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지하미궁(地下迷宮)(8)
남량은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은은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량은 눈을 가볍게 깜빡이며 손으로 햇살을 가렸다.
이불을 걷으며 상체를 일으킨 남량은 고개를 돌렸다.
작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머리맡에는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남량은 찻잔에 물을 따라 메마른 입가를 적셨다.
“……그래서 진짜 예쁘지 않냐? 제갈세가 소저들. 화산의 여제자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니까? 하나같이 단아하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것이…….”
“제발 그만 좀 해! 그 정도면 중증이다!”
그때,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운휘와 찬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깨어난 남량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남 사제! 정신이 들어?”
“형님!”
남량은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말했다.
“벌써 세 번째야. 기절했다가 일어나는 거.”
찬야가 남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웃었다.
“남 사제가 허약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뭐.”
운휘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요 형님.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위로해 줘서 고맙다. 아무튼…….”
남량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여긴 어디야?”
“복룡산 근처 객잔. 제갈세가가 전 층을 빌렸어.”
“내가 쓰러지고 난 후의 상황은 어떻게 됐지?”
찬야가 침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제갈경 소저가 나서서 정리했어.”
“제갈경이?”
“자세히 말해 줄게. 남 사제가 지하미궁을 뚫고 올라와서 기절했잖아? 그때 제갈세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어. 제갈랑 공자가 상황을 설명하라고 물었고. 그때 제갈경 소저가 나서서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어.”
“뭐라고 설명했는데?”
“실종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몰래 지하미궁 안으로 들어갔고, 우리 도움을 조금 빌렸다 정도? 그리고 시체를 찾아 돌아오는 도중에 함정을 잘못 건드려 지하미궁이 붕괴됐고, 남 사제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야. 여의주에 관한 이야기나 그 외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그녀가 약속을 지켜서 다행이네.”
“그렇지 뭐. 따로 이야기는 들었어. 남 사제가 여의주를 꿀꺽했다며?”
남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경은 어떻게 되었는데?”
“좋지 않아. 제갈랑 공자가 화가 끝까지 났거든. 제갈경 소저 때문에 지하미궁의 입구가 완전히 닫혀 버렸으니까. 당연히 조사는 중단되었고. 시체를 수습하면서 제갈랑 공자가 엄청 야단치는 걸 보긴 했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어.”
“너희한테도 뭐라고 했나?”
“아니. 그들은 제갈경 소저가 우릴 반쯤 협박하다시피 해서 억지로 끌고 간 줄로 알아. 조금 미안하지.”
“신세를 졌군.”
그때 운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는 형님이 황금빛에 휩싸인 채 하늘로 올라가시길래 용이 되어 승천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여의주의 힘을 얻으셨으니 얼마나 더 강해지셨을지! 이제 남북 십성보다 더 강해진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래?”
찬야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남량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천천히 운기조식을 했다.
남량의 단전에는 여의주가 자리 잡고 있었고, 내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의주의 신력을 끊임없이 발산하는 와중에 내력도 전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지만, 생각보다 돌아오는 속도가 느렸다.
당분간은 요양하면서 지켜봐야 할 듯했다.
‘이전과 같은 신력을 무한대로 뿜어내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군……. 여의주의 힘을 다시 끌어낼 방법을 찾아내야 해. 또 각운 선사의 천양신경을 수련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남량은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제갈경이 들어왔다.
“남 소협이 정신을 차렸다고 연락을…… 꺄악!”
그녀는 남량이 침의만 걸친 것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질렀다.
“뭘 그렇게 놀라? 다 벗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들어와.”
“이불이라도 덮어요! 으으…….”
제갈경이 들어오자 찬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켜 드릴까요, 제갈 소저?”
“괜찮아요. 소협.”
제갈경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왔어? 벌이라도 받는 줄 알았는데.”
남량의 물음에, 제갈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은 이미 받았어요. 저는 당분간 세가의 일에서 손을 떼고 어머니를 따라 사교 모임에나 따라가래요.”
제갈경이 자리에 앉자, 남량이 물었다.
“그게 벌이야?”
“당연히 벌이죠! 제가 연구하고 있는 기관들이 얼마나 많은데! 할 짓 없이 모여서 하하 호호 바보 같은 웃음이나 내고 차나 마시는 자리를 수십 번이나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치가 떨려요. 지루한 가구, 장식품, 보석 이야기로도 모자라 명문가 부인들은 혼기가 찼으니 시집을 가야 한다는 둥 원한다면 혼처를 알아봐 주겠다는 둥 쓸데없는 걱정이나 할 테고…….”
주절주절 푸념을 늘어놓던 제갈경이 남량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소협은 여전하네요.”
“무슨 소리야?”
“여의주를 삼켰으니 용처럼 꼬리나 날개가 달리거나 비늘이라도 돋아났나 싶었거든요.”
제갈경이 손으로 날갯짓을 하며 웃었다.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다 뜯어 버렸겠지. 그러는 너야말로…… 달라진 것 같은데?”
남량은 달라진 제갈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모가 수려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워낙 꾸미지도 않고 털털한 모습이라 빛이 바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작정하고 꾸민 듯, 하늘하늘한 하얀색 경의(輕衣)에 옥색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단정히 묶어 올리고 분을 바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제갈세가 핏줄은 어디 안 가는군.’
제갈경은 부끄러운 듯 남량의 시선을 피하며 귀걸이를 어루만졌다.
“괜찮나요? 오랜만에 꾸미는 건데…….”
“괜찮아. 예뻐.”
“저, 정말요?”
제갈경이 놀라서 묻자, 남량이 대답했다.
“그래.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냐. 못생겼으면 못생겼다고 말하지.”
제갈경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이 분위기 뭐야? 설마?’
지켜보던 찬야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쿡쿡 웃음을 흘렸다.
남량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꾸민 이유가 뭐야?”
“아, 지하미궁 일 때문에 아버지가 오셨거든요.”
“제갈 가주님이요?”
찬야가 깜짝 놀라서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제갈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 소협. 제갈랑입니다. 깨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제갈랑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품위가 단정했다.
제갈랑은 제갈경이 방 안에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남 소협.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남량의 말에 제갈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우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늦게나마 세 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동생을 구해 주시고 가문 사람들의 시신을 찾아 주셔서요.”
“천만에요.”
남량은 오히려 제갈랑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지하미궁에 대해 알려 준 덕분에 천양신경과 여의주라는 보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정말 지하미궁의 조사는 끝난 겁니까?”
제갈랑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없는 동생 덕분이지요.”
“오라버니, 아버지께 많이 혼나셨나요?”
제갈경이 걱정스레 물었다.
“밖에서는 가주님이라 불러야지! 아무튼 너 때문에 정말 못 살겠구나. 내 분명 조사대를 보내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몰래 들어가! 심지어 내가 초대한 도사님들을 협박해서 말이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누구 하나 목숨이라도 잃었다가는……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갈랑이 굳은 표정으로 제갈경을 질책했다.
“제갈 공자. 협박이 아닙니다. 저희도 지하미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나선 것이니 제갈 소저를 너무 탓하지 마시지요.”
양심에 찔린 남량이 일어나 말했다.
제갈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갈경이 제갈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니, 가주님께는 제가 잘 설명드릴게요.”
“안 그래도 곧 너를 부르실 것이다. 이만 가주님을 뵈러…….”
제갈랑이 입을 여는 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또 방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 찾아올 손님이 없는데, 누구지?’
고개를 돌린 남량은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저, 저자는!’
손님은 키가 매우 커 8척(196cm)을 가뿐히 넘을 듯했다.
그는 관모를 반듯이 쓰고 제갈세가의 상징인 옥빛 장포를 흩날리고 있었다.
옥을 조각해 만든 듯 수려한 외모는 제갈랑과 비슷했지만, 훨씬 위엄이 흘렀다.
‘오랜만이구나. 제갈신(諸葛晨).’
청운추월(靑雲秋月) 제갈신.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부드럽고 온화하며 청렴한 성품으로 하남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무인이었다.
청운추월이라는 그의 별호(別號)도 평소 행실이 깨끗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제갈신의 손에 들린 옥빛 소선(素扇)이 그의 무기였다.
“아버지! 어찌 이곳에…….”
제갈랑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데 부를 수는 없지 않으냐.”
제갈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반갑네. 나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일세.”
찬야와 운휘가 다급히 예를 갖추었다.
“화산의 일대제자 찬야입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운휘입니다.”
남량도 따라서 예를 갖추었다. 제갈신은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경이를 구해 주어 고맙네. 보답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보답은 바라지 않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라……. 청렴한 화산의 도사들답군. 허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내 체면도 말이 아닐세. 이 사람을 봐서라도 보답을 하게 해 줄 수 없겠는가?”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남량이 대답했다.
돈이야 찬야가 있으니 필요 없지만, 제갈가의 보물이나 영약이라면 괜찮을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갈신이 웃으며 말했다.
“랑이에게 말을 들어 보니 남 소협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식견이 넓고 지혜가 총명하다고 하더군. 랑이에게 좋은 벗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경이의 모습을 보니 이것 또한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군.”
“네?”
“하하. 그렇게 뺄 것 없네. 이 사람도 눈치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평소 남들처럼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던 경이가 생전 안 하던 치장까지 하고 찾아올 정도라면 누구든지 알 것이야.”
“아니 그건 가주님께서 오셨다 해서…….”
제갈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량이 입을 벌렸다.
제갈경은 홍시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갈신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그동안 경이를 매우 아껴 들어오는 혼사도 전부 물렸으나, 상대가 남 소협이라면 괜찮네. 연애는 앞으로 얼마나 할 생각인가? 혼인 절차는 내가 주관해서 해도 괜찮겠나?”
“아니 지금 뭔 소리를…….”
“결정되면 말해 주게.”
보답이라는 게 이런 거였냐!
남량은 당장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제갈랑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 정말입니까? 우리 경이와 남 소협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요?”
‘아니야…… 아니야!’
제갈신이 대답했다.
“그래. 이 아비의 눈치가 너보다 낫구나. 하하.”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아니라고!’
남량은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죄송하지만 다들 착각을…….”
남량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갈랑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찬성입니다! 세상에 이런 경사가! 남 소협, 앞으로 제가 잘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이런 기쁜 소식이 다 있군요!”
‘닥쳐 이 새끼야! 내 의견은, 내 의견은?’
남량은 숨이 넘어갈 듯 정신이 없었다.
“경아. 너도 이 혼사, 괜찮겠느냐? 아비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이라면…….”
제갈신이 묻자, 남량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말해! 네가 나서서 이 모든 오해를 풀란 말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던 제갈경이 도망치듯 방을 나가 버렸다.
“어…… 어?”
남량은 순간 넋이 나가 버렸다.
야 인마……. 네가 도망가면 어떡해.
“하하! 녀석, 부끄러운 모양이군.”
제갈신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남 소협. 그렇게 좋은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경이를 구해 준 보답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
제갈신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남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방구석에서는 찬야와 운휘가 소리 없이 폭소를 터뜨리며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즐겁게 관람하고 있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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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