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무림대회(武林大會)(5)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눈치를 챈 것일까? 남량은 이를 악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노리는 살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남량은 지체 없이 발검(拔劍)하여 검을 휘둘렀다.
채앵!
복면인은 단검을 들어 남량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남량은 복면인에게 다가가 그의 복면을 벗겼다.
얼굴이 드러나자 남량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복면인의 정체는 바로 흑영대의 조장, 암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를 만날 줄 몰랐던 남량은 당황하며 검을 내렸다. 암영은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남량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를 노리는 살수인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암영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자네는 이곳에 어쩐 일인가?”
“잠깐 술을 마시러 나왔습니다.”
남량은 떨어진 단검을 주워 암영에게 돌려주었다.
“암 조장께서는 이런 골목에 무슨 일로?”
암영은 단검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수상한 자들의 행적을 뒤쫓던 중이네.”
“수상한 자들?”
“요 근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낙양 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어서 말이야.”
암영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아직은 그들이 마교에서 보낸 자들인지, 아니면 다른 세력인지 알 수 없네. 그래서 내가 직접 조사를 나온 것이지.”
남량은 낭연청을 떠올렸다. 마교의 간부인 그녀가 이곳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나타났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놈들에 대한 단서는 발견했습니까?”
“놈들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한 군데 알아내는 데 성공했네. 지금 그곳을 조사해 볼 예정이야.”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날 남량과 같이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어 이 젊은 도사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자네가 같이 가 준다면 나야 든든하지.”
남량은 암영을 따라 이동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낙양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창고였다. 오래전에 버려진 듯 창고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바닥을 한번 보게.”
암영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작은 야명주(夜明珠)를 꺼내 바닥을 비추었다.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이 정도면 최소 다섯 명 이상이 다녀갔을 걸세.”
발자국을 추적하자 나무 상자 앞에서 멈추었다. 나무 상자를 치우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다.
남량과 암영은 시선을 교환했다.
“대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먼저 내려가 살펴보도록 하지.”
암영과 남량은 지하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두 사람은 기척을 숨긴 채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그때, 망토를 두르고 두건을 깊이 눌러쓴 두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복도 벽에 달라붙은 남량과 암영은 전음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두 명을 기습했다.
퍼퍽!
수도(手刀)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다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 숨겼다. 망토는 변장을 위해 빼앗아 입었다.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걷자, 이내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웅성웅성.
그곳에는 똑같이 망토를 두르고 두건을 쓴 자들이 백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암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건 대체……. 새로운 사교(邪敎)인가?
남량은 그곳에 모인 자들의 내력을 살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도 마공을 익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들은 마교의 교인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 남량의 눈에 비석 끝에 새겨진 괴상한 문양이 들어왔다. 남량은 저 문양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
암영이 전음을 보내왔다. 그러나 남량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 가고 있었다.
‘설마 이건…….’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이건 틀림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암영은 남량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남량. 무슨 일인가.
남량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전음을 보냈다.
-당장 막아야 합니다.
-뭐를 말인가?
-비석에 새겨진 문양. 저것은 마교의 금지된 비술(秘術)인 혈천마화대법(血天魔化大法)의 주술입니다.
-혈천마화대법?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마화대법은 고대의 사악한 주술 중 하나로, 죽은 자들의 시체를 부활시켜 진법 내 살아 있는 생명을 모조리 죽이게 만드는 술수입니다. 한번 발동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내부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으며, 외부에서도 침입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대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조건으로는 살아 있는 생명의 피가 대량으로 필요한데…….
암영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럼 여기 모인 자들이 전부?
-대법의 재료로 쓰일 재물들인 겁니다.
남량은 분노로 이를 부득 갈았다.
‘네놈들이 결국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지!’
혈천마화대법의 비술서는 남량이 금서(禁書)로 지정해 봉인한 책들 중 하나였다. 천음선녀의 소수마공과 마찬가지로 자칫 세상을 파멸로 이끌 무시무시한 술수이기 때문이다.
-놈들은 이전에도 무림맹을 박살 내기 위해 모략을 꾸민 적이 있습니다. 하필 무림대회가 열리는 시점을 노렸다면 놈들의 목적은 바로…….
남량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후기지수들이군.
그렇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은 대부분 다음 대(代)를 이어 무림의 동량이 될 세대였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죽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악독한 놈들.
암영은 치를 떨었다. 마교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진법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낙양의 절반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만약 진법이 발동한다면 낙양에는 지옥도가 펼쳐질 겁니다.
-지원을 기다릴 때가 아니네. 당장 무림맹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리고 무림대회도 즉각 중단해야 하고. 대주님과 양 총대주가 빠르게 대처할 것이야.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맹주님에게 알리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자네에게 말하는 것이 늦었네.
암영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맹주님은 지금 무림맹에 안 계신다네.
-네?
-이틀 전에 마교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을 알아냈네. 그래서 토벌을 위해 직접 그곳으로 가셨어.
남량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음을 삼켰다.
함정이다. 놈들은 고경홍의 힘을 두려워해 그를 진법의 바깥으로 유인한 것이다. 이제 무림맹 내에 그들을 지켜 줄 강한 힘을 가진 무인은 없다.
남량은 진심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효초아. 정말 제대로 준비했구나.’
애초에 남량에게는 불리한 싸움이었다. 놈들은 수년 전부터 중원에 암약하며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자신은 화산에서 새로운 육체를 단련하는 데에만 일 년을 넘게 허비했다. 그럼에도 놈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남량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서 가세. 시간이 없네!
남량과 암영은 즉시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남량과 암영은 각자 좌우로 몸을 날려 피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쥐새끼가 들어왔다. 헤헤. 쥐새끼가 들어왔어.”
창백한 피부에 비쩍 마른 체형. 양팔과 다리가 쇠사슬로 묶여 있고 손에는 장창(長槍)을 든 사내.
남량은 그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유회(劉灰).’
효초아의 심복인 칠령귀.
백귀(白鬼). 유회.
그놈이 진법을 지키고 있었다.
***
날이 밝자 참가자들은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시합장으로 나왔다.
“남 사제는? 방에도 없어?”
유라의 물음에 찬야는 고개를 저었다.
“어.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어젯밤부터 남량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어딜 간다고 언질이라도 주었을 텐데, 그날은 정말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위지혁이 표정을 찌푸렸다.
운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내가 찾아볼게. 어차피 탈락했으니까.”
“그래. 남 사제는 운휘에게 맡기고, 우린 시합에 집중하자.”
결국 시합장에는 찬야와 유라, 위지혁만이 출전했다. 관중들은 남량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뢰검은 탈락했으니까 그렇다 쳐도, 백매화는 어디 있지?”
“측간이라도 들른 거 아니야? 흐흐.”
“무공 고수라도 이건 어쩔 수 없구만. 하하하.”
세 번째 시합은 간단했다. 그저 시합장에 마련된 두 개의 비무대에서 참가자들끼리 대결을 펼치면 되는 것이었다.
매화오절 중에서는 위지혁이 처음으로 올라갔다. 그의 상대는 제갈세가의 제갈랑이었다.
제갈랑은 부채를 이용한 선법(煽法)을 익혔는데, 그 경지가 절정에 달한 실력자였다.
제갈랑과 위지혁의 대결은 매우 치열했다. 그러나 결국 제갈랑의 한 수로 인해 승리는 그에게 돌아갔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위지혁 도장.”
“저야말로 한 수 제대로 배웠습니다. 제갈 공자.”
비무대를 내려온 위지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건투를 빈다.”
다음은 찬야와 유라의 차례였다. 그들은 동시에 이름을 불려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양악은 두 사람의 상대가 될 참가자를 호명했다.
“청성파의 청랑! 그리고 남궁세가의 남궁월!”
찬야와 유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남북 십성의 후계자와 붙는 건가.’
‘드디어 남궁월과 비무대에서 대결을…….’
많은 이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청랑과 남궁월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청랑은 찬야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찬야 도장과 비무대 위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군요.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찬야는 강호에 퍼진 청랑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검으로는 무당의 진공, 남궁세가의 남궁월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 남북 십성 중 검제와 검성, 검선을 칭하던 삼검천(三劍天)의 계보를 잇는 검의 천재로 불리는 사내였다.
과연 그에게 자신의 검이 얼마나 통할 것인가.
찬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한편, 유라는 남궁월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투연회에서 그녀에게 당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의 남궁월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넘을 수 없는 벽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금은 오직 하나만 생각하자.
내가 가진 힘을 남김없이 이 자리에서 펼치는 거다.
지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스릉.
유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남궁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달라졌어.’
투연회에서 보았던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흘리던 어설픈 투기와 곳곳에 보이던 허점들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강해졌다는 건가.’
남궁월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거, 조금은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검을 뽑아 든 남궁월은 유라를 향해 예를 표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라 도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궁 여협.”
그들은 각자 기수식을 취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땡-.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네 명의 검사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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