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매화검투(梅花劍鬪)(7)
보름 후, 매화검투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참가를 희망하는 일대제자들은 낙안궁에 가서 신청을 해야 했다.
남량과 운휘가 낙안궁에 도착하자 일대제자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한쪽은 매화검선의 명맥을 이은 제자.
그리고 한쪽은 사파 출신이라 화산 내에서도 불만이 많았던 문제아.
여러모로 두 사람의 참가는 주변인들의 흥미와 불만, 또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주목을 받는 또 한 명의 제자가 있었다.
“찬야(贊夜)?”
“네, 형님.”
운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 장로 노백의 외손자인데, 문무에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여색을 너무 밝혀서 일 장로가 삼 년 전에 폐관(閉關) 수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도 이번 매화검투에 참가한다고 하더군요.”
“별로 관심 없는데…….”
“어? 저놈인 것 같은데요?”
남량은 운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운휘가 가리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눈에 띄었다.
폐관에서 금방 나온 듯 더러운 몰골에도 7척 반(185cm)은 될 듯한 훤칠한 키와 검붉은 머리카락. 남자다운 잘생긴 외모가 시선을 끌었다.
거기다…….
‘기량이 상당하군. 지금까지 만난 일대제자 중에서는 제일이야.’
유우화가 말하길, 현 일대제자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제자는 단연 위지혁일 것이라 했다.
그가 틀렸다. 아니, 삼 년 전이라면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저 사내가 정점이다.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찬야가 남량의 곁을 지나쳤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남량의 앞에 섰다.
남량은 솔직히 감탄했다.
‘대단하군. 내 기를 감지하고 주시한 것인가.’
절정의 기를 들키지 않으려 평소에는 갈무리하고 다녔는데.
기량에 못지않게 감각도 뛰어난 자다.
……분명 그런 줄 알았다. 그때까진.
덥석.
찬야는 갑자기 남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 화산에 이런 아리따운 여제자가 있었을 줄이야. 사매, 이름이 뭔가? 괜찮으면 오늘 밤에 나랑 술 한잔하면서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겠는가?”
“…….”
“어이구. 수련을 열심히도 했나 보군. 무슨 굳은살이 이렇게…….”
쩌억-!
찬야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남량의 주먹에 맞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꾸르륵…… 꽥.”
찬야는 바닥에 얼굴이 반쯤 들어간 채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대경실색하여 달려왔다.
“저저저…… 저 미친 새끼!”
“차, 찬야! 찬야를 꺼내!”
“찬야가 숨을 안 쉬어!”
그러거나 말거나, 남량은 걸음을 돌려 유유히 낙안궁을 벗어났다.
남량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운휘가 찬야를 응시하며 불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불쌍한 새끼……. 꼭 나를 보는 것 같네.”
한편, 산손정 정자에서 구양중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노백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식을 전달한 도사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처벌할까요?”
“처벌이랄 것까지야……. 성적 희롱은 찬야 쪽에서 먼저 했으니…….”
구양중은 말을 꺼내며 슬며시 노백의 눈치를 살폈다.
노백은 여전히 온화한 얼굴이었으나, 주변에 서늘한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찬야 녀석은 지금 어디 있느냐?”
“네? 아마 지금쯤 매월관에 있을 겁니다.”
“그래. 일어나는 즉시 내게 오라고 전하거라.”
“네…….”
도사는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재빠르게 정자를 내려갔다.
구양중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것 같은데. 예전 같았으면 혼인해 달라며 안겼거나 엉덩이라도 만졌을 텐…….”
콰득!
노백의 손에 든 바둑알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본 구양중이 입을 다물었다.
***
노을이 지는 시각, 남량은 빨래한 도복을 접고 운휘는 낮에 잡은 닭으로 탕을 끓이고 있었다.
“형님, 그런데 유 도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잠깐 하산하셨다. 어디 가신다고는 말 안 하고.”
정말 어디를 간 것일까? 몸도 불편한 놈이.
‘그냥 가다가 콱 돌에 걸려 넘어져 뒤졌으면.’
아니면 왈패들한테 걸려서 몹쓸 짓을 당하든지, 악덕 상인에게 걸려서 대차게 뜯기든지.
제발 좀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뽑아 먹을 건 대충 다 뽑아 먹었는데 언제까지 그놈 수발을 들어야겠는가? 이 천마가!
‘죽어라. 제발 좀 사라져!’
남량은 속으로 놈에게 저주(?)를 걸며 낄낄 웃었다.
운휘는 그릇에 탕을 떠서 남량에게 건네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왜 허공에 대고 미친놈처럼 웃으시는지…….”
미친놈…….
“아니다. 밥 먹자.”
“네.”
운휘는 제 그릇에도 탕을 가득 푼 다음 자리에 앉았다.
수저를 들고 맛있게 흡입을 하려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그릇이 사라져 있었다.
당황한 운휘가 말을 더듬거렸다.
“어? 이게 어디 갔…….”
“으음. 이거 맛있네.”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운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언제 왔는지 기척도 없이 옆에 앉은 찬야가 운휘의 탕에 든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찬야의 기척을 미리 알고 있던 남량은 말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이야, 죽인다! 너 요리 잘하는구나?”
“……미안한데 그거 내 거다.”
“내가 먹었으니까 넌 새로 떠다 먹어.”
운휘는 똥 씹은 표정으로 찬야를 노려보았다.
“뭐 이런 뻔뻔한 새끼가 다 있어?”
“응. 그런 말 평소에 많이 들어. 특히 여인들한테.”
“칭찬 아니야. 그 여자들이 뺨은 안 때리디?”
“안 때리던데? 내가 워낙 잘생겨서. 흐흐.”
운휘는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그게 자랑이냐? 명색이 도사라는 새끼가 여색에 미쳐서는…….”
“부러워서 그러지? 하긴, 너는 딱 보니까 평생 여자 손도 제대로 못 잡아 보고 죽겠네. 아이구, 불쌍해라.”
찬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운휘는 멍하니 찬야를 응시하다 검을 집어 들었다.
“이런 쳐 죽일 새끼. 이리 와, 입을 찢어 줄 테니까.”
“미안하지만 오늘은 너랑 대련하러 온 거 아니야.”
새침하게 대답한 찬야의 시선이 남량을 향했다.
“난 이쪽에 관심이 있거든.”
쨍그랑!
남량의 손에 들린 그릇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남량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찬야를 응시하며 말했다.
“매월관에서 내 소문 못 들었냐?”
“아, 고환분쇄기(睾丸粉碎機)? 많이 들었어.”
찬야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한 별명이 다 붙었네.
“청서랑 청강이었나? 매월관에서 인사도 했어. 어떻게 일대제자 두 명의 고환을 날려 버리냐? 잔인한 새끼…….”
“한 명은 저기 운휘가 했다.”
“아, 그래?”
찬야가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자 탕을 그릇째 흡입하던 운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량은 살벌한 어조로 경고했다.
“또 나를 희롱하러 온 거면 이번에는 왼쪽 뺨을 날려 주지.”
“걱정하지 마. 나 남색 안 해. 난 그저 네 무공에 관심이 있을 뿐이야.”
찬야가 멍이 든 뺨을 보여 주며 웃었다.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와서 나름대로 내 경지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장난이라고는 해도 주먹 한 방에 기절했어.”
“…….”
“내가 평소에는 가벼워 보인다는 얘기 많이 듣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좀 세거든? 물론 네가 매화천수검의 전승자라는 말은 들었는데, 그래도 한 방 맞고 뻗은 건 내 자존심이 견딜 수 없네.”
찬야의 자신감은 충분히 마땅한 것이었다.
남량을 제외한다면 찬야를 대적할 제자는 없을 것이다.
폐관 수련이 끝나자마자 하필 남량을 건드린 건 운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량의 물음에, 찬야가 씩 웃어 보였다.
“나랑 제대로 한판 붙어. 진지하게. 그럼 귀찮게 안 할게.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내가 왜 너랑 귀찮게 드잡이질을 해야 하는데?”
“제발. 그냥 한 번 해 주라. 나 매월관에서 낫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어. 할아버지가 당장 달려오라고 엄명을 내리셨는데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남량은 골치가 아팠다.
아니 운휘도 그렇고 이 미친놈도 그렇고 왜 나랑 싸우지 못해서 안달인지.
그나마 운휘는 말 잘 듣고 요리라도 잘해서 상관없다지만…….
불만을 투덜거리던 남량이 문득 눈을 깜빡였다.
‘아니, 잠깐만…….’
뭔가를 고민하던 남량이 천야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어이, 변태.”
“응.”
“너 혹시 집에 돈 많아?”
“응. 우리 친가 쪽이 강북에서 크게 상업을 하거든. 돈 많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량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너와 대련을 해 주지.”
“정말? 고마워 남 사제.”
찬야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러나 남량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너랑 대련해 주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지.”
“조건? 무슨 조건?”
“대련에서 진 쪽이 이기는 쪽의 노예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진 쪽이 가진 모든 재물과 재물, 재물이 이긴 쪽의 것이 되는 거지. 알아듣겠어?”
‘방금 재물만 세 번 들어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운휘는 남량의 눈빛을 보고 처음으로 기겁했다.
저게 정녕 사람의 눈인가. 운휘의 눈에 보이는 남량의 눈은 마치 엽전처럼 바뀌어 있었다.
“어때? 할 거야, 말 거야?”
“알았어! 이기면 되니까.”
찬야는 자신만만하게 수락했다.
“아까는 내가 방심해서 그렇지, 제대로 하면 달라. 너 후회할걸?”
“그래그래. 어디서 대련할까? 바로 시작하지.”
남량은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영약의 도움이 절실했다. 또 강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병(神兵)들도.
그걸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돈. 돈이다.
재력을 이용해 영약과 신병이기들을 흡수한다면, 성장의 시간을 몇 배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후후후…….”
남량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남량의 눈에 찬야는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돈다발로 비치고 있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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