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남만의 침략자들(2)
한편, 운휘와 전투를 시작한 창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장기는 창을 던져 적을 맞추는 투창이었다.
던지는 족족 명중하는 것은 물론, 창 한 자루에 담긴 위력은 초절정 고수의 호신강기를 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
‘저 괴물은 뭐야! 뭔데 내 창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멀쩡한 거냐고!’
쩡! 쩌엉!
운휘는 양팔을 교차한 채 날아드는 창을 막아 내며 전진했다.
1년간의 폐관 수련을 거치며, 그의 신체는 예전보다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수하를 불러 두 자루 창을 받아 든 창왕이 남만 무공의 비술을 꺼내 들었다.
그가 손에 든 창에 힘을 주자,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열화창(熱火槍). 극양(極陽)의 기운을 창에 담아 던지는 이 기술은, 목표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놈 몸이 아무리 단단해도 이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투콱-! 열화창을 던진 창왕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운휘는 날아오는 창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과연 그럴까?”
운휘는 황금빛 기운을 양손에 집중해 내밀었다.
쩌엉! 굉음이 울리며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운휘는 한 손으로는 창대를, 다른 한 손으로 창끝을 붙잡은 채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으윽. 손바닥 다 벗겨졌네.”
회심의 일격이 막히자, 창왕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은 것이다.
운휘는 도망치는 창왕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지.”
파팟! 몸을 날린 운휘가 순식간에 창왕의 앞으로 도달했다.
창왕은 이를 악물고 운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카앙! 검을 휘둘러 창을 튕겨 낸 운휘가 눈을 번득였다.
“이걸로 끝이다.”
푸욱! 차가운 칼날이 창왕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울컥 피를 토한 창왕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운휘. 너를 죽인 사람의 이름이다. 잘 새겨 둬.”
검을 회수하는 운휘에게, 청랑이 달려왔다.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창왕을 손쉽게 쓰러뜨릴 줄이야……. 정말 대단하군요.”
“하하. 그런가?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뒷머리를 긁적인 운휘가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위지혁이 싸우는 모양이네. 어서 가자.”
“운휘 도장. 저도 돕겠습니다.”
청랑의 말에 운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우러 가는 거 아닌데? 내가 먼저 사천왕을 쓰러뜨렸다고 자랑하러 가는 거야.”
“그, 그렇군요.”
“그놈 성격에 분명 열 좀 받을 거다. 하하하!”
운휘는 웃음을 터뜨리며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천왕의 각왕은 바람처럼 쇄도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슈융!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발끝이 위지혁의 안면을 노렸다.
위지혁은 허리를 굽혀 각왕의 공격을 피해 냄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허벅지를 베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찬 각왕이 위지혁의 턱을 올려 찼다.
위지혁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각왕의 어깨를 베었다.
운휘와 청랑이 전장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청랑은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좋지 않군.’
위지혁이 각왕에게 입힌 상처는 대부분 경상인 반면.
각왕은 무서운 기세로 위지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쇄액! 각왕이 뻗은 발차기가 위지혁의 콧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각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각왕은 몸을 빙글 돌리며 위지혁의 어깨를 걷어찼다.
퍼억! 뒤로 날아간 위지혁이 바닥을 구르며 중심을 잡았다.
청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가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지켜보던 운휘가 피식 웃었다.
“가세? 그럴 필요 없어.”
“이대로 있다간 위지혁 도장이 위험합니다.”
“청랑은 지금 승세를 잡은 쪽이 누구라고 생각해?”
“네? 그야 당연히…….”
말하던 청랑은 각왕의 상태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각왕이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그가 갑자기? 청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독공(毒功)…….’
청랑은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남북 십성의 독왕(毒王). 그의 무공을 전수받은 인물이 바로 위지혁이라는 것을.
‘위지혁 도장이 각왕에게 입힌 검상. 그곳으로 독이 침투하고 있었던 건가.’
운휘는 위지혁을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신체 능력만 따지고 보면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하지만 솔직히 저 독공은 상대할 자신이 없단 말이지…….’
위지혁은 검을 늘어뜨린 채 각왕에게 다가갔다.
“크윽!”
신음을 뱉은 각왕이 위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 도사의 몸으로 독을 사용하다니…….”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썩은 악취가 풍겨 나왔다.
위지혁은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얼마든지 비난해라. 대신, 네놈 목숨은 내가 가져간다.”
위지혁은 말을 마치자마자 검을 들어 각왕의 목을 베었다.
“야, 위지혁!”
고개를 돌린 위지혁이 운휘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운휘,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냐?”
“조금 전부터. 네가 제일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이리로 왔지.”
“……독 종류를 시험해 본 거다. 나도 금방 끝낼 수 있었어.”
“웃기고 있네. 각왕한테 걷어차인 어깨는 안 부서졌냐?”
청랑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구나. 이분들을 따라가려면.’
유라는 권왕을 시종일관 압도하고 있었다.
쩡! 쩌엉!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정없이 검을 내리쳤다.
반면, 그녀의 검격을 막는 권왕의 표정은 점점 달아올랐다.
검을 휘감은 불꽃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이 내가, 야수문의 권왕이 고작 계집 따위에게 밀리다니!’
후웅! 권왕은 팔을 한쪽 버릴 각오로 주먹을 내질렀다.
유라는 칼등으로 권격을 막음과 동시에, 무릎을 차올렸다.
콰득! 무릎이 명치에 틀어박히며 권왕이 신음을 토했다.
“크윽! 이 빌어먹을 계집이!”
분노한 권왕이 괴성을 지르며 권강을 방출했다. 유라는 즉시 방어 초식을 전개해 권강을 막아 냈다.
쩌엉! 묵직한 충격에 유라의 몸이 흔들렸다.
기회를 잡은 권왕은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다.
쩡! 쩌엉! 유라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세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한 차례, 공격을 쏟아 낸 권왕은 유라와 눈을 마주치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헉!’
유라의 기세에 눌린 권왕이 아주 잠깐, 틈을 보였다.
기회를 잡은 유라는 이빨을 드러내며 쇄도했다.
그녀는 매화홍주검 18초식, 비두출화로 검을 내질렀다.
쩌엉!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낸 권왕이 반격을 준비할 때였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발견하고 나직이 욕을 내뱉었다.
“이런 개 같은…….”
화르륵!
거대한 불꽃의 용이 유라의 검을 휘감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매화홍주검 22초식, 화룡멸참(火龍滅斬)이었다.
화룡은 입을 쩍 벌린 채 권왕을 집어삼켰다.
권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불길 속에서 타 죽었다.
멀리서 구경하던 찬야, 운휘, 위지혁이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불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한데? 하하.”
“아무리 금강불괴라도 저건 못 막겠다.”
“실력 발휘 한번 제대로 하는군.”
사천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용제와 철타의 귀에도 들어갔다.
‘해냈구나. 매화오절.’
용제 유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철타는 표정을 굳혔다. 그가 유선에게 물었다.
“네놈. 그새 강한 고수를 데려온 모양이군.”
유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있다. 내 실력으로 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철타는 무기를 내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졌다. 여기서 내 목을 취하는 것으로 부디 문도들만큼은 멀쩡히 남만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바란다.”
“그럴 수는 없다. 네놈들은 죄 없는 백성들을 여럿 해치고 약탈을 일삼았어. 순순히 항복했으니 살려 주겠다만, 포박해 관군에게 데려갈 것이다. 황법에 의거해 처벌받아라.”
“알겠다.”
유선은 철타의 무공을 폐한 다음 국경 수비대의 손에 넘겼다.
매화오절이 사천왕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소식을 전해 들은 공월 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게 해냈구나. 수고했다.”
그는 다음 임무가 담긴 서신을 전서구에 달아 보냈다.
이번에는 운남의 어떤 사교(邪敎)를 조사하라는 임무였다.
서신을 받은 매화오절은 곧장 운남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유선은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청성으로 데려가 크게 대접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부디 몸조심하게.”
청랑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장님들.”
마주 포권을 한 매화오절은 말을 몰아 멀어졌다.
유선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대들은 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왔음을 증명하는가.’
***
매화오절이 새 임무를 받아 운남으로 떠난 지 이틀 뒤.
이화정은 공월 진인과 정자 위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바둑을 두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늘 같았다.
“효초아가 죽었으니 이제 탄영과 지월이 나서겠군요. 장문인.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까요?”
이화정의 물음에 공월 진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탄영은 효초아와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니 그가 했던 것처럼 전략을 세울 가능성이 높다. 지월은 드러난 정보가 거의 없는 자이니 행동을 예측할 수 없고…….”
탁. 돌을 놓은 이화정이 말했다.
“효초아와 칠령귀가 죽음으로써 놈들의 전력이 약화된 것이 다행입니다. 이전에는 전면전이라도 걸어오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남북 십성이 버티고 있는 한, 전면전을 걸면 자신들도 큰 피해를 입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 순간, 폐관 쪽에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이화정이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나왔군요. 차기 남북 십성으로 불리는 사내가.”
두 사람은 남량을 맞이하기 위해 폐관으로 향했다.
입구를 막은 돌문이 열리며, 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계셨군요. 장문인. 이화정 사숙.”
이화정은 남량을 마주하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 묘하게 달랐다. 수라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일까?
공월 진인이 남량에게 물었다.
“폐관으로 들어간 목적은 이룬 것이냐?”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의 힘은 이제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나머지 녀석들은 나왔습니까?”
이화정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한참 전에 나왔지. 나오자마자 남만의 이민족들을 막아 내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지금은 새 임무를 받아 운남으로 내려가는 중이고.”
“그렇군요.”
“네 사형제들을 만나러 가겠느냐?”
남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들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빨리 보고 싶군요.”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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