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운휘의 각성. 금강불괴(金剛不壞)(4)
팽자엽과 운휘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운휘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삼백스물네 번째 비무인가.’
남량은 비무대에 오르기 전, 운휘에게 미리 한 가지를 경고했다.
바로 금강불괴라는 경지의 약점에 대해서였다.
“명심해. 금강불괴는 완벽한 방어가 아니다. 전설로 전해지는 금강불괴는 강기마저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걸 익힌 자들은 이미 스스로가 천하제일 고수의 반열에 오른 자들이었어. 그에 비해 너는 아직 초절정의 경지에도 들지 못했다. 즉, 네 방어력이 크게 높아졌을지언정, 어떠한 공격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야. 만약 팽자엽의 도기(刀氣)가 네 금강불괴보다 한 수 앞설 경우, 그의 도는 네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 금강불괴를 너무 자신하지 마라.”
금강불괴를 자신하지 마라.
이 말을 듣기 전, 운휘는 내심 완벽한 신체를 손에 넣었다고 자신했다. 팽자엽의 도격쯤, 정면으로 받아 주면서 상대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남량은 그런 운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준 것이다.
‘형님께 감사해야겠어.’
그가 아니었다면 멍청하게 실수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스릉.
운휘는 검을 뽑아 들며 자세를 잡았다.
팽자엽은 그런 운휘를 가만히 응시했다.
‘운휘…….’
처음에는 그저 예의로 상대했을 뿐,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력도 제법 뛰어난 수준에 속해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
그닥 관심을 보일 만한 상대는 아니라 생각했다.
수십 번이고 백 번이고 매일같이 덤볐을 때는, 그 근성이 마음에 들어서 상대해 주었다.
그리고 어제의 비무에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운휘. 비록 지금은 자신보다 몇 수 아래의 실력이지만 언젠가는 남북 십성의 후계자만큼 성장할 재목이었다.
무서울 정도의 근성. 싸울 때마다 강해지는 재능.
팽자엽은 어느새 운휘라는 무인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궁금하다.
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그가 어디까지 보여 줄 수 있는지.
스릉.
도를 뽑아 든 팽자엽이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말해 두는데, 지난번처럼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우웅.
팽자엽의 기세가 크게 요동쳤다. 운휘는 긴장했다.
쇄애애액!
팽자엽의 도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운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맞서지 않고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이전처럼 놈의 사정거리 안에서 머무르면 안 돼.’
운휘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며 팽자엽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보기보다 현명하군.’
팽자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오호단문도의 초식 중 그에 대비한 초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팽자엽은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도기(刀氣)를 사방으로 뻗어 냈다.
쾅쾅쾅!
비무대가 갈라지며 한 차례 폭음이 일었다.
운휘는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도기를 피해 냈다.
그 틈을 노리고, 팽자엽이 벼락처럼 쇄도했다.
채채챙!
팽자엽의 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운휘를 밀어붙였다.
퍼퍽!
운휘를 걷어찬 팽자엽이 도기를 끌어모으며 초식을 날렸다.
“격천진뢰(擊天震雷)!”
파아앙!
강렬한 도기가 파공음을 내며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운휘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팽자엽은 깜짝 놀라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갑자기 움직임이 대담해졌어?’
팽자엽의 도가 운휘의 어깨에 적중했다.
바로 그 순간, 운휘의 전신에서 황금빛의 기파(氣波)가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카캉!
놀랍게도 팽자엽의 도격은 황금빛 기운에 의해 튕겨 나가고 말았다. 팽자엽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어떻게 맨몸으로 내 초식을? 운휘에게 이런 방어 무공이 있었나?’
그사이, 팽자엽의 지척까지 파고든 운휘가 그에게 반격을 가했다.
“뇌봉전별(雷逢電別)!”
저번 대련에서 실패로 돌아갔던 초식이, 엄청난 기세로 팽자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어림없다!”
팽자엽은 빠르게 도를 회수해 운휘의 검격을 막아 냈다.
쩌어엉!
팽자엽의 도기와 운휘의 검기가 충돌하며 충격파가 터졌다.
“크윽!”
뒤로 물러난 팽자엽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하니 그런 무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화산에 상승의 방어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일단 한 번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우웅!
팽자엽이 더욱 내력을 끌어올렸다.
운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대비했다.
‘큰 초식이 온다.’
콰앙!
팽자엽이 바닥을 박차며 운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마치 범 한 마리가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웅패군산(雄覇群山)!”
묵직한 기파가 피부를 강타했다. 운휘는 물러서지 않고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포호빙하(暴虎涄河)!”
두 개의 기(氣)가 한 점에서 충돌하며 거센 돌풍이 불어닥쳤다. 운휘의 도복이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그러나.
팽자엽의 일격은 운휘의 옷만을 베었을 뿐, 그의 몸에 직접적인 상처를 주지는 못했다.
팽자엽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 도격이……!’
반면, 운휘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팽자엽의 도격은 내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해!’
운휘는 팽자엽의 도를 쳐 내며 맹수처럼 공격을 가했다.
채채채챙!
팽자엽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는 자신의 도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해 제대로 된 실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마무리를 짓는다!’
운휘의 눈이 번쩍였다.
“암하지…….”
운휘가 초식을 펼치려는 찰나, 팽자엽이 이를 부득 갈며 그의 아랫배에 장풍을 날렸다.
퍼엉!
운휘는 충격에 의해 뒤로 밀려나며 중심을 잡았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팽자엽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운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강불괴의 신체를 얻어 팽자엽의 도격을 막아 낼 수 있지만, 아직 내 검기 역시 녀석에게 닿지 않아. 이래서는 승부가 나지 않겠어…….’
누각 위에서 지켜보던 유라가 중얼거렸다.
“곤란한 상황이군.”
찬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량에게 물었다.
“남 사제. 누가 이길 것 같아?”
“전력으로 부딪친다면 호각을 이룰 거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면…….”
남량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팽자엽이 이기겠지. 전체적인 기량은 그가 운휘보다 훨씬 높으니.”
“그렇군.”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운휘를 응시했다.
“무인의 근성이란, 언제나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결국 이 비무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남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해가 지고 밤이 새도록 대결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남량은 가볍게 누각 난간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이만 멈추게 해야겠군.”
허공을 날던 남량은 정확히 운휘와 팽자엽이 격돌하는 지점으로 떨어져 내렸다.
쇄애애액! 콰앙!
서로를 향해 달려들던 두 사람은 남량을 발견하고 다급히 멈추었다.
“형님?”
팽자엽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매화! 누가 마음대로 비무대에 올라…….”
“나머지는 무림대회에서 나누도록 하지요.”
남량은 팽자엽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때는 밤이 새도록 싸워도 곤란한 사람이 없으니.”
“…….”
팽자엽은 복잡한 표정으로 남량과 운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내력을 갈무리했다.
“내가 잠시 흥분했던 것 같소이다.”
팽자엽은 도를 도집에 집어넣고 몸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갔다.
운휘는 팽자엽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에게 말했다.
“무림대회에서!”
팽자엽이 걸음을 멈추었다. 운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무림대회에서 다시 만나자!”
승부를 내지 못한 것에 분한 사람은 팽자엽뿐만이 아니었다.
팽자엽은 돌아서서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운휘에게 물었다.
“어때? 비무는 만족스러웠어?”
“네.”
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
그날 일행은 팽가를 떠나 낙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운휘는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일행은 운휘의 요리를 맛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해!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유명 객잔에서 똑같은 요리를 시켜도 이런 맛은 안 날 거야!”
“신기하군. 저 손으로 이런 맛을 낼 줄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죽을래?”
남량은 일행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낮은 목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림맹에서 서로 강해지자고 했던 약속을, 다들 훌륭히 지켜 주었어.”
운휘가 히죽거리며 손을 들었다.
“위지혁은 전이랑 별로 다를 바가 없는데요?”
“……이놈이.”
아직 독인이 되었음을 일행에게 말하지 않은 그였다.
남량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 무림대회는 화산의 명예를 드높이고 우리의 명성을 떨치는 자리도 되겠지만,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겨루며 더욱 성장하는 기회가 될 거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임해라.”
“그래!”
일행은 저마다 뜨겁게 눈빛을 불태웠다.
‘남궁월. 이번에는 전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팽자엽.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승부를 가려보자고.’
‘당룡, 당호. 네놈들의 독공은 이제 나에게 통하지 않아!’
‘강호의 이름난 검객들이 참가하는 자리라……. 기대되는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화산의 검이 무림대회를 진동시킬 것이다.
“후우.”
남량은 홀로 공터에 도착했다.
널찍한 바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유독 하늘이 맑아 별이 많이 보였다.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환생 이후, 정말 쉼 없이도 달려왔다.
본신의 힘을 키우고 강호에 명성을 떨쳤으며, 마교의 계획을 저지하고 힘이 될 만한 젊은 재목들을 키워 냈다.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덤으로 강호의 구원자 역할까지 맡아 버렸지만…….’
문득 궁금했다.
대체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재수가 없으면 복수를 마치기 전 죽을 것이고, 재수가 좋으면 복수를 이루어 낼 것이다.
그럼 그 뒤에는?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교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나?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지만, 아직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대체 누구지?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야심만만한 천마, 위광인가.
아니면 화산파의 일대제자이자 매화검선의 제자인 백매화, 남량인가.
전생과 현생.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였다.
눈을 감고 있던 남량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남량의 말이 끝난 직후, 네 개의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찬야와 유라, 운휘와 위지혁이었다.
찬야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이것 참……. 최선을 다해서 숨은 건데. 역시 남 사제의 눈은 속일 수가 없네.”
“오밤중에 다 같이 산책이나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남량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유라는 검집에 손을 얹으며 덤덤히 말했다.
“비무를 청한다. 남량.”
“비무?”
“다시 한번 너와의 격차를 몸으로 실감하고 싶다.”
“…….”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딱 보니 너희들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군.”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남량이 입을 열었다.
“좋아.”
남량은 검을 쥐고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착지한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답답했는데, 몸이나 좀 풀어야겠다.”
유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우선 내가 먼저 싸우고 그다음으로 찬야…….”
“아니.”
유라의 말을 끊은 남량이 말했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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