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위지혁의 각성. 만독불침(萬毒不侵)(1)
사천성 성도(成都).
바로 이곳에 오대세가의 한 축이자 독과 암기술로 유명한 당가(唐家)가 위치해 있었다.
당가는 가풍이 오만하고 혈통(血統)을 중시했으며 사치를 즐겼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담 너머로 보이는 당가의 전각들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당가의 대문 앞에 도착한 남량 일행은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전각을 응시했다.
“미쳤네.”
“돈이 썩어 나는 모양이군.”
“지붕 번쩍거리는 것 좀 봐. 전부 금칠을 한 건가?”
사람들이 당가를 ‘사천의 지배자’ 혹은 ‘사천의 패자’로 부른다더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 사제. 괜찮겠어?”
찬야의 물음에, 남량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가?”
“이전에 위지혁과 협행을 나갔을 때 말이야. 당가 사람들이랑 부딪쳤던 적이 있었다며?”
“그랬지.”
“당가는 원수를 철저히 갚는 지독한 가문으로 악명이 높은데, 험한 일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강호 무림에 떠도는 격언 중, 유명한 말이 있었다.
원한은 100배로 되갚는 곳. 그곳이 바로 당가다.
절대 당가와 적대하지 마라.
그만큼 당가의 인물들은 가문을 건드린 적을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당가의 원한을 산 적들은 자는 것, 먹는 것조차 경계해야 한다고 하니 그들의 성정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정말?”
“당연하지. 놈들도 생각이 있다면 화산파의 제자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겠어? 그럼 바로 전쟁인데. 작은 원한 하나로 전쟁을 일으킬 만큼 멍청한 놈들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해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당가 놈들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작자들이니까.
수장인 독왕(毒王)만 봐도 집안 성정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무인들 중 가장 미친 작자였지.’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두드렸다.
‘위지혁만 데리고 얼른 나가자.’
대여섯 번 정도 두드리고 나자 문이 열리며 늙은 노복(老僕)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복은 남량 일행을 향해 물었다.
“누구십니까?”
유라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저희는 화산파의 제자들입니다.”
노복의 시선이 도포에 그려진 매화 문양으로 향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집안 어르신께 화산파에서 객이 오셨다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노복이 들어가자 유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낭인회의 보초들도 최소한 예의는 갖추었는데.”
찬야가 유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한때 당가가 도문(道門)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지금 보니 마냥 낭설(浪說:헛소문)은 아닌 것 같네.”
끼이익.
일다경 정도 지나고 나서 노복이 다시 나왔다.
노복은 그제야 일행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소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가주라면…….”
찬야가 웃으며 말했다.
“남북 십성, 독왕의 아들인 당서군(唐曙群)이야. 무예 실력도 뛰어나지만 행정 능력이 탁월해 당가 전체의 내정을 맡고 있다더군. 독왕의 총애를 받아 곧 당가 가주 자리에 오를 모양이야.”
“음.”
유라가 나직이 감탄하며 물었다.
“넌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낭인회에는 떠도는 정보가 많거든.”
찬야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일행은 노복의 안내를 받아 당가의 접객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상석에 한 중년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자가 당서군인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당가의 사람답게, 당가의 상징화(花)인 산다화(山茶花:동백꽃) 문양이 새겨진 비단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외모는 단정했으며 주변에 은은한 기품이 흘렀다.
남량 일행은 당서군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화산의 일대제자, 남량입니다.”
“동문인 유라입니다.”
“동문인 찬야입니다.”
당서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예를 받았다.
“당가의 소가주, 당서군일세. 화산의 제자들을 환영하네.”
당서군은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시종이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런데…….
‘거, 검다. 차 색깔이 검어!’
‘흑차(黑茶)인가?’
‘차에서 자극적인 냄새가…….’
당서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가에서 직접 제조한 차일세.”
“아, 네…….”
“몸에 좋은 약재가 들어가 있으니 마셔 보게나.”
일행은 찻잔을 들었다. 겉보기에는 사약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결국 차 한 잔을 비우자 당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가. 금방 몸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나?”
“……네.”
“세상 사람들이 당가의 악명 때문에 종종 오해를 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 악명은 과장된 면이 있다네. 손님이 오면 누구보다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곳이 바로 당가인데 말이야. 하하.”
“그, 그렇군요.”
“자네들, 혹시 그 안에 독이라도 들었나 의심한 건 아니겠지?”
“서, 설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하하하…….”
한 차례 어색한 웃음소리가 접객실에 울려 퍼졌다.
“그럼 이제…….”
당서군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편안한 어투로 물었다.
“자네들이 본 가에 온 이유를 들어 볼까?”
“저희 동문을 데리러 왔습니다.”
“위지혁 도장 말인가?”
당서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제 곧 무림대회이니……. 이곳에서 곧장 낙양으로 향할 생각인가?”
“하북에 잠시 들렀다 갈 예정입니다.”
“그렇군.”
당서군은 시종을 불러 그에게 말했다.
“손님들을 위 도장의 객청으로 안내해 드려라. 그리고 손님들이 따로 묵을 방도 마련해 두고.”
“예. 소가주님.”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당서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가 밀려 있어서 먼저 가야겠군.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편히 지내도록 하게.”
***
남량 일행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위지혁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조금 수척해지긴 했어도 멀쩡해 보였다.
“안 그래도 돌아가려고 했어. 수련이 길어져서…….”
“대체 당가를 왜 온 거냐?”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위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찬야, 유라, 운휘 전부 떠나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에, 당가에서 초대장을 보냈다. 당가에서는 가끔 타 문파와 세가의 제자들을 초대하는 행사가 있다는군. 나야 물론 거절했지만 스승님이 워낙 강경하셔서 어쩔 수 없이 화산 대표로 참석한 거다.”
“흐음.”
남량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고?”
“당씨 성을 가진 그자 말이냐?”
남량은 자신과 잠깐 겨루었던 당씨 성을 가진 초절정의 고수를 떠올렸다. 이름이 ‘당경’이라고 했던가?
“아니. 이곳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군.”
“그런데 운휘는?”
“이제 데리러 가야지. 하북까지는 갈 길이 멀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자고.”
일행은 내일 사시(巳時:09∼11시)에 객청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
그날 밤, 남량은 목욕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왔다.
침의로 갈아입은 뒤, 촛불을 끄고 침상에 누웠다.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닫힌 창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
긴 장포를 펄럭이며 창가에 걸터앉은 사내가 잠들어 있는 남량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때, 눈을 감은 남량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 별로야. 계집도 아닌 사내새끼가 밤중에 찾아와서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거.”
“…….”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남량은 슬며시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암살자라면 달려들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건……. 대화라도 나누고 싶어서 온 건가?”
사내는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남량은 이상하게 그에게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봐,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
사내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냐. 불청객 주제에.”
남량은 손을 뻗어 침상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졌다.
쇄애액!
복면의 사내는 손을 뻗어 날아오는 의자를 잡아 세웠다.
그사이,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고 달려든 남량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서걱-!
의자가 반으로 갈라지며 복면의 사내가 뒤로 몸을 빼냈다.
휘리릭.
사내는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남량은 화양검을 든 채 침의 차림으로 몸을 날렸다.
한적한 마당에 착지한 남량은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복면 사내와 대치했다.
그때, 사내가 쓰고 있던 복면이 둘로 갈라졌다.
‘조금 전 일격으로 복면까지 벤 것인가.’
복면이 벗겨지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남량은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를 기억하는군.”
사내, 당경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백매화 남량.”
남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가 밤중에 찾아왔다는 것은…….
“그때의 복수를 하러 왔느냐?”
당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상의를 풀어 헤쳤다. 그러자 가슴팍에 새겨진 긴 검상(劍傷)이 보였다.
“네놈이 내 몸에 새긴 검상이다.”
“…….”
“네 방해로 일을 망치고 돌아온 나는, 소가주께 징계를 받고 오랜 시간 근신해 있었지. 그리고 그 일로 소가주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어. 조금만 더 있으면 가문의 요직에 앉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날려 버렸지. 바로 네놈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남량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 죽이러 온 거 맞네.”
“…….”
“그럼 바로 죽일 것이지, 소름 돋게 자는 사람을 왜 쳐다본 건데? 변태야?”
“……그저 곱게 죽여 줄 수는 없지.”
당경이 품에서 비도 두 자루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때 네놈에게 입은 치욕스러운 상처를, 그대로 되갚아 줘야 되지 않겠느냐.”
“아,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다. 아무래도 절정 나부랭이한테 당해서 자존심이 매우 상한 모양인데…….”
남량은 피식 웃으며 화양검을 들었다.
“안 그래도 요새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비무 말고 생사를 건 전투를 못 하니 감각이 많이 둔해졌거든.”
마지막으로 생사결전을 치렀던 때가 폭혈검객 장태정과 싸우던 때였으니 시간이 꽤 흘렀다.
몸도 검과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쓰지 않으면 무뎌지는 법.
남량은 칼끝을 당경에게 겨누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맙다. 네놈 덕분에 몸이나 좀 풀겠구나.”
“……건방진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당경의 비수가 달빛을 반사해 시리게 빛났다.
“죽어라.”
쇄애애액!
당경의 손에서 벗어난 비수가 허공을 가르며 남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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