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김사범, 2032 포스트시즌, 그리고 끝
2032년 가을.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끝났습니다."
"정부 쪽은?"
"로비도 꽤 했고……. 안전하다는 것만 확실히 입증되면 바로 허가를 내준다는 입장입니다."
"그럼 남은 건 미국 쪽인가? 그쪽은 어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보니 꽤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희가 보낸 자료를 검토 중인 거 같습니다. 아마 곧……."
"그래. 다행이군. 후우. 큰 산을 넘었어."
정찬열 대표가 의자 위로 몸을 던지듯 앉으며 신영호 팀장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투자자님은 어떻게 그걸 안 거지? 강제 접속 해제 건 말이야."
"글쎄요, 그렇다고 해서 정확히 말해 준 건 아니잖습니까? 그냥 그 부분이 걸린다고만 했지. 아마 어디서 누군가가 조언을 해 준 거겠죠."
"그렇겠지?"
"말이 투자자지, 사실상 대주주 아닙니까. 혼자 발렌 사가를 만든 거나 다름없는데."
"그렇지. 그렇긴 하지. 후우. 이거 발렌 사가가 성공해도 문제야. 자, 아무튼 이런 머리 아픈 돈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때, 재미있었어?"
정찬열 대표의 말투가 바뀌자 신영호 팀장의 말투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선배, 아직 안 해보셨죠? 해보세요. 우리가 만들었지만…… 대박입니다."
"바빠서 테스트를 할 틈이 있었어야지. 버벅이거나, 생각과 다르게 움직인다거나 그런 건?"
"전혀. 바로바로 움직입니다. NPC들도 키워드만 정확히 말해 주면 제법 인식을 잘하고요."
"앞으로 해야할 일 천지네. 딥러닝이라고 말해도 제대로 사람 같은 반응이 나올 때까지는 한참 걸릴 거 아냐?"
"그야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고, 끈기있게 대답해 주면 대답할수록 느는 거니까. 자, 그래서…… 런칭은 언제……."
"미국에서 콜 하는 그 순간. 바로 런칭할 거야."
"……지금 이제 막 VR룸 꾸미고 있는 건 아시죠? 이제 서울에 몇 군데 완공됐어요. 아직 지방까지는……."
신 팀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 정찬열 대표.
"아냐, 그건 그냥 쇼케이스 같은 거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 기기, 가격이 얼마지?"
"라인업에 따라 다르죠. 대충 300?"
"봐봐, 발표하는 순간 초도 물량은 순식간에 팔려 나갈 테니까."
"그건 그런데……."
"가서 공장 가동률이나 신경 쓰고 있어. 무조건, 최대한 뽑아내야 해. 초반에 얼마나 물량을 풀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알지?"
"그럼요. 예, 예."
"가 봐. 가서 목숨을 바쳐서 일하고. 제수씨한텐 내가 빽 하나 보낼 테니까 가정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일해."
"허, 참. 선배란 사람이 후배 가정을……."
"오늘 일하면 3년 뒤에는 너 전세기 타고 다닌다. 외제차 말고, 전세기."
"됐어요. 갑니다. 선배는…… 챙길 가족도 없네. 몸관리 잘해요. 집에서 혼자 뻗으면 그대로 고독사니까."
"크크큭, 가라. 핫산."
"에이. 가서 일한다. 핫산."
* * *
몇 주 뒤, 뉴욕.
[2021년부터 바로 지금, 2032년까지, 메이저리그의 역사엔 단 한 팀만이 남아 있습니다.]
[포스트시즌 11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팀이죠.]
[2028시즌의 필라델피아, 2030시즌의 양키스를 제외하고는 이 팀의 아성을 깨려는 시도조차 못했습니다.]
[하하하, 오죽하면 사무국이 나서 포스트시즌의 룰까지 바꿨겠습니까. 아무래도 10년 동안 우승의 순간을 홈에게 즐기지 못했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바뀐 룰이죠? 승률이 앞선 팀이 홈/원정을 결정할 수 있게 됐는데, 사실 이게 바뀌긴 했어도 효용성이 없다는 의견이 많았었거든요.]
[첫 두 경기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7차전도 원정에서 맞이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과감하게 홈 이점을 포기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다는 소리겠죠?]
[‘사범 룰’이 만들어지며 자동 고의사구가 없어진 지금, 거리낄 게 없는 거죠.]
[맞습니다. 자, 그럼…….]
"컨디션은 어때?"
"최고지."
순간적으로 척수에서 올라온 말을 참느라 혼났다.
챔피언십 1차전에 나가는 선발투수를 놀려 먹다가 경기 내용이 안 좋기라도 하면…… 아주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넌? 보니까 좋아 보이긴 하네."
"나? 아주 기대감에 돌아 버릴 거 같지. 오랜만이야. 이런 느낌."
"성격 참~ 좋아. 팀동료 하나 다른 팀으로 갔다고 빡쳐서 복수심이나 불태우고."
"닥쳐. 복수심 아니라고."
"애냐? 애야? 수아는 아빠가 이러는 건 알고?"
"너 가라."
"왜?"
"여기 있다간 곧 너 죽어. 그것도 되게 끔찍하게."
"간다. 경기 준비 잘하고."
본인도 뭔가를 느꼈는지, 김병헌이 내게서 재빨리 멀어졌다.
그렇게 분노한 마음을 추스르며 오늘 사용할 배트 상태를 검사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날 불렀다.
"뭐하고 있는거야?"
"배트 검…… 넌 여기 웬일이냐?"
"웬일이긴. 여긴 내 홈구장인데. 잊었어?"
"아, 그래. 네 홈구장이지. 오케이."
케이시다.
"아직도 삐져 있는 거야?"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지. 말은 바로 하자고."
"그거나 그거나인데. 경기에서 보자. 아주 재미있는 걸 많이 들고 왔거든."
"그래, 잘 지내고 다신 보지 말자."
"훗."
핀 스트라이프를 입은 케이시의 모습이 멀어지고, 갑자기 녀석이 팀을 떠나며 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난, 너를 잡으려고 거기 가는 거야. 이젠 우승보다 그게 더 하고 싶어졌거든."
"개소리. 그냥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겠지."
"당연한 거 아냐? 여기도 붐, 저기도 붐. 이젠 질렸어."
"예전의 그 순진했던 케이시는 어디로 가고……."
"그땐 그때지. 아무튼, 간다. 잘 살아라."
피도 눈물도 없는 마지막 인사였다.
아, 물론. 그렇다고 내가 케이시를 싫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얄밉고 짜증 날 뿐이지.
'시즌 중에 제대로 한번 교육을 시켜 줬어야 하는데.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는.'
큰소리치며 팀을 옮겼음에도 막상 정규시즌이 되자 이런저런 핑계로 맞대결을 피했던 케이시.
처음엔 어떤 대단한 걸 준비하길래 저렇게 빼나……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질렸다. 그냥 빨리 후드려 패서 눈물 질질 짜는 걸 보고 싶을 뿐.
"야! 사범아! 오늘 수아도 온다며?"
"어. 몰랐냐?"
"당연하지! 난 네가 홈경기에만 부를 줄 알고 하별이한테 말도 안 했는데!"
"내가 말했어. 같이 올 거야."
"그래? 그럼 됐고."
"그 말 하려고 저기 외야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당연하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에휴. 팀의 1번타자란 놈이 이러는데 이길 수 있으려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오늘 케이시 가볍게 밟고 다 같이 거기 가자. 그 멤버십 어쩌구 하는데."
"그래, 가자."
"병헌이네 제수씨도 아직 여기 있잖아? 같이 가면 되겠네. 안그래도 하별이가 한번 만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좋지?"
"그래. 그래."
"팀 옮기고 한국인 메이저리거 첫 가족모임이네? 애기들 안 힘들게 빨리 끝내야지. 야, 빨리 끝내라? 또 커트해 대면서 쌩쑈하지 말고."
"그래. 그래."
"그래. 간다. 병헌이한텐 내가 말해 놓을게."
"그래. 그래."
요즘 들어 더 말이 많아진 김태연이 떠나고, 난 그제서야 다시 배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신집중…… 집중…… 집중…….’
"이런 xx. 집중은 다 잡쳤네. 망했어."
* * *
같은 날, 서울.
"Ok. Thanks."
신 팀장이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자,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뭐, 뭐래요?"
전화를 끊은 그 자세로 멍하니 있는 신 팀장의 모습에 답답해진 누군가가 재촉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신 팀장. 그리고…….
"통과……했답니다. 미국 기준."
"정말로?"
"정말이에요?"
"통과했다고? 진짜?"
"으아아아아아아악!! 해방이다!!!!"
누군가는 되묻고, 누군가는 -주로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아 있는- 환호하는 가운데, 정찬열 대표가 살짝 물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트 서버 올리세요. 시작합시다."
정찬열 대표의 말이 끝난 그 순간, 각종 SNS에 '발렌 사가'라는 네 글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제가 저번에 예고했었죠? 그때는 엠바고가 걸려, 아! 우리 구독자님 엠바고 모르시는구나? 구글에 쳐 보세요. 그럼 나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송출되기 시작한 게임BJ들의 방송.
"이게요, 뇌파!로 조종하는 게임이랍니다. 그러니까…… 에…… 여기 보시면…… 장비를 쓰고 게임을 실행하면 따로 몸을 움직일 필요 없이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다네요. 뭐죠? 이거 가상현실이네? 이게 진짜 가능한 거예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무슨 가상현실ㅋㅋㅋㅋ 말이 됨?]
[일단 접속하자마자 조각 ㄱㄱ 아니면 대장장이를 하던지.]
[요즘 VR게임들 가상현실 타이틀 달고 나오는게 한두 개도 아니고. 저러고 들어가면 폴리곤 덩어리임. 내가 암.]
[돈은 많이 썼네. 지금 게임 커뮤니티 배너들 다 발엔사가인지 먼지 그걸로 쫙 깔림 ㅋㅋㅋㅋ]
[발엔 ㄴㄴ 발렌 ㅇㅇ]
[어차피 발로 만들었을텐뎅]
하지만, 몇 시간 뒤.
"우와……. 보이세요? 보이죠? 이야…….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요? 오히려 완전 사실적인 그래픽이었으면 그…… 불쾌한 낭떠러지? 뭐죠? 아, 그래 불쾌한 골짜기. 그게 느껴져서 더 그랬을 거 같은데, 그 중간지점을 아주 잘 잡았어요."
"지금 제 시야는 거의 평상시와 똑같아요. 에너지 바하고 마나 코스트 바를 제외하면 똑같다는 거죠. 이야, 이거 진짜 가상현실…… 와……."
[나 방금 체험하고 옴. 나는 서울역 근처로 갔는데 벌써 줄 서있드라. 40개 좌석 1시간 제한이니까 하고 싶은 사람 ㄱㄱㄱㄱ]
ㄴ 어떰?
ㄴ 개쩜. 나오면서 바로 기기 주문함.
ㄴ 그정도임?
ㄴ 해봐. 해봐야 알걸?
발렌 사가가 한국을 뒤흔들기까진 몇시간이면 충분했다.
***
[경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케이시 마이즈 선수의 공이 예사롭지 않아요. 거기다가 오랜 기간 디트로이트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자료들이 있을 거거든요? 디트로이트 타자들,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좌절하고, 후회하고 있을거다.
[김사범 선수가 어김없이 타선의 핵심입니다만, 앞타순인 김태연, 라테 헤미체,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얼마나 살아 나가는지가 이 경기를 좌우할 겁니다.]
어쩌면 평생을 매달린 일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씁쓸하게 돌아서는 사람도 있을거고.
[역대 최고라고 평가받는 스플리터와 공격적인 투구로 9이닝당 탈삼진이 10개 가까이 되는 케이시 마이즈 선수이기 때문에 차라리 빠른 템포에서…….]
때로는 행운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 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좌절만 하지 않았고, 후회만 하지도 않았다.
내게 행운, 또는 기적이 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발전했다.
'상태창'
[▒◐ : ▥◁☞¶
: ‡▣ ‡↙↙↙
:
♡
힘 : 999+(현재 적용 : 999)
Ф :
: ℥℆
%⎀: ⍔⍔
⍌⍍
Δ⍁(⍐⍯⍡)
↭↭↭↭↭↭↭⍨^ ⍥⍤(⍐⍯⍡)
× ⍣⍩⍨(⍐⍯⍡)
◎℥ ℥℆(⍐⍯⍡)]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기적'이 바로 그 증명이다.
[힘 : 999+]
[……4번타자인 김사범 선수가…….]
"플레이 볼!"
[김사범 선수의 11번째 챔피언십 시리즈, 바로 지금 시작합니다.]
- 힘 스탯 999 4번타자.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