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수라의 심장(5)
남량은 꿈속에서 거대한 괴물의 형상을 보았다.
괴물은 사슬에 묶인 채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것이 수라의 본질인가. 가만 놔두면 큰일 나겠군. 어떡하지?’
남량이 수라를 잠재울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너, 몸속에 이상한 걸 끌고 왔군.
등 뒤에서 환한 빛줄기가 쏟아지며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룡.’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충격이 덜했다.
황룡은 어쩐지 불편한 기색이었다.
-내가 힘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저급한 것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냐?
“……조금 억울한데.”
-흥. 네놈의 욕망이 이놈을 부른 것이니 손을 벌린 것과 다름없다.
그럼 여의주의 힘을 좀 나눠 줄 것이지.
남량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네 힘으로 수라를 억누를 수 있을까? 이놈이 나를 삼키려 들면 곤란해서.”
남량이 수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룡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버릇을 고쳐 줄 생각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다니…….
황룡이 한 번 포효하자, 마치 사자후(獅子吼)가 머리에서 터지는 듯한 충격이 들었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크윽!’
남량은 귀를 막은 채 신음을 내뱉었다.
수라는 황룡의 기세에 밀려 금세 조용해졌다.
남량은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과연, 황룡의 기운은 그 무시무시한 수라마저 굴복하게 만드는군.’
황룡이 말했다.
-한 가지 명심해라. 내가 놈을 억누를 수 있지만 그건 네가 저것을 받아들지 않았을 때다. 만약 네 의지로 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땐 나도 저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명심하지.”
-그럼 이만 가거라.
화악-! 일순 눈앞이 밝아졌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대머리였다.
남량과 눈을 마주친 홍선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시주! 정신이 드십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시주마저 괴물로 변해 버리면 어떡하나 정말 걱정하고 있었는데…….”
“미안한데 입 좀 다물어라. 머리 울린다.”
남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수라동 지하였다.
남량의 곁으로 다가온 방월 대사가 말했다.
“수라의 힘은 일단 잠재운 것 같군. 다행일세.”
남량은 아랫배를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도움을 받고서 고맙다는 말도 못했군.’
그런데 홍선의 표정이 이상하게 어두워 보였다.
‘내 안의 수라가 다시 폭주할까 염려하는 거로군.’
남량은 홍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 안에는 수라의 힘을 막을 특별한 힘이 있으니까. 폭주할 일은 없을 거다.”
“저기……. 그게 아니라. 드릴 말씀이…….”
홍선은 말하기를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는 방월 대사를 힐끗 쳐다본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주. 급히 전해야 될 소식이 있습니다.”
“무슨 소식이지?”
“이틀 전, 마교의 간부들이 태산(泰山), 형산(衡山), 항산(恒山)을 습격해 수라의 심장을 탈취해 갔다고 합니다. 그곳을 지키던 태산파. 형산파. 항산파 등의 문파들은 전부 괴멸당했다고 하고요.”
남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수라의 심장은 숭산 한 곳에 있는 게 아니다. 효초아는 심장 전부를 모으는 것이 목적이야. 숭산, 태산, 형산, 항산으로 칠령귀를 보냈다면 남은 곳은 설마!’
홍선은 남량의 생각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놈들이 지금 화산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교의 간부들이 전부?”
남량이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화산이 위험하다. 남북 십성은, 남북 십성은 뭐 하고 있지?”
대답은 방월 대사가 대신했다.
“무림맹주와 종남의 도군, 청성의 용제가 지금 그리로 향하고 있다네.”
남량이 흥분해서 외쳤다.
“저도 당장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왜 화산을 구하러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는지 정녕 모르겠는가?”
방월 대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게. 자네는 지금 심장의 일부나 다름없고, 놈들은 심장을 모아 완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자네가 그곳에 간다는 건 놈들을 도와주는 꼴이란 말이네!”
“그래도 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발끈해서 소리치던 남량이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유우화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방월 대사는 남량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침착하게.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나 자네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아닐세. 남북 십성 세 명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들을 믿고 기다리게. 반드시 그들이 화산을 구해 줄 것이네.”
“……가야 합니다. 저는 가야 합니다.”
남량의 전신에서 서늘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비키십시오. 대사.”
방월 대사 또한 서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경고일세. 내가 자네를 힘으로 제압하게 만들지 마시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먹구름이 진 것을 보니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군.”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우화가 어깨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비가 올 줄 알았으면 국수를 삶을 걸 그랬네요.”
그릇에 탕을 뜨던 운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는 팽가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보통 국수를 먹나?”
마찬가지로 당가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위지혁이 젓가락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비가 오면 국수가 생각나서. 찬야랑 유라는?”
“유라는 장문인을 뵈러 상궁으로 갔고. 찬야는 장로님을 뵈러 원로원으로 갔다.”
“밥 다 먹고 대련 한 번 할래?”
“잔뜩 두들겨 맞을 텐데, 괜찮겠냐?”
“이 새끼가 독왕한테 독공 좀 배웠다고 아주 자신만만하네. 좋아! 대련에서 진 사람이 열흘 간 부하 노릇 하기다!”
“그 말 후회하지 마라.”
유우화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둘이 사이가 아주 좋구나.’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북쪽 하늘을 응시했다.
‘량이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서신이라도 좀 보내지. 매정한 녀석 같으니.’
그때였다. 운휘와 위지혁이 동시에 검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유우화의 앞을 보호하듯 막으며 한 곳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유우화의 물음에, 운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런 기운이 왜 화산에서…….”
“도장님. 일단 도관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말하는 위지혁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운휘는 그동안 도제의 밑에서 수련하며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건 독왕의 독공을 전수받은 지혁이도 마찬가지. 헌데 이 두 사람을 떨게 만들 정도의 실력자란 말인가?’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마당으로 누군가 걸어왔다.
멋들어진 도포 차림에 소선(素扇:부채)을 든 중년인이었다.
그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구신가. 천마에게 당한 매화검선 아니신가. 폐인이 되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후후.”
“네놈이었구나. 관로(管路).”
유우화가 신음을 흘렸다.
칠령귀의 풍귀(風鬼). 관로.
인자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주인을 닮아 교활하고 잔혹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마교의 간부가 화산에 발을 들이다니.”
“언젠가는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아직도 15년 전에 두들겨 맞았던 일을 기억하는 거냐?”
“두들겨 맞아? 효초아 님께서 방해하시지만 않았다면 네놈은 내 손에 죽었어!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다고!”
“효초아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관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오늘 네놈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서 그때의 모욕감을 씻어 낼 것이다. 각오해라.”
촤앙! 검을 뽑아 든 위지혁이 서늘한 눈으로 경고했다.
“유 도장님께 가려면 나를 먼저 넘어야 할 것이다.”
똑같이 검을 빼 들고 나선 운휘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엄청 쪼잔한 놈일세. 15년 전이면 한참도 더 지난 일인데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냐? 그리고, 멍청한 새끼야. 생각을 좀 해 봐라. 니가 이길 줄 알았으면 효초아가 왜 방해했겠냐?”
관로가 눈을 부릅떴다.
“어디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나를 방해하느냐?”
“벌레? 허어……. 참. 벌레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줘야겠네.”
헛웃음을 흘린 운휘가 유우화에게 속삭였다.
“도장님.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몸을 피하세요.”
“……알겠다. 부디 조심하거라.”
무공도 쓰지 못하는 자신이 있어 봐야 방해만 될 뿐이었다. 유우화는 절뚝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기가 충만한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위쪽도 습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관로는 멀어지는 유우화를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잡아 죽이고 싶지만……. 여기 두 놈이 초절정의 경지인 게 걸린단 말이지.’
그는 부채로 운휘와 위지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다경. 그 안에 네놈들을 갈가리 찢어 주마.”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갑자기 칠령귀랑 싸우게 될 줄이야.”
“집중해라.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당한다.”
그들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
그 시각, 원로원(元老院) 대전.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한 찬야가 중얼거렸다.
“아아. 빌어먹을.”
등 뒤에는 장로들이 검상을 입은 채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찬야는 고개를 들어 홍의(紅衣) 차림의 검사를 향해 말했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일 장로 노백과 둘이서 차를 마시던 중, 습격을 받았다.
갑자기 나타난 홍의의 사내는, 무시무시한 검술로 장로들을 하나씩 참살하기 시작했다.
장로들이 모두 검상을 입고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결국 찬야가 나섰다.
그러나 장로들의 합공마저 부수는 자를 상대로, 찬야가 이길 리 만무했다.
‘제길. 어째 십 초(招)도 버티지를 못하나? 이래서는 그동안 죽어라 수련해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보람이 없다고.’
일 장로 노백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찬야. 너라도 여기서 도망치거라.”
찬야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멋지게 이길게요.”
“이놈아. 할아버지는 괜찮으니까 어서…….”
“절대 그렇게는 못해요. 죄송해요.”
찬야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그래. 이왕 죽는 거 어디 한 군데는 반드시 베고 죽는다.’
그가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각오를 다진 순간이었다.
대전 안으로 새하얀 장포를 펄럭이며 매화검수들이 도착했다.
찬야는 그들을 본 순간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소리쳤다.
“너무 늦었다고요! 사숙들! 이러다 다 죽는 줄 알았네!”
매화검수들은 순식간에 사내를 포위하고 검을 겨누었다.
매화검수 이화정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마휘란.”
찬야는 깜짝 놀라 사내를 응시했다.
‘마휘란? 마휘란이라면 분명…….’
칠령귀의 검귀(劍鬼) 마휘란. 바로 그였다.
‘어쩐지. 그래서 한쪽 눈을 감고 있었구나.’
마휘란은 이화정을 알아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팔이 주제에……. 아직도 검을 잡고 있었나.”
“팔 한쪽이 없다고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럼 나머지 팔도 마저 잘라 주마.”
이화정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네놈 남은 한쪽 눈이나 조심해라. 오늘 내가 가져갈 테니까.”
***
상궁 대전에서 명상을 하고 있던 구양중이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일이 터졌다.”
“네?”
그의 옆에서 똑같이 명상을 하던 유라가 말했다.
구양중은 즉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상궁의 문을 열고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유라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피비린내…….”
이윽고 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흑의 차림에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그는 손에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들었는데, 칼날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화산은 생각보다 방비가 허술하더이다. 허허.”
구양중은 낮은 목소리로 유라에게 말했다.
“이자는 내가 쓰러뜨릴 것이다. 유라. 너는 어서 도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유라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다.”
구양중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향해 말했다.
“마기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네놈, 마교의 간부로구나.”
“인사드리겠소. 효초아 님을 모시는 장공(張共)이라고 하오.”
칠령귀의 도귀(刀鬼). 장공.
가장 먼저 효초아의 수하가 된 인물이자 칠령귀 중 가장 강한 마인(魔人).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화산파를 지워 버리기 위해 왔소이다. 잘 부탁드리오.”
마교의 급습으로 시작된 화산 전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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