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검황-60화 (60/164)

<60화>

복마전(伏魔殿). 금적금왕(擒賊擒王)(1)

고경홍은 고위영이 집무실을 나간 이후로도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집무실로 들어온 비설은 고경홍의 표정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리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계시지?’

마침 비설과 눈을 마주친 고경홍이 헛기침을 하며 앉으라 말했다. 자리에 앉은 비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맹주님. 혹시 심려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고경홍은 잠시 망설이다 비설에게 물었다.

“비 대주.”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칼을 닦다 팔목을 베여 본 적이 있나?”

조금 엉뚱한 질문에 비설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요. 보통 다쳐도 손가락이나 손바닥 아닙니까?”

“그렇지? 그것도 초절정의 고수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지…….”

고경홍은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비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본론을 꺼냈다.

“맹주님.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나흘 후, 낙양상단과 서역의 상인들이 아편 거래를 하는 그때를 노려 급습을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부대는 총대주님께 통솔을 맡기려 하는데…….”

비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경홍이 반대했다.

“안 된다.”

“네?”

“급습은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 혹여라도 계획이 새어 나갈 수 있으니 흑영대원과 황룡대(黃龍隊)만 대동한 채 진행하도록 하라.”

황룡대는 대대로 무림맹주의 호위를 수행해 온 부대였다.

그렇다면 맹주는 총대주마저 의심하고 있다는 뜻인가?

‘설마……. 아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총대주는 맹주님의 핏줄인데. 그럴 리가 없지…….’

비설은 금방 생각을 지우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어두운 밤, 황하(黃河) 지류(支流)에 위치한 작은 포구로 커다란 선박 한 채가 도착했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내가 선박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낙양상단의 단주, 하추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네.”

“별말씀을요. 주변에 호위가 많군요.”

“어느 때보다 안전을 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특별히 엄선한 사파의 고수들이라네.”

“돈은, 준비해 두셨겠지요?”

“물론이네. 자자, 거래는 아랫것들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세.”

하추는 서역의 아편 판매상과 함께 근처 객잔으로 이동했다.

은밀한 만남을 위해 하루를 통째로 빌린 객잔에는 미리 준비해 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판매상을 자리로 안내한 하추가 직접 술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수고 많았네. 무리한 여정이었을 텐데.”

“허허. 누구 명이라고 불복하겠습니까? 당연히 날짜를 맞춰야지요. 물론, 고생한 수고비는 따로 챙겨 주셔야 하겠지만요.”

“물론이네. 자, 일단 한 잔 들지.”

술잔이 몇 순배 돌자 하추가 말을 꺼냈다.

“가져온 물건은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근래 조정에서 아편 밀수입을 혹독하게 단속하는 바람에 애를 좀 먹었지만요. 하하.”

“그래. 아편의 위험성은 누구보다 조정에서 잘 알고 있지. 언제든지 백성들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야. 헌데, 그 아편이 무림맹주의 궁전에서 발견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맹주는 강호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발을 뻗고 살 수 없게 될 것이야.”

하추는 껄껄 웃으며 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제 자신은 그저 이 아편들을 고위영에게 전달만 해 주면 된다. 아편을 맹주전으로 옮기는 위험천만한 일은 모두 그의 책임이다.

‘남북 십성의 명왕. 그것도 청렴과 협의(俠義)로 명성 높은 맹주 고경홍이 아편을 숨기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강호의 반응이 과연 어떠할지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되는군.’

앞서 말했듯 이 사실이 밝혀지면 무림이 아니라 조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맹주와 가까운 총관과 흑영대도 조정의 칼바람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고 중심을 잃은 무림맹은 얼마 가지 못하고 철저히 붕괴하리라.

“병법에도 이르길 금적금왕(擒賊擒王)이라, 적을 쓰러뜨리려면 왕을 먼저 노려야 한다고 했네. 그 말대로 현 무림을 이끄는 맹주를 무너뜨리면 정파 무림도 자연스레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훗날 회가 무림을 장악하는 데 더욱 유리해지겠지.”

“저도 이참에 판매상에서 벗어나 떵떵거리며 지내겠군요.”

“그래. 그러셔야지. 자,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건배하세.”

하추와 판매상은 욕망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하추의 호위 무사 장제(張制)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발각되었습니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하추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놈들이 대체 여길 어찌 알고 온단 말인가?’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판매상은 매우 당황하여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객잔을 포위한 무사들과 그 뒤로 펄럭이는 누런 맹(盟)의 깃발을.

『명심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거래한 아편의 확보. 둘째는 낙양상단의 단주, 하추의 생포다.』

남량 일행은 사흘 동안 하추를 은밀히 감시해 거래 날짜와 장소를 알아내었다. 그리고 놈들이 접선할 때까지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황룡대와 황룡대주 유성(劉成)은 객잔을 포위한 채 천둥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하추, 마교와 결탁해 그들의 명을 받고 아편을 밀수해 맹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 네놈을 벌하기 위해 맹주께서 우릴 보내셨다. 증좌가 명백하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운휘는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당연히 항복할 생각은 없으시겠지?”

운휘의 말대로 낙양상단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입구를 막아섰다.

“시작이군. 다들 준비하시게.”

암영을 비롯한 흑영대원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쳐라!”

마침내 사투가 시작되고, 양쪽 무사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걱-!

화양검을 뽑아 들고 가장 먼저 달려든 적을 베어 버린 남량이 외쳤다.

“매화오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자.”

남량을 앞세운 매화오절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단숨에 객잔 안으로 달려들었다.

***

객잔 밖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에 판매상은 사색이 되어 하추에게 매달렸다.

“단주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만약 관에 넘겨진다면 분명 극형에 처해질 텐데…….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죽기는 누가 죽어! 이 하추가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소리.”

장제가 고개를 숙이며 하추에게 말했다.

“어르신. 저희가 길목을 막고 있겠습니다. 마차로 가시지요.”

하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판매상이 그의 뒤를 조르르 따라오며 물었다.

“저들이 시간을 얼마나 벌겠습니까?”

“한때 사파의 거두(巨頭)로 이름을 날린 초절정의 고수, 잔혈검객(殘血劍客)이 바로 장제일세. 또한 호위들 모두 장제가 키운 실력자 중에 실력자지.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네.”

정체가 들통났으니 더는 중원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더군다나 거사가 실패로 끝났으니 회에서도 목숨을 노려 올 터였다.

‘이걸로 내 명운도 다한 것인가…….’

장사치가 상운(商運)을 건 도박에서 졌다. 그러나 아직은 인정할 수 없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하추는 이를 부득 갈며 걸음을 빨리했다.

휘릭. 촤악-!

황룡대와 흑영대가 하추의 사병들을 상대하는 동안, 남량은 도망치는 하추를 생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뒷문으로 나가는 복도로 들어서자 저 멀리 하추의 뒷모습이 보였다.

‘잡았다.’

남량이 몸을 날리려는 그때, 벽 뒤에서 일단의 검사들이 튀어나오며 남량을 막아섰다. 하나같이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남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데, 매화오절이 남량의 어깨를 스치며 앞으로 나섰다.

“이야, 하추 이 새끼. 도망치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만?”

“그러게. 재물이 곧 힘이라고 제대로 된 놈들로 고용한 모양이야. 쉽지 않겠는데…….”

운휘와 위지혁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둘 다 여기까지 오는 데 피맛을 잔뜩 본 듯, 눈빛이 흉흉했다.

“잘됐잖아. 이참에 우리도 그럴듯한 별호 하나 새기자고.”

“어, 맞아! 그러고 보니 우리만 아직 별호가 없네!”

찬야의 말에 운휘가 격하게 공감했다.

“돌아가면 멋있는 별호로 하나 만들어야지.”

“내가 정해 줄게. 단각검(短脚劍) 어때? 어울리지? 마치 네 짧은 다리처럼.”

“입 닥쳐. 찬야.”

유라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가라. 남 사제.”

남량은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그저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조금씩 떨리는 어설픈 등에 불과하다. 허나 언젠가는 이 등이 일천의 적을 상대로도 철옹성처럼 든든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키운 보람이 있네. 귀여운 것들.’

“매화오절. 길을 열어라.”

남량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운휘와 찬야, 유라와 위지혁이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으아아-!”

콰아앙!

첫 번째 돌격이 끝나고 벌어진 틈을 타 남량이 복도를 질주했다. 검사들이 곧장 따라붙으려 했으나, 네 명의 도사가 길을 막고 선 탓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손목을 풀며 나선 운휘가 말했다.

“자, 그래서 누가 먼저 덤빌래?”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적들 중 한 명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대장이 어떤 분인 줄 아느냐? 한때 광동제일검이라 불리었던, 사파의 거두 중 한 분이시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대장이, 고작 절정 나부랭이에게 당할 것 같으냐? 너희들의 대장은, 우리들의 대장에게 죽을 것이다.”

스걱-!

직후, 벼락처럼 튀어나온 찬야가 그자의 목을 일격에 날려 버렸다.

“미안. 원래 난 시끄러운 놈부터 죽이는 편이라.”

찬야의 어깨를 잡으며 앞으로 나온 유라가 말했다.

“저승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너희 대장도 곧 그리로 갈 테니까.”

타다닷-.

남량은 엄청난 속도로 복도를 빠져나와 뒷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나서기 직전, 한 사내가 남량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백매화, 남량이라 했던가?”

사내는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초절정의 검사다.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더 길어지겠군.’

장제는 검을 들어 남량의 목을 겨누었다.

“어차피 난 이곳에서 붙잡힌다. 단주님을 무사히 보낼 시간만 벌면 그걸로 족해. 이것이 내 마지막 싸움이 될 테니 금방 죽지 말아 다오.”

남량이 자세를 취하며 싸늘히 대꾸했다.

“금방 끝날 것이다. 죽는 대상만 다를 뿐이지.”

장제는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터뜨리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후웅! 묵직한 검기를 머금은 칼이 수평으로 날아들었다.

남량은 놈의 공격을 받아치는 대신 공중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리고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내리쳤다.

“매화천수검 4초식-.”

콰르릉!

뇌전포화 초식이 발현되면서 장제의 머리를 쪼갤 듯 강렬한 일격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장제의 검에 유형화된 검강(劍罡)이 생성되어 남량의 검격을 받아쳤다.

“묵직하군. 이번에는 내 공격을 받아 보거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남량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커다란, 커다란 초식이 온다!’

우우웅-!

장제의 주변에서 불길한 기운이 일렁거리며 치솟았다.

“혈선만참(血線萬斬)!”

다음 순간, 장제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수백 갈래의 붉은 검강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남량은 그물처럼 자신을 덮쳐 오는 검강의 줄기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검사(劍絲). 초절정의 강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구나. 이건 막아야 한다-.’

남량은 서둘러 사자금강을 펼치고 검을 휘둘러 검막(劍膜)까지 둘러쳤다.

쩌어엉!

장제의 검강과 남량의 방어막이 충돌하며 폭음이 일었다.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지만 충격을 받아 내장이 진탕되었다.

“크윽!”

남량은 검을 놓친 채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 냈다.

장제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화양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팔 할의 내력을 실어 날린 일격을 막아? 기도 안 차는군. 너, 괴물이냐?”

장제는 화양검의 칼날을 차서 남량의 앞으로 날려 보냈다.

“마지막 기회다. 전력을 다해 덤벼라.”

“…….”

남량은 천천히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