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천음선녀(天陰仙女)(3)
“으음…….”
남량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둡고 축축한 동굴의 천장이었다.
뚝뚝.
천장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볼을 간지럽혔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남량은 가볍게 운기를 해 보았다.
산공독의 효력이 아직까지 작용하고 있는지 내력이 모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남량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널찍한 공간에는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끌려온 지 며칠이나 된 이들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종된 여인들의 숫자는 삼백 명 정도……. 나머지는 다른 곳에 갇혀 있다고 봐야겠군. 아니면 이미 죽었을 수도.’
다행히도 찬야와 유라는 멀쩡하게(?) 기절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을 데려와 나란히 눕힌 남량이 근처의 여인에게 물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모르겠어요. 시간을 알 수 없어서…….”
“납치범들은?”
“밥을 한 번 줄 때마다 사람을 한 명 끌고 나갔어요.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는 몰라요.”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무림맹에서 파견된 화산파의 도사 남량이다. 이건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고 이곳을 수색하기 위해 일부러 잡혀 온 것이다. 너희들도 무사히 구출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남량의 말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정말입니까? 저희를 구하러 오셨다고요?”
“그래.”
“살았네, 살았어! 하늘이 우릴 도운 거야!”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끌어안고 기뻐했다.
한 여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는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요?”
남량이 벽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적어도 산공독의 효과가 사라져 내력이 돌아올 때까지만…….”
바로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량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들을 본 여인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워 이것들아! 닥치지 않으면 입을 찢어 버릴 테다!”
여인들이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혀를 차며 여인들을 둘러보다 한 명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남량과 대화를 나눈 여인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직감하고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내가 짜증 섞인 어투로 소리쳤다.
“이년이! 이곳에 네년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얌전히 따라올 것이지 쓸데없이 힘을 빼게 만들고 난리야!”
사내는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억지로 잡아당겼다.
여인은 남량을 응시하며 눈물 젖은 얼굴로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이년이 그래도! 몇 번을 불러도 네년을 구해 줄 사람 따위는…….”
그 순간, 남량이 사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푸욱!
그리고 말없이 주먹을 내질러 목젖을 깊숙이 찔렀다.
“컥! 쿨럭…….”
사내는 입에서 피를 콸콸 흘리며 한 차례 부르르 떨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퍼퍼퍽!
남량은 한발 늦게 사내의 가슴과 목을 가격해 쓰러뜨렸다.
‘빌어먹을. 아직 내력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남량이 눈살을 찡그렸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내력 없이 무림인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심지어 휘파람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온 적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스무 명이나 되었다.
‘하는 수 없지. 해보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남량은 옷을 찢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다.
사내들은 쓰러진 동료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뭐야, 고작 계집들에게 당한 거야?”
“잠깐만, 저 계집, 자세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뭐 해? 일단 잡아서 쓰러뜨리지 않고!”
사내들이 검을 뽑아 들고 남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퍼퍼퍼퍽!
달려들던 사내들이 가슴팍과 머리를 걷어차여 뒤로 나가떨어졌다.
어느새 남량의 곁에는 정신을 차린 찬야와 유라가 서 있었다.
“정말 한심한 놈들이구만. 여인들을 상대로 협공을 해?”
“납치나 일삼는 쓰레기들이 뭔들 못 할까.”
유라와 찬야. 두 사람이 끼어들자 분위기가 단숨에 역전되었다.
당황한 사내들이 무기를 겨누며 소리쳤다.
“네년들은 대체 누구냐!”
“미안한데 나 남자야.”
“거짓말하지 마라!”
“……후우.”
빠악!
남량은 그대로 몸을 날려 가장 앞에 선 사내의 고환을 걷어찼다.
고환을 걷어차인 사내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혼절했다.
찬야는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잔인하기는……. 보는 내가 더 아프네.”
“엄살떨기는. 보기만 하는데 뭐가 아파?”
“네가 남자가 되어 봐야 이 고통을 알아…….”
남량은 쓰러진 사내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고 몇 차례 가볍게 휘둘렀다.
“뭐, 별로긴 한데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고개를 돌린 남량이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뭐 해? 안 덤비고.”
***
쿠당탕!
스무 명의 사내들을 전부 처리한 남량과 찬야, 유라는 거치적거리는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사내들이 입고 있는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때마침 산공독의 효력이 떨어져 내력도 돌아온 차였다.
“싸울 때 돌아왔으면 좀 좋아? 괜히 힘만 빼고…….”
찬야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납치된 여인들을 데리고 동굴을 나서자, 긴 복도가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모를 때는 일단 찍어서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민간에 아주 용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조용히 해 봐.”
찬야의 입을 막은 남량이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런 때, 천양신경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남량은 무림맹에서 요양하는 기간 동안, 꾸준히 각운 선사의 천양신경을 수련했다.
수백 년 전의 심법(心法)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것은 천마의 지식을 가진 남량에게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노력한 결과,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전에서 사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각운 선사의 천양신경은 세 가지의 무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찰안(洞察眼). 사자금강(使者金剛). 신유유합(神癒癒合). 그중 통찰안은 만물을 뚫어볼 수 있는 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내부 구조나 납치된 나머지 여인들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을 터…….’
남량은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내력을 운기했다.
유라와 찬야는 긴장한 표정으로 남량을 응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량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남량은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남 사제. 뭔가 알아냈어?”
찬야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그래. 여긴 커다란 산 밑의 지하 동굴이야. 납치된 여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냈고. 진법의 핵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냈어. 가자.”
남량은 여인들을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냈다는 거야?”
찬야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원래 비밀이 많은 사내야.”
남량은 마주친 적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갇혀 있는 여인들을 구출해 낸 다음, 진법의 핵을 찾아 파괴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여전히 통찰안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흑영대가 분투하고 있군. 상황이 좋지 않은데……. 서둘러야겠어.’
그때, 남량의 두 눈에서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안구를 지지는 듯한 고통에, 남량은 불현듯 천양신경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렸다.
각운 선사는 분명 이렇게 당부하고 있었다.
『통찰안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능(異能)인 만큼, 사용한다면 커다란 부작용이 뒤따를 것이다.』
남량은 이를 악물었다.
‘절정의 경지로서는 길어야 일다경(15분) 정도가 한계라는 건가?’
더 이상 사용했다간 눈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남량은 즉시 통찰안을 해제했다. 그러자 벽안(碧眼:푸른 눈)에서 원래의 검은 눈동자로 다시 되돌아왔다.
“남 사제, 괜찮아?”
남량이 피를 흘리는 걸 본 찬야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때, 유라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조심해! 위에서 뭔가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동굴 천장에서 날카로운 검을 든 자객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어딜 그렇게 도망가느냐!”
채채챙!
찬야와 유라는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떨어지는 공격을 막아 냈다.
바닥에 착지한 자객들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쌍둥이였다.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들이었는데, 몸이 매우 말랐고 하관이 좁아 비열한 인상을 주었다.
그중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하남에서 이름을 떨친 월아쌍노(月牙雙老)다. 우리의 명성은 익히 들어 봤겠지?”
찬야가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그래. 마을을 약탈하고 힘없는 민간인들만 잡아 골라 죽인다는 천하의 겁쟁이들이 바로 네놈들이구나.”
“허! 계집 주제에 입이 제법 매섭구나.”
그제야 남량은 자신들이 아직 화장을 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찬야에게 물었다.
“근처에 씻을 물 같은 거 없겠지?”
“아마도…….”
월아쌍노는 혀로 칼날을 핥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구나. 어여쁜 계집년이 피를 흘리는 것도 제법 볼만하겠어.”
월아쌍노의 눈에서 붉은 음욕(淫慾)이 흘러나오자 여인들이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끝내고 가야겠군.’
남량이 놈들을 치려는 그때, 유라와 찬야가 앞으로 나섰다.
“먼저 가, 남 사제. 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여긴 우리 둘만으로 충분해.”
월아쌍노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들었소 형님? 어찌하시겠소?”
“개인적으로 백발 여자가 마음에 들긴 한다만…… 나머지도 미인이니 데리고 노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전부 잡힐 년들 아니더냐?”
“그건 그렇군.”
남량은 칼을 내리며 찬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알았다. 빨리 끝내고 합류해.”
남량은 굳이 ‘괜찮겠어?’라는 등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냉정히 보면 찬야와 유라에게 매우 불리한 싸움임에 틀림없다. 둘은 강호에 나와 자신과 대등하거나 더 강한 자를 상대로 생사를 걸고 싸운 경험이 없을뿐더러, 상대는 수십 년을 강호에서 구른 노괴들이다. 허나, 이 또한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 부디 살아남아 이겨라. 그럼 지금보다 더더욱 강해질 것이다.’
남량이 여인들을 이끌고 그곳을 지나자, 월아쌍노 중 일노(一老)가 말했다.
“이제 보니 네년들…… 뿜어내는 기운이 범상치 않구나. 어디 문파의 제자냐?”
“알면 깜짝 놀랄 텐데. 우린 화산파의 제자다. 아, 그리고 나 남자야.”
찬야의 말에, 나머지 이노(二老)가 눈을 크게 떴다.
“화산파라! 이거 운이 좋군. 구파의 제자를 죽이면 우리의 명성도 한층 더 올라갈 테지.”
“악인악과(惡因惡果: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따른다.)라 하였다.”
처억.
유라는 검을 들어 월아쌍노의 목을 겨누며 싸늘히 눈을 빛냈다.
“네놈들의 그 더러운 목숨, 내가 이곳에서 끝내 주마.”
***
남량은 여인들을 데리고 진법의 핵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넓은 공동의 중앙에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을 수십 명의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거다. 저것이 바로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진법의 핵심이야!’
남량은 숨을 고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전부 잡아라!”
“으아아!”
무사들은 남량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꺄아악!”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남량은 말없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무사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촤악! 촤아악!
남량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핏줄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남량은 일각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수십 명의 무사들을 모조리 도륙 낸 다음, 비석이 세워진 곳으로 다가갔다.
남량은 지체 없이 비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검(一劍)에 비석은 두부처럼 반으로 쪼개졌다.
후웅!
직후, 비석에서 한 차례 돌풍이 불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남량은 진법이 해제되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한 곳을 응시했다.
‘실종된 여인들을 구출하고 진법을 해제했다. 이제 남은 건 머리를 치는 일뿐.’
남량은 여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밖에 너희들을 구해 줄 무림맹의 대원들이 와 있다. 이쪽 길로 쭉 나가면 만날 것이니, 어서 빠져나가라.”
“네! 감사합니다, 무사님!”
여인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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