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홍룡표국(紅龍鏢局)(2)
고담은 남량을 홍룡표국 국주 장휴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남량은 장휴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화산파 매화검수 남량입니다.”
장휴는 반색하며 남량의 손을 잡았다.
“잘 오셨소. 정말 잘 오셨소.”
그는 남량에게 귀한 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내 솔직히 공월 진인께 청을 드리긴 했으나, 설마 화산파의 최정예인 매화검수를 보내 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남량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홍룡표국의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표행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장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든든하구려. 남 대협만 믿고 있겠소이다.”
장휴는 고담에게 남량이 묵을 객실을 안내하라 명했다.
복도를 걸으며, 고담은 남량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무인이라고? 이 사람이?’
외형만 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화려한 채의(彩衣) 차림에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
도사라기보단 귀공자가 더 어울리는 모습 아닌가.
‘딱히 신뢰가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믿어야겠지.’
먼 길을 함께 떠날 사이니 일부러라도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고담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큼큼. 남 대협.”
“말씀하십시오.”
“혹시 표행을 다닌 경험이 있으십니까?”
고담의 물음에 남량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럼 표행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것들이 있는 것도 모르시겠군요.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담이 웃으며 말했다.
“표행은 관도로만 다니지 않습니다. 험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신발이 해지는데 고쳐서 신을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머리를 단정히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혼자서 솥을 걸고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풍찬노숙을 자주 해서……. 그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다행이군요.”
“표행은 언제쯤 출발합니까?”
“출발 시일은 열흘 뒤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객실 앞에 도착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시종을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고담은 예를 표하고 객실을 나갔다.
남량은 겉옷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가.’
노골적으로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데 모를 리 없었다.
남량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화양검을 꺼냈다.
‘열흘이라. 그동안은 수련이나 하며 지내야겠군.’
남량은 깨끗한 천으로 검신을 닦기 시작했다.
***
화창한 오후, 홍룡표국의 연무장에서는 표사들의 수련이 한창이었다.
“하압! 하압!”
표사들은 상의를 벗은 채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홍룡표국의 표두(鏢頭) 왕보(王保)는 매와 같은 눈으로 표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번에는 방원진(防圓陳)으로 모인다. 움직여!”
왕보의 외침에 표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일순 왕보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그가 일갈했다.
“이봐! 둘째 줄 너! 다리 다쳤나? 거북이도 그것보단 빠르겠다! 정신 똑바로 차려!”
“죄, 죄송합니다!”
“네놈 실수로 한 사람의 목숨만 잃는 게 아니다. 명심해!”
“명심하겠습니다!”
중요한 표행을 앞두고 있는 지금, 총표두를 비롯한 표사들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힘든 수련이 끝나자 표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표사 한 명이 물을 마시던 왕보에게 물었다.
“왕 표두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정말 화산파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까?”
왕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른 표사들도 하나같이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도착했다는군.”
“오오오!”
표사들이 잔뜩 흥분해 소리를 질러 댔다.
명문 정파에서 파견된 사람이라면 분명 고수일 것이다. 무림 고수가 동행한다는 사실만으로 표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표두님은 그분을 뵌 적이 있습니까?”
다른 표사가 질문했다. 왕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직 본 적이 없다. 대행수께 들은 게 전부야.”
“보나마나 고상하고 훌륭한 풍채를 지니고 계실 테지요? 제가 두 해 전에 표행 도중 무당파의 도사분들을 뵌 적이 있었는데, 정말 신선이 따로 없었습니다. 하하.”
“……으음.”
순간 왕보의 표정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고담은 화산파 도사에 대해 분명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믿음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미색은 대단하더이다.’
이걸 솔직히 말해 줘야 하나?
왕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발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연무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백발에 도복을 입은 사내가 보였다.
‘체격을 보면 사내인데 멀리서 보면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미색이 출중하군. 가만, 미색이 출중하다고?’
왕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사내를 불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부인이십니까?”
사내, 남량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화산파에서 홍룡표국의 표행을 도우러 온 사람입니다.”
표사들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 귀공이 정말 화산파의 제자란 말입니까?”
왕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듣는 이에 따라서 상당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어조였다.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화산파 매화검수 남량이라고 합니다.”
남량의 말에 표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하고 고수의 기운이 흐르는 도인이었다. 그런데 설마 약관을 갓 넘긴 것처럼 보이는 젊은 제자 한 명만 보냈을 줄이야!
한 표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잔뜩 기대했는데…….”
만약 표사들이 매화검수 칭호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면 반응은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들 중 무림에 견식이 깊은 사람은 없었다.
“이……. 이놈들이!”
표사들의 무례한 태도에 왕보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여기 남량 도장님은 국주님께서 직접 초청하신 손님이시다! 정중히 예를 갖춰 대하지는 못할망정, 그따위 태도를 보이다니! 네놈들이 홍룡표국의 명성에 먹칠을 할 작정이더냐!”
표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왕보는 남량의 눈치를 살피며 예를 표했다.
“아랫것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남량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표행을 앞두고 다들 예민해져 있는 시기 아닙니까. 고수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새파랗게 어린 놈 한 명만 왔으니 실망할 법도 하지요.”
왕보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
“다만, 방금 전과 같은 태도를 두 번은 못 넘기겠군요.”
남량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성격이 좀 더러워서.”
순간 표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왕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몸으로 체감하는 편이 낫겠지요.”
남량은 차가운 눈으로 표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야 저 건방진 태도가 눈 녹듯 사라질 것 같군요.”
표사들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왕보에게 물었다.
“북해 표행에 참가하는 표사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총 백 명 정도입니다. 스무 명씩 다섯 조(組)로 나누어…….”
“전부 불러 주십시오.”
남량이 싸늘히 말했다.
“표사 백 명과 대련을 하겠습니다.”
“……!”
직후, 왕보를 비롯해 연무장에 있는 표사 스무 명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이 작자가 만용을 부리는 건가? 일류 표사들 백 명을 상대로 대련을 하겠다고?’
왕보는 표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듯했다. 그중에는 이를 부득 가는 자도 있었다.
한 표사가 남량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남량은 냉소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책임은 무슨……. 간단히 몸이나 좀 풀려는 거요.”
더는 좌시할 수 없었던 왕보가 끼어들었다.
“남량 도장. 아랫것들의 무례는 제가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대련은 없는 걸로 하시지요. 표행을 앞둔 시점에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생긴다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표사들의 신체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남량의 마지막 발언은 기름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았다.
표사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커지고 말았구나.’
왕보는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
“여기서부터는 산길을 타는 게 빠르겠군요.”
“네. 그럼 날짜를 이틀 정도 앞당길 수 있겠습니다.”
대행수 고담과 총표두 진표는 표행 경로를 논의 중에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다급히 말했다.
“행수 어르신! 지금 밖에 큰일이 났습니다요!”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인가?”
고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연무장에 표사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량 도장님과 대련을 할 생각인가 봅니다!”
“뭐라? 그게 무슨 소리냐?”
진표가 노기를 잔뜩 드러내며 소리쳤다.
“북해 표행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 하려고! 표두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게야!”
고담이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가 봅시다.”
두 사람은 다급히 연무장으로 향했다.
***
어느새 연무장에는 대략 육십 명에 달하는 표사가 모여 있었다. 나머지 사십 명은 외부에 있거나 대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연무장 중앙에 가만히 서 있던 남량은 표사들의 숫자를 세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육십 명밖에 안 왔군.’
왕보는 만일을 대비해 무기를 들지 않도록 지시했다.
표사들 중 한 명이 남량을 향해 물었다.
“정말 우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남량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남량은 조금 떨어져 있는 왕보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합시다.”
왕보는 큰 목소리로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파파팟!
가장 가까이 있던 일곱 명의 표사들이 남량을 향해 주먹과 발을 뻗어왔다.
때마침 고담과 진표가 연무장에 도착했다.
고담은 남량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어 외쳤다.
“그, 그만-!”
“이런 젠장!”
진표가 다급히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파아앙!
남량의 전신에서 기백이 끓어오르며 폭발하듯 주변으로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불어닥친 바람 때문에 고담은 눈을 질끈 감으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방금 뭐였지?’
한순간이었지만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멈추는 것처럼 오싹했다.
팔을 내리며 천천히 눈을 뜬 고담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육십 명이 되는 표사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옆에 있던 진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살기를 날려 표사들을 기절시킨 것 같습니다.”
“네? 세상에 그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진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왕보는 경외에 찬 시선으로 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저 사내는……. 우리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있었어.’
기백을 갈무리한 남량은 쓰러진 표사들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전부 죽여 버렸을 텐데……. 운 좋은 줄 알아라.”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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