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위지혁의 각성. 만독불침(萬毒不侵)(4)
비무가 끝난 직후, 찬야는 당가의 의원들에게 보여졌다.
의원은 해독하는 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말했다.
결국 남량 일행은 당가에서 하루 더 묵고 가게 되었다.
그날 밤, 위지혁은 홀로 객청 마루에 나왔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들. 엄청 강해졌어.’
위지혁은 당씨 형제와의 비무를 통해 그들의 힘을, 남북 십성 후계자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찬야와 유라가 그들에게 비무를 청할 때도 두 사람이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보란 듯 이겨 보였다.
무려 남북 십성의 후계자를 이긴 것이다.
그가 평생 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포기했던 벽을, 넘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당연히 기뻐해야 할 위지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뒤처지고 있는 건가.’
내가 누군가.
풍수검 위지혁이다.
한때는 화산 제일의 기대주라 불리며 장문인을 노리던 그가, 지금은 동문들의 성장을 보며 위기감을 느꼈다.
아니, 사실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인지하고는 있었다.
자신에게는 저들과 같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찬야는 남량이 인정한 천재이며 유라는 재능에 지독한 근성이 더해졌다. 그리고 운휘는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강해지며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럼 결국 나만 홀로 남겨지게 되겠지.’
위지혁은 깊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싫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다.
위지혁은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나에게도 재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재능이 없다면, 기연이라도 오면 얼마나 좋을까.”
“설령 그것이 악마가 주는 것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괴로움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눈을 감았던 위지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
빈 마당에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서 있었다.
누구지?
백발의 노인은 키가 매우 컸으며 체격이 장대했다.
그가 걸친 산다화 문양의 비단 장포가 당가의 사람임을 예상하게 했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었는데.”
노인이 위지혁을 향해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
“네?”
위지혁은 깜짝 놀랐다. 조용히 중얼거렸을 뿐인데.
노인은 휘적휘적 다가와 위지혁의 앞에 멈춰 섰다.
‘크, 크다…….’
위지혁은 본능적으로 위축되었다. 노인은 위지혁을 빤히 내려다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산의 제자인가? 매화 향이 나는구만.”
“네? 아, 네…….”
위지혁은 다급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화산의 일대제자, 위지혁이라고 합니다.”
“나는……. 편하게 당씨 영감이라고 부르게.”
노인이 위지혁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럼 아까 이야기를 계속해 보지. 젊은 도사.”
노인이 슬쩍 위지혁을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나?”
“…….”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편히 말해 보게.”
노인은 연기를 내뿜으며 위지혁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위지혁은 당씨 노인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탄스럽습니다.”
평소였다면 처음 보는 노인을 경계하며 입을 닫았을 테지만, 지금 위지혁에게는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너무도 한탄스럽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은 저들에게 재능을 내려 주고 나에게는 내려 주지 않은 것입니까? 제 무도(武道)는 결국 여기까지라는 말입니까? 왜 나의 길은 저들과 같지 않단 말입니까? 대체 왜…….”
위지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은 그런 위지혁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 정말 받을 것인가?”
“네?”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기연이 온다면 설령 악마가 주는 것이라 해도 기꺼이 받겠다고.”
노인의 눈이 일순 섬뜩하게 일렁거렸다.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위지혁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악마가 제게 오긴 한답니까?”
노인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왔지 않는가.”
“……네?”
“내가 바로 자네가 찾는 악마일세.”
파파팟!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이 손을 뻗어 위지혁의 혈을 짚었다. 방심하던 위지혁은 혈을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위지혁은 당황한 눈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나는.”
노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당가의 가주, 당지황(唐地皇)이다.”
“……!”
위지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당가의 가주라면……. 남북 십성의 독왕이 아닌가!
노인, 당지황이 위지혁에게 물었다. 이전까지의 친근한 어투는 사라지고 근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 강해지고 싶으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강의 힘을 손에 넣고 싶으냐?”
위지혁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혈을 잡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당지황의 입에서 경악할 만한 발언이 튀어 나왔다.
“그럼 독인(毒人)이 되어라.”
위지혁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독인이 되라고? 독을 쓰는 무인이?’
당지황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내가 그동안 연구하고 있던 것이 하나 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최강의 독인을 만들어 내는 연구다. 사실상 완성 단계인데, 아직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어.”
“…….”
“성공한다면 가히 최강이라 자부할 만한 병기(兵器)의 탄생이다. 그 영광스러운 기연을 줄 수도 있다. 어떠냐. 네가 원하는 것 아니냐?”
위지혁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러자 당지황이 대답을 듣기 위해 혈을 풀어 주었다.
몇 차례 기침을 내뱉은 위지혁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도인에게 독인이 되라니! 언어도단입니다! 어찌 화산의 제자에게 이런 모욕감을 주려 하십니까!”
상대는 당가의 독왕이었지만 명예에 큰 상처를 입은 위지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위지혁의 분노에 당지황은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
“모욕이라……. 허면, 네가 나의 도움이 없이 평범하게 노력해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위지혁은 대답하지 못하고 표정을 찡그렸다.
당지황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걸어갔다.
“독은 그저 무기인 것이다. 검과 같지. 선한 이가 쓰면 사람을 구하게 되고, 악인이 쓰면 사람을 해치게 된다. 너는 독을 쓰게 되면 악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느냐? 네 독공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
위지혁의 눈이 커졌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독을 악한 것이라 평하는 자들은 고고한 위선자에 불과하지. 뭐든 그 사람이 쓰기에 달린 것이다.”
당지황의 말은 위지혁의 마음을 크게 격동시켰다.
위지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뭐가 말이냐.”
“왜 저에게 그런 힘을 주시려는 겁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화산의 제자입니다. 힘을 주려면 가주님의 후계자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한데…….”
당지황이 위지혁에게 힘을 주는 것은, 화산을 도와주고 당가를 배반하는 행위와 같았다. 그런데 대체 그는 어째서 위지혁을 선택한 것인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고개를 돌린 당지황이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해서다.”
“궁금해서?”
“그래. 본가의 무인들이야 뭐 무공을 익힐 때부터 독과 친숙하며 자연히 독을 다루는 무공을 중심적으로 익혔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도인이 독을 다루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네가 가지고 있는 도가의 정순한 내력에, 독기가 섞이게 되면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된다.”
위지혁은 순간적으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은 진심이다.
가문의 번영이나 영광보다, 자신이 궁금증을 푸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그야말로 광기(狂氣)였다.
“그리고 네가 이 당지황의 연구로 독인이 된다면 너는 그 순간 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
당지황은 위지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물었다.
“어떠냐.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위지혁은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거절해야 한다.
화산의 도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받아들이면 화산을 저버리고 도인으로서의 긍지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것인가.
남량이, 찬야가, 유라가, 운휘가 강호를 진동시키는 영웅이 되는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되는 건가?
멀리서 그들의 빛을 응원만 하면서 평생을?
‘안 돼.’
위지혁은 멀어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야 한다. 잡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정한 모양이군.”
당지황은 위지혁의 손을 잡으며 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당지황의 시선이 위지혁의 뒤편으로 향했다.
스륵.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린 위지혁은 나타난 이를 확인하고 입을 쩍 벌렸다.
“나, 남량!”
그는 바로 남량이었다.
남량은 일찍이 위지혁의 마음에 생긴 괴로움을 짐작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러 왔다가, 당지황이 온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당지황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너, 전부 들었어?”
위지혁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그래.”
위지혁은 숨이 턱 막혀 오는 듯했다.
남량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더러운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위지혁의 걱정과 달리, 남량은 팔짱을 끼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다.”
“……응?”
“이런 기연은 다시없을 기회야.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잡아라. 독왕의 심경이 변하기 전에.”
“나, 남 사제!”
위지혁이 당황하며 남량을 불렀다.
“너는 괜찮아? 내가 독인이 된다고 해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독인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텐데?”
“유라가 알면 널 죽이려 들 수는 있겠네.”
가볍게 농을 던진 남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위지혁을 응시했다.
“위지혁. 곧 마교와의 전쟁이 일어날 거다. 천음선녀를 상대해 봐서 알겠지만, 그들의 마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 너는 어떡할 거냐? 모자란 힘으로 그들과 싸우다 죽을 거냐? 아니면 세상 도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쳐 죽이고 세상을 구해 낼 거냐?”
“…….”
“조금 전 독왕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해? 사람들이 너를 사도라고 불러도, 네가 그들의 목숨을 구한다면 더 이상 그들은 너를 조롱하지 못해. 오히려 너를 영웅으로 칭송할 거다. 위지혁, 힘을 손에 넣어라. 우리와 함께 강해지고 네 한계를 뛰어넘으며 마교를 쓰러뜨릴 힘을!”
“허허허.”
가만히 듣고 있던 당지황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도인이 아니로구나. 생각하는 게 딱 마교 놈들 같아.”
남량은 흠칫하며 표정을 찌푸렸다.
‘미친놈들이 눈치가 좋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위지혁은 반드시 독왕을 잡아야 한다.
그의 재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충분히 세상에 이름을 떨칠 고수가 될 수 있지만, 기연이 없다면 그 이상의 수준을 바라보기 힘들다.
‘도인이고 뭐고 마교랑 싸울 때 도움이 될 만한 놈들은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한다.’
만약 위지혁이 반대하면 기절시킨 다음 억지로라도 행할 생각이었다.
위지혁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나?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할 것인지.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스승인 이건이었다.
‘스승님…….’
위지혁은 만약 그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떠올렸다.
그가 아는 이건이라면 분명…….
-멍청한 것! 당장 무릎 꿇고 빌어서 힘을 받아라! 그것만이 남량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다!
‘하하.’
그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위지혁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위지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독인이 되겠습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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