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북해의 암운(3)
지붕 위로 올라간 은왕은 쓰러져 있는 남량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남량 도장!”
은왕은 남량을 똑바로 눕힌 다음,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랫배의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대고 내기를 주입하자 남량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마기가 침투했구나. 큰일이다.’
은왕이 이를 악물었다.
‘남량 도장의 내력이 매우 정순해 마기에 대항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낫게 하려면…….’
바로 그때, 눈을 뜬 남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오! 정신이 들었는가.”
남량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놈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마기의 정수가 몸에 박히는 바람에……. 아무래도 소림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은왕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와 같은 생각을……. 마기에 당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마기를 치료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군.’
마(魔)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상극인 성(聖)의 기운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가의 법력(法力)이라면 남량의 몸 안에 침투한 마기를 몰아낼 수 있을 터였다.
“도력……. 도력을 사용해 마기를 억제하고는 있지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은왕께서 저를 소림으로…….”
은왕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 반드시 자네를 살릴 것이야. 그러니 조금만 참고 견디게나. 금방 소림에 데려다줄 터이니.”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은왕은 남량을 업은 채 지붕을 내려왔다.
남량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겼다. 드디어 혼자만의 힘으로 칠령귀를 쓰러뜨렸다.
매화천수검의 비기, 연화세계를 터득함으로써 비로소 마교의 간부와 능히 대적할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효초아. 탄영. 지월. 아직 놈들에게 닿으려면 멀었지만, 당장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은왕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실로 대단한 사내로구나. 남량. 마교의 간부를 상대로 정말 이길 줄이야. 남북 십성 외에도 간부를 상대로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무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전쟁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환술에서 벗어난 빙제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모여든 부족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땅으로 돌려보냈다.
전쟁을 막고자 간언을 올리다 맞아 죽은 대신들은, 빙제가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렇게 북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남량 일행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빙제는 빙궁을 구해 준 답례로 크게 대접을 하고 싶어 했지만, 남량의 상태가 위중해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는 빙궁을 나서는 일행을 배웅했다.
“이번 일로 마교가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 알게 되었다.”
빙제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마가 있을 때에는 그래도 정도를 지킬 줄 아는 듯했는데, 그가 죽자 이런 간악한 모략을 서슴없이 행하는구나. 이놈들이 더 설치게 놔두었다간 필시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야.”
빙제는 은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들것에 실려 있는 남량을 응시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해 그동안 중원 무림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놈들은 감히 내 사람들마저 위험에 빠트리려고 했다. 더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대인…….”
“빙궁의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거라. 이곳의 용사들을 전부 이끌고 너희들을 도우러 갈 테니.”
“저, 정말입니까?”
은왕과 남량은 크게 기뻐했다.
빙제 본인은 남북 십성에 준하는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북해의 용사들은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들이 도와준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빙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다. 너희들은 북해를 구해 준 은인이자 나의 형제다.”
은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교의 계획을 막아 내고 칠령귀의 일원을 죽인 데다 새외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빙궁의 협력까지 얻어 내다니, 정말 큰 성과를 거두었구나.’
일행은 빙제와 인사를 마치고 그곳을 떠났다.
빙제는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나의 형제들이여!”
남량은 들것에 실린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볼 수 있겠군. 그 녀석들…….”
네 사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남량은 미소를 지었다.
안휘성 합비(合肥) 남궁세가.
유라는 연무장에서 남궁월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한창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유라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자, 남궁월이 물었다.
“어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죠?”
고개를 돌린 유라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백매향이 나서요.”
“백매향이요? 지금은 매화가 필 계절이 아닌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뭐에 홀린 건가…….”
중얼거린 유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남 사제……. 지금쯤 북해에 있으려나.’
남궁월은 유라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고 말했다.
“아아. 이제 알겠군요. 백매향은 먼 길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환각이었네요.”
유라는 당황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 연인이라니! 대체 누가 연인이라는 겁니까!”
“실수. 정정할게요. 연인이 아니라 편련(片戀:짝사랑)이었지?”
“편련도 아닙니다! 내가 남 사제를 왜…….”
“하하하! 농이에요, 하여간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어느새 친자매처럼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을 남궁천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월아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남궁월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성격. 그리고 신분 때문이었다.
남궁월은 검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무(武)를 숭상했다.
당연히 평범한 여자아이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런 남궁월에게 유라는 유일한 벗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대하기를 잘했어.’
남궁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유라는 그를 발견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다시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자.”
“네!”
유라는 힘차게 대답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 사제.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다.’
호북성 무당산(武當山).
찬야는 무당파 장문인 태화 진인의 밑에서 수련 중에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고 있던 찬야는 가볍게 코를 골았다.
빠악!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태화 진인이 말했다.
“누가 명상 도중에 잠을 자라고 했느냐.”
바위에서 굴러떨어진 찬야는 질질 흐르는 침을 닦으며 히죽 웃었다.
“죄송합니다. 며칠째 명상만 하다 보니…….”
“지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니라.”
태화 진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찬야는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배고픈데 밥은 좀 먹고 할 수 있을까요?”
태화 진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른 건지 모르겠구나.”
옆에서 명상을 하던 진공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찬야 도장이 온 이후로 스승님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군. 저런 인간적인 면이…….’
빠악! 그의 뒤통수에도 어김없이 스승의 손이 날아왔다.
하북성 안평(安平) 팽가.
운휘는 팽자엽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휘는 등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짊어진 채였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팽자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운휘 도장.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요? 배고픈데.”
“익숙한 냄새가 나서. 그리운 냄새가.”
백매향이라. 정말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기분이 좋아진 운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팽자엽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고기를 다 드실지도 모르니 이만 갑시다.”
“그래.”
“그리고 저녁에는 운휘 도장이 만들어 준 요리가 먹고 싶군요.”
“먹고 싶으면 날 이기든가! 하하하!”
두 사람은 웃으며 산을 내려갔다.
사천성 성도(成都). 당가.
마당에 서 있던 위지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후우.”
반듯한 자세로 허공에 대고 검을 찌르는 동작을 취했다.
직후, 검끝에서 옥색의 독기(毒氣)가 흘러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당지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를 발현하는 건 익숙해졌구나.”
“네. 스승님.”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위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왕의 독공을 익힌 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때, 전서구 한 마리가 당지황의 어깨에 착지했다.
당지황은 편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감탄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허! 정말 믿을 수 없군. 칠령귀를 이겼단 말인가?”
위지혁이 귀를 쫑긋하며 당지황에게 물었다.
“남북 십성이 칠령귀를 또 쓰러뜨리신 겁니까? 희보로군요.”
“후후. 듣고 놀라지나 말거라. 칠령귀를 쓰러뜨린 건 남북 십성이 아니다. 바로 네놈의 사제인 남량이니라.”
깜짝 놀란 위지혁이 외쳤다.
“저, 정말입니까? 남 사제가……. 칠령귀를요?”
“그래. 북해에서 수작을 부리던 칠령귀 한 놈을 단신으로 처리했다고 하는군. 대단하지 않으냐? 이걸로 녀석은 남북 십성을 제외하고 이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임이 증명된 것이다.”
위지혁은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 사제……. 더 강해졌구나. 존경스럽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당지황에게 말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당장 수련에 임하겠습니다. 스승님.”
당지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의 성장에 자극을 받는 건 좋은 일이지. 좋다.”
남량이 칠령귀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 받은 사람이 더 있었다.
***
어두운 대전 안에는 효초아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심기가 많이 불편한 듯 표정을 찌푸린 채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령귀가 또 당했다.”
효초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운이 없었을 뿐이야. 북해빙궁을 움직이는 내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어.”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럼 무림맹 간자를 이용해 맹주를 쳐 내려는 계획과 낙양에 혈사를 일으켜 후기지수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이 무너진 것도 전부 운이 없어서인가? 효초아. 마교 제일의 모략가라는 네 명성이 울겠군.”
“그 입 다물어. 탄영.”
효초아가 이를 갈았다. 잠시 침묵하던 사내가 말했다.
“효초아. 너는 당분간 조용히 있도록 해.”
효초아가 벌떡 일어났다.
“뭐? 지금 장난해? 내 수하를 셋이나 잃었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적어도 남량, 그 새끼는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말겠어.”
“남량을 죽이는 일은 탄영에게 맡긴다.”
“누구 맘대로! 지월! 나에게 명령하지 마라!”
콰아앙!
효초아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음기(陰氣)가 터져 나왔다.
그가 어둠 속을 향해 강력한 뇌전을 날리려 할 때였다.
쩌엉! 거대한 힘이 효초아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커억!”
효초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딛고 선 바닥이 움푹 파였다.
‘빌어먹을! 복마신공(伏魔神功)의 경지가 언제 이렇게…….’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다. 더 이상의 항명은 용납하지 않겠다.”
사내의 인기척이 사라짐과 동시에 몸을 짓누르는 압박도 사라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효초아에게, 여인이 말했다.
“지월에게 감사해. 내가 그였으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여인의 인기척마저 사라지자, 효초아가 괴성을 터뜨렸다.
“으아아! 이 개자식들! 언젠가는 네놈들도 전부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다!”
고개를 든 그의 두 눈이 음흉하게 번들거렸다.
“그래……. 멀지 않았어. ‘수라의 심장’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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