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매화검투(梅花劍鬪)(1)
“날이 좋군.”
하늘이 파랗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
오늘도 화산의 봄은 따뜻했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천마 위광은 화산의 이대제자 남량(藍凉)의 몸으로 환생했다.
단언컨대 이건 염라 놈의 커다란 실수가 분명했다.
마교를 막아 달라며?
그럼 최소한 내가 힘을 기를 최적의 조건을 갖춰 줘야지!
이건 최악, 최하의 조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마교를 막기 위해서는 전성기의 힘을 갖춘 상태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마황신공(魔皇神功)이나 수라검결(修羅劍訣) 같은 마공이 필요했다.
그런데!
“안 된다.”
“뭐라고?”
환생 후, 첫날 밤 남량의 꿈에 나온 염라는 말했다.
“안 된다고. 마공은.”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운명을 보는 힘이 있다.”
“운명을 보는 힘?”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적어도 네가 마공을 익혀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미래는 없다.”
“뭐라고?”
“오직 한 가지. 불완전하지만 가능한 미래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걸 택했다.”
“그게 화산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내가 너에게 해 줄 말은 여기까지다.”
남량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기다려! 헛소리하지 마라! 화산의 무공보다 내 마공이 훨씬 더 강한데 왜 굳이 먼 길을 돌아가겠느냐!”
“싫어도 너는 결국 마공을 익히지 못할 것이다. 만약 마공을 익힌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네 혼을 가지고 돌아갈 테니까.”
남량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라고? 이런 더러운……!”
“알아들었으면 열심히 하거라.”
염라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미친 영감탱이…….”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강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귀찮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량아. 왔느냐?”
낡은 암자의 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반기는 백발의 사내.
한때 화산파의 ‘정점’이라 불린 유우화(劉祐和)였다.
허나 지금은 몸의 혈맥이 망가져 일선에서 물러난 퇴물 취급을 받는 도사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십 년 전, 동정호(洞庭湖)에서 벌어진 유우화와의 결투에서 놈의 혈맥을 끊었던 자가 바로 나였다.
놈의 검, 연화(煙花)를 부러뜨리고 무인의 생을 끊어 버린 내가, 지금은 놈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유우화, 저 사내는 알까?
자신의 일생을 망가뜨린 자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구나.’
참으로 잔인한 운명이었다.
“량아.”
유우화가 나긋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 네. 도장님. 점심 진지를 가져왔습니다.”
“네가 항상 고생이 많구나.”
유우화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먹자.”
“네.”
우린 낡은 방에 앉아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유우화에게 남은 제자란, 남량 한 명뿐이었다.
동정호 결투 이후 일선에서 물러난 유우화는 후학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매화천수검이라는 화산 제일의 검술을 얻고 남북 십성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기회에 처음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유우화의 검술은 그 묘리가 복잡하고 심오해 알아듣는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재라 불리며 화산에서 촉망받던 제자들도 모두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가르침을 포기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제자들이 유우화를 떠났다.
유우화 또한 자신의 명맥을 이어 갈 제자가 사라졌다는 것에 상심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은 생을 조용히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량 또한 무공을 전수받을 목적으로 그의 밑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저 화산에서 유우화를 보살필 사람으로 보잘것없는 남량을 지목한 것이다.
화산파의 이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남량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유우화의 밥을 준비하고 암자 주변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 식모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이것 또한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무공을 익히고 강해진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남량은 고개를 들어 유우화를 응시했다.
그래. 마공을 익힐 수 없다면, 그에 근접한 상승 무공이라도 익히는 수밖에 없다.
“도장님.”
“말하거라.”
“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움찔.
국을 뜨는 유우화의 손이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냐.”
“강해지고 싶습니다.”
직접 검을 섞어 봐서 누구보다 잘 안다.
유우화의 무공과 검술은 당대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고강했다.
그의 옛 별호는 매화검선(梅花劍仙).
과거에는 정파 무림의 최강자로 일컬어지는 남북 십성(十聖)의 일원 중 하나였다.
그의 무공을 전수받고 더욱 다듬는다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내려놓은 유우화가 말했다.
“네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
“그건 불가능하다. 너도 알지 않으냐. 내 검술은 화산의 삼백 제자가 모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검술이다.”
“가능합니다.”
“뭐라?”
짧고 빠른, 망설임 없는 대답에 유우화가 흠칫했다.
남량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말했다.
“가능합니다.”
“량아.”
“무조건 가능합니다.”
무조건 가능하다.
천마 위광.
천재가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마교의 강자존(强者存)에서 살아남아 지존의 자리에 앉은 사나이.
비록 마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지만 그의 경험과 지식은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익히기 어려워? 묘리가 복잡하고 심오해?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무조건 가능하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남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우화를 향해 절을 올렸다.
남량을 바라보는 유우화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열흘 전만 해도 평범한 아이에 불과한 남량이었다.
갑자기 변한 제자의 모습을, 스승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
“마교의 멸문(滅門).”
고개를 든 남량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뿐입니다.”
남량의 대답에 유우화가 눈을 부릅떴다.
‘이 아이가 내 비원을 말하고 있어?’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
뭐든 상관없다.
재능이 없다는 걸 시험해 보면 끝날 일.
유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을 치우고 마당으로 나오너라.”
***
“오늘은 달이 밝군.”
목검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자 유우화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매화천수검(梅花天授劍)은 9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작에 막힘이 없고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매화천수검의 핵심이다.”
“말만 들어서는 쉬워 보인다는 제자들도 여럿 있다. 허나 초식의 연계는 엄청난 집중력과 통찰력을 요구한다. 또한 자세가 조금이라도 부정확하면 초식은 연달아 무너진다. 말 그대로 검신일체(劍身一體)의 마음으로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매화천수검은 초식 하나하나가 매우 복잡하고 자세가 어렵다. 근육의 수축과 비틀림, 호흡, 검을 휘두르는 각도까지 찰나의 시간에 계산하고 실행해야 하지.”
“심지어 초식 하나가 화산의 검술 전체를 담고 있으니 그 말인즉, 초식 하나를 익힐 때마다 화산의 검술 하나를 통째로 익히는 것과 같다. 알겠느냐? 내 검술을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호에서 유우화와 검을 섞을 때에도 분명 대단한 검술이라 생각은 했지만…….
‘화산의 모든 오의(奧義)를 담고 있는 검술이라. 이러니 아무도 익히지 못했겠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통찰력과 재능이 없다면 절대 익히지 못할 검술이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검으로 명망 높은 화산의 모든 오의를 품은 검이라!
이 정도는 되어야 천마의 격(格)에 어울리지.
“일단 기본자세와 9초식을 가르쳐 주마.”
매화천수검의 9초식은 각각 이러했다.
낙영용섬(落英龍閃).
옥녀유영(玉女遊泳).
매농낙화(賣弄落花).
뇌전포화(雷電砲火).
상청도월(上淸渡月).
화운용무(火雲龍舞).
유성추월(流星追月).
단천열화(斷天熱火).
천류신화(天流神火).
모든 자세를 설명해 준 유우화는 두말없이 바로 시험에 들어갔다.
“어디 한번 재량껏 펼쳐 보거라.”
매화천수검을 익히는 첫 단계는 바로 ‘이해.’
천재와 범재를 나누는 기준이자 가능성의 유무였다.
수련하기도 전에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면 천 년을 수련해 봤자 말짱 헛수고에 불과했다.
‘남량. 네 손과 몸은 절대 불가능하다 말해 주고 있다.’
노련한 검객의 눈은 이미 결과를 확신했다.
남량은 절대 매화천수검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한편, 남량은 조용히 자세를 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낙화유수(落花流水).
꽃잎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듯.
형(形)이 있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검술.
이론은 이해했다. 남은 건 동작뿐이다.
남량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떨어지는 매화가 검길을 타고 흩날렸다.
“……!”
유우화는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검술을 펼치는 남량의 모습이 저와 똑 닮았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동경에 비춰 보는 것마냥.
동작 하나하나가, 미세한 호흡 소리가 같았다.
전신에 전율이 흐르고 손에 땀이 흥건했다.
유우화는 어느새 남량과 동화되어 마음속으로 함께 검을 휘둘렀다.
그건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운 기분이었다…….
“……님.”
“도장님.”
남량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우화.
그는 멍하니 남량을 응시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눈물을 흘렸는지 양 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남량은 이미 모든 초식을 끝마친 뒤였다.
‘왜 저러지? 분명 제대로 한 것 같은데.’
설마 뭔가 잘못 이해한 건가? 이 천마가?
남량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유우화가 남량에게 말했다.
“절을 해라.”
“네?”
“진정한 사제의 연(聯)을 맺고자 하니 절을 하거라.”
“도장님…….”
“네가 내게 길을 보여 주었다. 나 또한 지금부터 너의 길에 함께할 것이니…….”
유우화는 격동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실전되어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기 전, 운명처럼 명맥을 이어 갈 제자가 나타났다.
또 제자의 목표는 자신의 비원과 같았다.
이 순간, 유우화는 자신의 남은 생을 오로지 이 청년에게 바치기로 작정했다.
“알겠습니다.”
남량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밝은 보름달이 두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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