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매화검투(梅花劍鬪)(8)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남량과 찬야는 목검을 쥐고 암자 앞마당으로 나왔다.
“덤벼.”
“남 사제의 매화천수검. 기대할게.”
찬야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산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매화천수검에 내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얼마나 통할지 볼까?”
“그게 네 검공(劍功)이었나?”
이십사수매화검법.
수많은 화산의 검초(劍招) 중 가장 효율적인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술.
기본 바탕을 쾌(快)에 두고 있어 검속이 빠르고 움직임이 유연한 것이 특징인 검술이었다.
찬야는 기본 바탕을 중(重)에 두고 있는 운휘의 칠절매화검과 정반대의 유형을 가진 검사였다.
“그럼.”
우우웅-.
찬야가 자세를 취하자 주변 공기가 미약하게 떨렸다.
곧 찬야의 검날에 붉은 아지랑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역시. 찬야도 절정의 벽을 뛰어넘은 검사였다.
비록 초입이지만 홍안(紅顔)의 나이에 절정이라니.
운휘가 무골을 타고난 천재라면, 찬야는 감각을 타고난 천재였다.
물론, 지금 남량의 눈에는 재능이고 뭐고 오로지 묵직한 돈주머니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찬야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간다. 남 사제.”
파파팟!
선공(先攻)은 찬야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쇄도하는 것과 동시에 검이 턱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후웅!
남량은 상체를 젖혀 검을 피해 냈다.
“움직임이 유연하군. 남 사제!”
찬야는 작게 감탄하며 검격을 이어 갔다.
물이 굽이치듯 검로(劍路)는 순식간에 왼쪽 허벅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찬야의 검이 허벅지에 닿기 직전, 남량은 바닥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너야말로 꽤나 빠른 검을 가지고 있군.”
“칭찬 고마워. 안 그래도 내 선공을 두 합이나 피해 낸 건 제자들 중 남 사제가 처음이야.”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게 해 주마. 돈다발.”
“돈다발?”
둘은 대화를 나누며 자세를 고쳐 잡고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캉캉캉캉캉캉!
목검이 서로 부딪치며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암자 근처 바위에 앉아 구경하던 운휘가 감탄했다.
‘공중에 뜬 상태로 열 합 하고도 다섯 합을 더 나누다니…….’
대체 얼마나 빠른 검속이란 말인가?
바닥에 착지한 남량이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후웅!
남량의 검날에서 피어오른 연분홍빛 검기가 아름다운 원형의 궤적을 그렸다.
찬야는 검을 세워 막아 냈지만 목검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갔다.
“이런…….”
찬야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따라오는 남량의 검격을 피해 거리를 벌렸다.
“숨을 쉴 틈도 없네!”
“앞으로도 안 줄 거야.”
동시에 남량이 바닥을 박차고 비호(飛虎)와도 같이 검을 휘둘렀다.
“이크!”
검을 휘두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린 찬야는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자세를 잡았다.
‘슬슬 흐름을 내 쪽으로 가져와야겠네. 남 사제.’
자세를 바꾼 찬야가 긴 숨을 내뱉으며 원을 그렸다.
그러자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상(殘像)이 마치 수십 자루의 검처럼 일렁거렸다.
‘큰 초식이 오는가.’
남량은 파고들기를 포기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찬야는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검기를 방출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21초. 화란춘성(花爛春盛)-!”
콰콰콰콱-!
허공에 일렁이던 수십 자루의 잔상이 날카로운 검격이 되어 남량을 덮쳐 왔다.
“오호…….”
남량은 나직이 감탄을 내뱉으며 재빨리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기가 꽃잎처럼 수천 조각으로 분해되어 흩날리며 남량의 주변을 에워쌌다.
『매화천수검의 3초식, 매농낙화(梅弄落花)는 검기의 장막. 수천 조각으로 나뉜 매화의 꽃잎이 기막(氣膜)을 이루어 몸을 보호한다.』
카카카카캉!
튕겨 나간 검기가 불꽃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그사이 흐름을 바꾼 찬야가 공격을 시도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쩡- 카카칵!
엄청난 속도로 쇄도한 찬야가 검을 휘두르자, 일순 돌풍이 일었다.
카각-! 검을 휘둘러 남량의 몸을 튕겨 낸 찬야가 그 기세를 몰아 연격을 가해 왔다.
캉! 카가가캉!
둘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파파팟!
몸을 한 바퀴 돌려 충격을 해소한 찬야가 들이치듯 매서운 검격을 쏟아 냈다.
콰과광!
검기가 적중한 자리에 흙먼지가 솟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량은 없었다.
‘어디에 있지?’
당황한 찬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찬야의 바로 위에서 남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에 집중하느라 가장 중요한 걸 잊었군.”
“……!”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찬야는 뒤늦게 검을 치켜올렸으나 한발 늦었다.
콰득!
검이 부딪치며 찬야의 목검이 그대로 반토막 났다.
남량은 훤히 드러난 찬야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크윽!”
찬야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남량의 검은 코앞까지 닥쳐 있었다.
‘빌어먹을.’
찬야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끝이다.”
퍼퍼퍼퍼퍼퍽!
한 합에 어깨, 가슴, 옆구리, 허벅지를 동시에 가격했다.
찬야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목검을 내리며 내력을 잠재운 남량이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나?”
찬야는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깨어나면 다시 찾아와라. 그때 우리 ‘내기’에 대해 아주 자세히 대화를 나눠 보자고.”
“…….”
“그 전까지는 좀 자라.”
퍼억-!
남량의 손에서 뻗어 나간 지풍(指風)이 그대로 찬야의 미간 사이에 적중했다.
풀썩.
찬야는 두 눈이 뒤집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남량은 목검을 내려놓으며 운휘에게 말했다.
“매월관에 데려다 놓고 와.”
***
타다닥-.
마당 앞에서 모닥불을 지피며 더운 술을 마시던 남량에게, 운휘가 물었다.
“그런데요 형님.”
“응?”
“조금 전의 비무 말입니다. 왜 빨리 끝낼 수 있으시면서 질질 끌었습니까?”
운휘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내지 않은 건, 남량의 의도였다.
돈주머니……. 아니, 찬야의 재력을 마음껏 이용하려면 운휘처럼 그를 곁에 들여야 한다.
내 곁에 들일 사람이라면 실력을 미리 파악해 놓는 것은 필수였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 닥치든 적소(適所)에 배치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찬야가 전력을 내도록 적당히 상대했다.
찬야 정도의 실력이면 매화검투의 통과는 어렵지 않게 해낼 것이다.
문제는 운휘였다.
남량의 가혹한 수련과 본인의 재능이 맞물려 미친 듯한 성장 속도를 내고 있지만.
아직 매화검투의 통과를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안한데…….
남량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이럴 시간 없다. 일어나.”
“네?”
“매화검투까지는 앞으로 보름. 그 전까지 지옥 특훈이다.”
“네, 형님!”
운휘는 의지로 눈빛을 불태우며 벌떡 일어났다.
***
눈을 뜬 찬야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매월관 천장도 이제는 익숙하네.’
그때,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좀 드느냐?”
“하, 할아버지?”
깜짝 놀란 찬야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일 장로 노백이 찬야의 가슴을 슬쩍 눌러서 다시 뉘였다.
“됐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누워 있거라.”
찬야는 노백의 눈치를 슬슬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무얼 잘못했는지는 알고?”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 안 찾아뵌 거……?”
“화산 내에서는 장로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노백이 찬야의 몸을 살폈다.
“폐관 수련이 네게 큰 도움이 된 것 같구나.”
“네. 드디어 경지가 절정에 들어섰습니다. 장로님.”
“네 욕정(欲情)도 깨달음과 함께 사라지기를 내 그리 바랐건만…….”
노백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걸 눈치챈 찬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야를 피했다.
“이놈이 나오자마자 사제에게, 그것도 남자 사제에게 희롱을 해? 네가 그러고도 제정신이라 할 수 있겠느냐!”
“자자, 잠깐만! 저 남색 안 해요! 남 사제의 미모(?)가 혼동을 준 거라고요! 오해하면 안 돼요!”
“내가 장문인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노백은 찬야를 째릿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또 어디 가서 그렇게 맞고 온 게야? 매화검수들에게 대련을 신청하기라도 했느냐?”
“사실, 남 사제에게 갔습니다.”
직후, 노백이 어디서 꺼낸 것인지 장검을 치켜들었다.
“이 새끼…….”
“아아아, 아뇨! 오해하지 마시고요! 그런 게 아니라! 대련을 신청하러 간 거라고요!”
“대련?”
노백이 깜짝 놀라며 검을 내려놓았다.
“그럼 네 몸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남량이란 말이더냐?”
“네.”
“허어……. 정말 남량의 기량이 그 정도란 말인가…….”
남량은 노백의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찬야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로님. 저 결심했습니다.”
“무엇을?”
“이번 매화검투에 통과해 남 사제를 따라가겠습니다.”
“그에게서 뭔가를 본 것이냐?”
“네.”
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남 사제가 아둔한 사형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장난은 아닌 것 같고……. 올바른 뜻이 생겼다면 나로서도 기쁜 일이다.”
노백은 표정을 풀며 찬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거라. 남량의 옆에서 강호를 경험하며 진정한 네 도(道)를 찾기를 바라마.”
“네, 장로님.”
“그리고 가서 또 여색을 범하면 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것이니 참고하고.”
“…….”
찬야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 할 거지?”
“네?”
“여색 말이다.”
“……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