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낙양혈사(落陽血史)(1)
남량과 운휘, 그리고 암영이 이끄는 흑영대가 진법의 핵을 찾아 파괴하기 위해 지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동안, 무림맹 칠검대와 후기지수들은 밀려드는 시체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총대주인 양악의 지시에 따라 다친 무인들과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후방으로 이송한 다음, 신속하게 방어진을 구축해 시체들을 막아 냈다.
“조금만 버텨라! 곧 맹주님께서 우릴 구원하러 오실 것이다!”
크게 소리친 양악이 손을 들었다.
“궁병대! 발사 준비!”
수백의 사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미리 화살촉에 불을 붙여 촉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양악은 밀려드는 시체들을 노려보며 신호를 보냈다.
“발사!”
슈슈슈슈슈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수백 대의 화살이 시체의 파도 속으로 떨어졌다. 불이 붙은 시체들은 괴성을 지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후기지수들, 특히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매화오절은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시체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남궁 여협. 우측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좌측은 그대에게 맡기겠어요.”
남궁월과 유라는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드는 시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여인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매화홍주검 18초, 무명업화(無名業火).”
“창궁비연검 18초, 청산녹수(靑山綠水).”
쇄애애애애액!
불길을 머금은 화검과 푸른 섬광을 번득이는 광검이 교차했다. 불덩어리와 섬광이 터져 나가며 주변의 시체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가히 폭발적인 위력이었다.
그러나 소모되는 내공의 양도 그만큼 컸다.
유라는 허리를 숙인 채 기침을 하는 남궁월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운기조식을 했는데 벌써 지치는 건가요?”
남궁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럴 리가요. 힘들면 먼저 들어가 쉬어도 됩니다.”
두 여인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휘릭. 파파파팟!
찬야는 검과 하나가 되어 미친 듯이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검의 잔상이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시체들이 잘려 나갔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시체 조각의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허억, 허억…….”
찬야는 입에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신검합일은 극도의 정신력을 요구한다.
신검합일의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심신에 가해지는 부담감도 그만큼 늘어났다.
찬야의 코에서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이미 한계를 넘어 신검합일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지만, 찬야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 18초, 경화수월(鏡花水月).”
후웅-.
찬야가 검을 휘두르자 무형(無形)의 참격이 쏘아져 나갔다.
반경 안에 있던 시체들은 모조리 허리가 잘려 나갔다.
직후, 하체의 힘이 풀리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결국 육체와 정신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또 시체들이 찬야를 향해 밀려들었다. 찬야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그곳에 돌풍이 몰아쳤다. 돌풍에 휘말린 시체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찬야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잡으세요.”
찬야가 고개를 돌리자, 지친 기색의 청년이 보였다.
“청랑 도장.”
찬야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나중에 제대로 대접할게요. 이건 비밀인데, 저희 집안에 돈이 좀 많거든요.”
“그거 기대되는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찬야는 청랑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파파파팟!
청랑은 바람처럼 검을 휘둘러 시체 두 구를 수십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그런 다음 반대쪽 손으로 장풍을 날려 다른 한 구를 박살 냈다.
청랑은 찬야와 등을 맞대며 물었다.
“찬야 도장. 검을 들 수 있겠습니까?”
찬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은 금방이라도 검을 놓칠 듯 위태로워 보였다.
“들 수 있겠냐고요?”
찬야는 도포 자락을 찢어 손에 검을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두 사내는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한편, 위지혁은 남궁월과 청랑을 제외한 나머지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팽 공자!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내공을 너무 소모하지 마시고 아껴 두시지요.”
“내 내공 운용이 진 도장만큼 섬세하지 못하오. 그러니 조금 이해해 주시오.”
“두 분은 힘들면 뒤로 빠져서 느긋하게 휴식이나 취하고 계십시오. 이곳은 저희 당씨 형제가 맡아도 충분합니다.”
“형님은 당연한 소리를 하시오! 내 독공이면 이 망할 시체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단 말이지!”
“종남파 검술의 정수를 겨우 시체들을 상대로 써야 하다니.”
그들은 서로 가볍게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일반 참가자 열 명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위지혁은 그런 그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도 저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지금 자신의 힘이 너무도 나약했다.
일순, 위지혁의 악력이 약해지며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서른 구가 넘는 시체들을 상대하며 체력이 다한 것이다.
그때 앞에서 달려오던 시체가 손을 뻗었다. 위기에 처한 위지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순간!
콰앙!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온 장풍이 시체의 얼굴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장풍을 날린 사람은 바로 당호였다.
그는 발로 떨어진 검을 차서 건네주며 버럭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나를 이긴 주제에 멍청하게 방심하다 당하지 말란 말이다!”
검을 받은 위지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진공이 나직이 말했다.
“위 도장은 옆에서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위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 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그래.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오직 후계자들을 보조하는 데에만 집중하자.’
위지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무림대회에 참가한 모든 참가자들, 무림맹의 대원들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려 가며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악이 간절히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 주게! 다들! 조금만 더!”
양악은 당장이라도 저들과 합류해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마저 전투에 합류하면 방어진을 지휘할 사람이 없어진다. 중심이 사라지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양악은 피눈물을 흘리며 냉정하게 전황을 살피며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훌륭한 지휘 덕분에 방어진은 더욱 견고해졌다.
비설은 희망에 찬 눈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면 두 시진 이상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설의 희망은 곧 예상치 못한 변수에 부딪혔다.
그 변수가 나타난 정소는 바로 위지혁이 있는 곳이었다.
“어디 망자들이 설치느냐!”
당호는 엄청난 기세로 독장(毒掌)을 퍼부으며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처리한 시체의 숫자도 벌써 백 구를 넘겼다.
당호가 방어진에서 조금씩 멀어지자 당룡이 주의를 주었다.
“당호!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거라!”
“형님! 그냥 이것들 전부 내 손으로 쓸어버리겠소!”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당호의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집채만 한 거구에 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사내였다.
‘뭐야 이놈은? 시체는 아닌 것 같은데…….’
사내의 거대한 체구에 압도당한 당호는 잠시 주춤거렸다.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에 있는 후계자는 다섯 명 정도인가. 조금 떨어진 곳에 두 명 정도 더 있는 것 같군. 백매화는 보이지 않는 않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당호는 독기를 한가득 끌어올리며 말했다.
“혹시 네놈이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냐?”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당호가 피식 웃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시체들만 상대하려니 따분하던 참이었는데, 잘되었군. 네놈을 붙잡아 맹주의 앞에 데려가면 내 명성도 그만큼 높아지겠지.”
마침 사내를 발견한 당룡이 다급히 소리쳤다.
“물러나라! 저 사내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당호는 이미 출수를 마친 뒤였다.
“독호장(毒虎掌)!”
콰아앙!
당호의 일장이 사내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독기가 삽시간에 사내의 전신을 뒤덮었다. 당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웅.
그러나 독기를 걷은 사내의 몸에는 작은 화상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당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내는 명치 부분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나이에 비해 제법 대단하긴 한데……. 하긴, 겨우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큰 걸 기대하면 안 되겠지.”
당호는 자신의 독기가 먹히지 않자 입을 쩍 벌렸다.
직후, 사내가 주먹을 들어 당호를 공격해 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당호는 저 주먹을 받아 내면 죽을 것임을 직감했다.
콰앙! 당호는 간신히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해 냈다.
사내는 눈에 이채를 띠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움직임이 제법이군. 그럼 이것도 한번 피해 보거라.”
사내는 무릎을 들어 당호의 얼굴을 노려 왔다.
당호는 다급히 팔에 내력을 둘러 막았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당호의 팔이 뒤틀렸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인 그가, 고작 한 번의 공격으로 양팔이 부러진 것이다! 당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당룡이 사내를 향해 비수를 날렸다.
투웅.
장풍을 날려 가볍게 비수를 튕겨 낸 사내가 말했다.
“우선 한 명.”
푸욱!
사내의 손이 당호의 명치를 뚫었다.
당룡을 비롯한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 그리고 위지혁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당호는 피를 울컥 내뱉으며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다 축 늘어졌다. 사내는 당호의 시체를 내던지며 말했다.
“내 이름은 태광(跆狂).”
사내의 전신에서 감춰 두었던 마기(魔氣)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효초아 님을 모시는 심복, 칠령귀의 일원인 흑귀(黑鬼)다.”
사내, 태광이 히죽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효초아 님의 명령을 받들어, 네놈들을 전부 죽이리라.”
***
남량과 운휘는 복도를 달려 비석이 있으리라 추측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석이 있는 공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석 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유회는 남량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왔구나! 잘 왔어. 안 그래도 내가 널 찾아갈까 고민했거든. 그런데 효초아 님이 이곳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하셔서……. 아무튼 다행이야. 태광. 그놈 혼자 재미 봐서 질투했는데 그동안 너랑 놀면 되니까.”
“……태광?”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태광이라면 칠령귀 중 여섯 번째 귀신인 흑귀 태광이 분명했다. 권법을 쓰며 마기로 신체를 강화하는 외공의 소유자였다.
‘그놈이 무림맹으로 향한 것인가.’
큰일이다.
지금 무림맹에 있는 자들 중에는 태광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그나마 총대주 양악이 있기는 하지만 그도 역부족일 것이다.
남량은 유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태광이라는 놈 말고 같이 온 동료는 없는 건가?”
운휘는 눈을 깜빡이며 남량을 쳐다보았다. 적이 그런 중요한 정보를 쉽게 말해 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량은 그가 순순히 대답할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나, 남량의 예상대로 유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칠령귀 중에 이곳에 온 건 나랑 태광이 전부야.”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칠령귀가 한 명만 더 왔어도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남량은 검을 뽑아 들며 운휘에게 말했다.
“운휘.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저놈을 쓰러뜨리고 그 뒤의 비석을 파괴하는 거야. 저자는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니 조심해라.”
“네. 형님.”
우우웅.
운휘의 전신에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남량은 폭혈기공의 능력을 끌어올려 신체 능력을 상승시켰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놈을 처리한다.’
두 사람의 기세가 강해지자 유회가 깔깔 웃어 댔다.
“좋아! 좋아! 덕분에 지루하지 않겠어! 전력을 다해 덤벼! 그래야 내가 조금은 이 축제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헤헤헤!”
남량이 차갑게 응수했다.
“목이 잘려도 똑같은 소리를 내뱉을 수 있을지 보자고.”
파파팟!
다음 순간, 남량과 운휘가 동시에 유회를 향해 쇄도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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