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매화검투(梅花劍鬪)(4)
다음 날, 또다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의 안건은 이대제자 남량의 처벌 문제였다.
구양중은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하군.”
남량은 비무 도중 상대방의 신체에 영구적 손상을 입혔다.
문제는 남량의 행동이 고의적이었는가.
비무 도중 불상사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다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분히 고의성이 드러난 일격이기도 했다.
회의에 참석한 도사들도 한 명씩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고의가 아닙니다.”
유우화는 당연히 제자의 편을 들고 나섰다.
“사형제들도 전부 똑똑히 보셨을 겁니다. 청서의 검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도사들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은 무림인에게 생명과 같은 위치였다.
남량에 앞서 청서의 행동은 고의가 확실한 상황.
그에 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고 나서지 않았다.
“남량이 대응하지 못했다면 그 아이는 평생 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었을 겁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허나 문제는 그 대응이 지나치게 과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건이 반발하고 나섰다.
“남량의 실력을 다들 보셨을 겁니다. 그 정도 실력이었다면 고환……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청서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유 도장!”
“남량이 과잉대응을 했다, 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유우화는 대수롭지 않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유 도장!”
“단전을 노린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살초(殺初)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목숨을 노린 자인데 어찌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그 아이는 아직 이대제자에 불과합니다. 제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만도 하지요.”
“그래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청서 그 아이는 평생…….”
이건은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해했다.
유우화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평생 후사(後嗣)를 볼 일은 없겠지요.”
“…….”
“그놈 업보입니다. 어딜 감히 내 제자에게…….”
유우화가 차갑게 내뱉자 이건이 움찔했다.
싸늘해진 분위기 속 구양중이 입을 열었다.
“……일단 사태가 더 커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장문인, 어찌하시겠습니까?”
온화한 얼굴의 일 장로, 평성군(評性君) 노백(盧栢)이 물었다.
결국 죄의 처벌을 결정하는 건 일파(一派)의 수장인 그였다.
유우화와 이건의 시선이 동시에 구양중을 향했다.
“일단.”
엄숙한 분위기 속, 그가 말했다.
“두 도장의 말은 전부 옳다.”
“…….”
“유 도장의 말대로 청서의 행동에 고의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허나 이에 대응한 남량의 행동에도 과한 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허면?”
노백의 물음에 구양중이 대답했다.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
“남량에게 보름 동안 낙안궁(落雁宮)의 청소를 명한다.”
“그, 그게 무슨……!”
이건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그게 벌은 아니겠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 도장?”
오히려 구양중이 되묻자 이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처벌이 조금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하여…….”
“죄의 경중(輕重)을 판단하는 건 장문인일세.”
노백이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수염을 쓸었다.
“지금 장문인의 결정에 토를 다는 겐가?”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이건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삼켰다.
“또한.”
구양중은 계속해서 말했다.
“남량의 배분을 일대제자로 올리도록 하겠다.”
이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장문인!”
“남량은 비록 이대제자이나 매화검선의 검을 유일하게 전승(傳承)했으며 매화검투 참가자 선발전에도 이대제자 중 유일하게 통과했다. 남량을 일대제자로 올리는 것에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 않은가.”
몇몇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장문인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하긴, 매화검선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배분이 이대제자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저 역시 찬성합니다.”
장로들이 나서자 아무도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이건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구양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유 도장은 잠깐 남도록.”
***
회의장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건 유우화와 구양중, 단둘뿐이었다.
구양중도 유우화도, 한결 편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날아갈 듯합니다.”
“다행이군.”
구양중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이 왜 저러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제자 때문 아닙니까.”
“그래. 제자 때문이야.”
이건이 제자 위지혁을 장문인 자리에 앉히려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양중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여전히 능글맞으시군요.”
“너만 할까? 언제 저런 제자를 키워 내서는…….”
“천운이었지요. 하하.”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구양중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이건은 당분간 그대로 놔둘 생각이다. 선을 넘는다 싶으면 정리하겠지만…….”
“그러시지요. 저 역시 이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평생 네 그늘에 가려 살아온 자야. 제자마저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는 없겠다 싶었겠지.”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자신의 명예에 가려진 이건의 열등감은 수십 년을 넘어 이제는 풀 수 없는 마음의 실타래가 되어 버렸다.
“그렇겠지요…….”
유우화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구양중은 차를 꼴깍 넘기며 말했다.
“그 아이, 남량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우화야.”
“역시. 남량의 진면목을 알아보셨군요.”
유우화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가르칠 건 전부 가르쳤습니다. 이제 녀석에게 남은 건 경험뿐이겠지요. 이번 강호행이 녀석에게는 큰 경험이 될 겁니다.”
“그래. 남량의 실력이면 현 일대제자들과도 비등하거나 더 뛰어날 테니 매화검투의 우승도 어렵지 않겠지…….”
구양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창밖에 핀 매화나무 가지를 만지며 말했다.
“넌 앞으로도 그 아이를 바른길로 이끄는 데 최선을 다해라.”
“서두르시는 것 같군요.”
유우화의 물음에 구양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내 반란이 일어난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지.”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유우화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붙잡았다.
천마 위광.
동정호 결투로부터 십수 년이 더 지났건만, 아직도 그 이름만 들으면 손이 떨린다.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그의 죽음은 유우화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온 강호인들이 그랬지만…….
“슬슬 놈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군.”
“무림맹의 정보인가요?”
“반년이면 반란의 소요를 잠재우기 충분한 시간이야.”
창밖을 바라보는 구양중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마교는 온 강호의 대적(大敵)이었다.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말은 즉, 이 강호에 다시 피바람이 불어온다는 뜻.
천마 위광의 죽음으로 잠시 사그라들었던 전란의 소용돌이가 다시 중원을 향하고 있었다.
“우린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그 전까지 놈들과 맞서 싸울 만한 젊은 검사들을 키워 내는 데 집중해야 해.”
“…….”
“나는 남량이 화산의 새 시대를 책임질 그릇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너처럼 화산제일검의 명예를 지고 이끌어 줄 새로운 영웅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국에 남량이라는 인재가 나타난 것은 하늘의 운명이라고, 유우화는 확신했다.
“비록 저는 마교와 맞서 쓰러졌지만…….”
유우화는 자신의 손목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아이라면 가능할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
산산한 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구양중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꽃잎을 날려 보내며 말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새로운 꽃이 피어나듯, 화산의 뜻은 계속해서 이어지겠지.”
***
쨍그랑!
자신의 도관(道觀)으로 돌아온 이건이 찻잔을 벽에 내던지며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망할 영감탱이…….”
낙안궁 청소. 이건 단순한 벌이 아니라 그가 남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건에게 알리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 아이는 자신이 관심을 가졌으니 더는 해를 가하지 말라는 경고.
그 한마디로 이제 남량은 비공식적으로 차기 장문인 자리에 근접한 제자가 되어 버렸다.
“스승님.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불안한 눈으로 이건을 지켜보던 위지혁이 말했다.
“청서를 일 합으로 이겼다지만 그 정도는 저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네놈의 눈은 옹이구멍이냐?”
“네?”
이건은 똑똑히 보았다.
남량이 펼친 낙영용섬. 그 속도와 움직임에 놀랐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정확성. 일전에 유우화가 펼치던 검초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아.’
처음에는 어중간하게 따라 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확인해 보니, 겨우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젊은 유우화, 그 자체를 보는 듯했다.
‘그 미친놈의 괴물 같은 재능이, 제자한테 유전이라도 된 것인가?’
뭐가 되었든, 용납할 수 없다.
평생을 놈의 그늘에 가려져 살았다.
죽을 각오로 싸우고 올라서도, 세상은 놈을 칭송했다.
누구도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았다.
이건은 정상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일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유우화! 적어도 내 제자만큼은 그 꼴을 보지 않게 하겠다.’
똑똑.
그때, 누군가 도관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흰 바탕에 매화 세 송이가 그려진 도포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장포에 그려진 삼매화(三梅花) 문양은 화산의 기둥인 매화검수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위지혁은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혁련 사숙!”
적파검(赤波劍) 혁련위.
가장 최근에 매화검수의 자리에 오른 검사이자, 이건의 사제였다.
혁련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사형께서 갑자기 저를 찾으시고…….”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부탁할 일?”
“너, 이번 매화검투에 대련 상대로 참가한다며?”
혁련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말단이라 도저히 뺄 수가 없더군요. 하하.”
“잘됐다.”
이건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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