉장히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이름 대신 핏불이란 우스운 별명을 더 좋아하는 녀석은 좀처럼 입을 다물 줄 몰랐고…….

“초구는 몸쪽 낮은 패스트볼. 붐이 예상을 했다 해도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를 몸쪽 코스로 바로 집어넣으면 반응이 늦지 않을까요?”

“……그럴싸하군.”

“그렇죠? 그렇게 초구가 스트라이크가 되면……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보여 주는 공으로 바깥에 떨구고, 마지막엔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아내는 거죠. 아, 이거 혹시 제가 붐을 상대할 마스터피스를 만들어 낸 거 아녜요?”

“한 한달 쯤 후에, 네가 여기에 남아 있다면 넌 아마 소울메이트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라테라고. 너와 굉장히 비슷한 녀석이 있지. 아, 너무 비슷해서 서로 싫어하려나?”

케이시는 최근 사타구니 부상으로 30일짜리 DL에 오른 라테가 갑자기 조금 보고 싶어졌다.

“흐으읍!”

‘오, 그래도 예상은 제법 비슷하게…….’

빠아악!! 텅!!

타구음이 미처 퍼지기도 전에 외야로 떨어진 공.

일일 구심을 맡은 벤치코치는 그제야 큰 목소리로 콜을 외쳤다.

“파, 파울!”

“배트가 늦어? 마스터피스?”

“어…….”

“잠자코 보기나 해. 네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딴 곳으로 팔려 가게 되면 벌어질 일이니까.”

“음…….”

그제야 조용해진 핏불.

케이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대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 처음부터 막힌 거 같은데……. 폴리, 어쩔 거지?’

* * *

‘와우씨, 깜짝 놀랐네.’

아무리 그래도 부상 위험이 있는 몸쪽 공을 바로 던지겠나 싶었는데…… 던졌다.

물론, 놀란 내 머리와 다르게 몸은 충실하게 스윙을 시작했고, 꽤 좋은 타구를 관중석에 꽂아 넣었지만.

“뭐해? 안 던져?”

멀거니 서서 타구를 바라보던 폴리에게 간단하게 도발을 날려주고, 배팅 장갑을 다시 고쳐 맸다.

사실, 이번 대결은…… 사기다.

나한테 너무 유리하거든.

‘포볼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이긴 거나 다름없지.’

구위? 내 힘을 이길 만한 구위의 투수가 있을까?

제구? 볼넷이 없다면 어차피 공은 존 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난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은 놓치지 않는다.

만약 폴리가 이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거겠지.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후웁!”

2구째, 폴리의 공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던지는 순간 으르렁거려 다가오는 느낌이 아니다. 그럼…….

빠아악!!

체인지업이지 뭐.

예상대로 낮게 떨어지는 공을 있는 힘껏 퍼올려 좌중간 담장을 넘기자, 주변에서 환호와 함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폴리는 타구를 쫒아가지 않았다.

그저 마운드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을 뿐.

“세 타석 남았다.”

이대로라면 20개 안쪽에서 끝나겠는데?

“타임. 롭, 잠시만.”

뭔가를 느낀 건지, 아니면 그저 발악을 하는 건지. 포수를 불러 뭔가를 이야기하는 폴리.

그래 봤자 내 40인치, 1.2kg의 쿨몽둥이를 막을 순 없겠지만.

“붐, 폴리가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거 같은데…….”

“방금 전엔 아니었대요? 그러기엔 초구가 너무 살벌하게 날아왔는데.”

“그게…… 아무튼, 조심해.”

롭의 말을 뒤로하고 타격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구종도, 코스도 이지선다인데 조심할 필요까지야.

“흡!”

‘이 미친놈이!’

내 옆구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공에 갑자기 아픈 기억이 떠올라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스트라이크!”

그때완 다르게 매섭게 꺾이며 존으로 들어가는 슬라이더.

“것 봐. 조심하라고 했잖아.”

조심할 만하네.

나 말고 저 자식이.

* * *

그날 오후, 폴리의 집.

철컥.

“달링, 왔어? 일찍 왔네?”

“어…….”

“주니어는 지금 낮잠. 아까 공원에서 실컷 놀더니 아직 안 일어나네.”

“또 뛰어서 공원 한 바퀴 돌았어?”

“응. 당연하지. 누구 아들인데. 그나저나…… 뭔 일 있어?”

로라는 폴리의 표정이 평소 같지 않은 걸 단숨에 알아챘다.

“별일 아냐.”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데?”

“정말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그런 거야. 나 씻을게.”

“흐응…… 알겠어.”

넓고 화려한 욕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폴리는 생각했다.

‘도대체 왜…… 왜 진 거지?’

손에 익지 않아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슬라이더를 던졌고, 마지막 타선에선 재미 삼아 몇 번 던져본 벌컨까지 던지면서 김사범의 타이밍을 뺏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 결과는…… 4피홈런.

김사범은 폴리의 공에 4번 휘둘러 4개의 홈런을 만들어 내며…… 웃었다.

“도대체 왜!”

하지만, 정말 폴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했는데도 전혀 분한 감정이나 아쉽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그랬구나’ 하는, 마치 흥미 없는 영화의 엔딩을 보고 나서 느껴지는 그런 감정, 그 뿐이었다.

“왜…….”

지금 이 모습을 담당 심리상담사가 봤다면 너무 압도적인 차이에 경쟁심마저 들지 않는 거라고, 지금 이 결과에 집착하다가는 더 큰 걸 잃을 수 있다며 말렸겠지만, 아쉽게도 폴리는 지금 이 순간 혼자였다.

“어땠어?”

“뭐?”

“역시, 압도적이었나 보네.”

“지금 뭐하자는 거야?”

“화내지 말고.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폴리의 생각은 흐르고 흘러 대결이 끝난 뒤 케이시와 나눈 마지막 대화까지 흘렀고, 폴리는 괜히 더 힘이 빠졌다.

‘그건…… 해볼 만하다는 눈빛이었어. 제길.’

그렇게 샤워가 끝나고 우울한 얼굴을 하고 나온 폴리를 바라본 로라는 시원한 캔맥주를 손에 든 채 폴리에게 다가갔다.

“오늘 형편없이 깨졌나 보네?”

“어…… 어?”

“아침에 수리하고 통화했어. 오늘 붐하고 대결했다며. 둘이서.”

“아…….”

“그래서, 어땠어? 해볼 만했어?”

“아니, 아주 최악으로 깨졌지.”

“그래? 아쉽겠네.”

“다른 타자들은 내 공을 스치지도 못했는데, 그 녀석은 그걸 제대로 노려서 치더라고.”

“그랬어?”

“마지막 타석에서는…….”

“답답했지?”

“어.”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이길 수 있겠어?”

“음…….”

“난 자기가 하는 모든 결정을 존중해. 하지만…….”

“하지만?”

“주니어는 아빠가 지는 걸 싫어해. 주니어에겐 아빠가 세계 최고의 투수거든.”

“벌써 투수가 뭔지 알아?”

“알지. 공 던지는 사람. 착한 히어로.”

“크크큭, 그럼 그 공을 치는 타자들은?”

“나쁜 빌런. 주니어답지?”

“주니어답네.”

“어때, 좀 나아졌어?”

맥주 때문일까, 아니면 로라와의 대화 때문일까. 폴리는 어느새 웃으며 로라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금. 내가 해야 할게 뭔지도 알았고.”

“그럼 해야지?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니까.”

“그럼. 당연하지.”

폴리는 자신이 팽개친 짐 속에서 핸드폰을 찾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못됐어 정말, 한 타석쯤은 져 줄 만도 한데.]

“그러다가 나쁜 버릇 들어. 해야 할 땐 해야지.”

[난 가끔 자기가 우리 제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돼.]

“갑자기 왜?”

[놀아 주다가 똑같이 싸울 거 같거든.]

“그럴 리가. 난 절대 안 그래.”

[그래? 내가 볼 땐 아닌데……. 아무튼, 이번 주에 디트로이트로 갈 거야. 태연 씨 집 구했다며?]

“우리 집에서 3분 거리야. 영어에 익숙해지려면 조금 떨어져 사는 게 낫다고 해도 들어먹어야지.”

[난 좋은데? 하별이도 근처에 있고. 아무튼, 조금 있으면 보겠네?]

“지금도 보고 있는데?”

[이런 영상 말고. 어? 잠깐만. 하별아!]

“아냐, 곧 볼 텐데 뭐. 조심해서 와. 의사도 같이 오니까 별일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알지?”

[알지. 사랑해.]

“사랑해.”

수리와의 짧은 영상통화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오늘 일을 떠올렸다.

‘한 타석쯤은 줘야 했나? 저러다가 더 튕겨 날아가면 어떡하지?’

밑도 끝도 없이 단순한 폴리이니만큼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 씨, 고민되네. 그래도…… 해야겠지?’

폴리를 두 번 죽이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폴리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을 것 같다.

띵동!

바로 그때, 문자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핸드폰.

‘이 시간에?’

어차피 폴리에 전화를 하려던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론 : Thank you.]

그리고, 난 그대로 핸드폰을 엎어놓고 잠을 청했다.

오늘은 왠지 잠이 잘 올 거 같은 밤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