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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58화 (완결) (158/164)

<158화>

황성 전투(8)

남량은 여의주가 부서지며 일어난 폭발에 휩쓸렸다.

눈을 뜬 그는 자신이 어딘지 모를 새하얀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죽은 것인가.’

멍하니 서 있던 그의 앞에, 붉은 관복(官服)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염라. 지옥을 다스리는 그가 남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국 세상을 지켜 냈군.”

잠시 침묵하던 남량이 염라에게 물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나? 내가 이길 거라는 사실을?”

염라는 고개를 저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난 그저 너에게서 작은 가능성을 봤을 뿐이야.”

남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난 어디로 가는 거지?”

“무슨 말이냐.”

“내가 죽어서 당신이 데리러 온 것 아닌가?”

남량은 주변을 돌아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저승 가는 길 풍경이 별로야.”

“원한다면 바꿔 줄 수도 있다.”

염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쉬익! 두 사람은 어느새 노을이 지는 해안가에 서 있었다. 남량이 중얼거렸다.

“훨씬 낫군.”

염라는 남량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잠깐 걸을까?”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해안가를 걸었다. 문득 염라가 물었다.

“두 번째 인생은 어땠나? 소감을 듣고 싶은데.”

“첫 번째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했지.”

남량이 노을을 응시하며 말했다.

“남보다 못한 아버지 대신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같았던 스승님. 서로 목숨을 노리는 후계자들 대신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동문들. 누군가를 짓밟고 정상에 올라서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는 싸움. 그리고……. 날 배신한 수하들 대신 내 곁을 지켜 준 동료들이 있었어.”

“즐거운 여정이었나?”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지.”

그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찬야. 유라. 운휘. 위지혁. 그리고 유우화.

너희들을 만난 것만으로 환생을 한 의미가 있었다.

‘마도세계의 문을 닫은 건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잘 살아라.’

이 말을 전해 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이제 기나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구나.’

해안가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저승으로 가는 입구이리라.

남량은 걸음을 멈추고 염라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나에게 기회를 줘서.”

남량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그때, 염라가 그를 불렀다.

“남량.”

남량은 멈칫했다. 염라가 자신을 ‘위광’이 아닌 ‘남량’으로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넌 항상 이런 삶을 꿈꿔 왔지. 이건 내가 주는 작은 선물이다.”

염라는 남량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문이 열리고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헉!”

남량은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그렇다면 여긴……. 저승이 아니야?’

남량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때, 운휘와 찬야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누, 눈을 떴다! 남 사제가 눈을 떴어!”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형님이 허무하게 죽을 리 없다고 했잖아!”

위지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망할 놈. 사형들을 걱정시키다니…….”

유라는 남량의 손을 꽉 잡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맙다. 남 사제. 살아 줘서 정말 고마워.”

“너희들…….”

남량은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염라여. 그대가 나를 이곳으로 돌려보낸 것인가?’

아무래도 꿈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다.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자. 화산으로.”

***

황성 전투가 끝난 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운 덕분에 무림은 평화를 되찾았다.

황태자 민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 남북 십성을 불러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그대들 덕분에 이 나라와 백성들을 지킬 수 있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려면 어떤 상을 내려도 부족할 터. 원하는 것이 있느냐? 짐이 뭐든 들어줄 것이다.”

남궁천이 모두를 대표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신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민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라. 그것이 무림의 본질이라고 했던가? 그럼 언제든 이 나라가 위험을 받으면 그대들이 나타나겠군.”

남북 십성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것참 든든하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린 민이 남량을 쳐다보며 말했다.

“언제든 궁으로 오거라. 같이 차나 한잔하자.”

궁을 나서며, 남량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성 전투가 끝난 이후로, 몸 안에 있던 수라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량이 마도세계에 들어간 그때 빠져나갔을 것이라 짐작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무림맹은 새롭게 재건되었다. 고경홍의 뒤를 이어, 남궁천이 무림맹주 자리에 올랐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은 가끔 화산을 찾아와 대련을 요청했다.

운휘는 남궁천으로부터 무림맹의 대주직을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으나, 남량이 그를 설득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하도록 해. 그럼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결국 대주 자리에 오른 운휘는 왜구를 토벌하거나 남만인들의 침략을 막는 등 활약하며 명성을 높였다.

위지혁은 운휘와 마찬가지로 무림맹의 대주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대신, 흑영대가 되어 암중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무림의 수호에 헌신했다.

찬야는 낭인회의 낭인들처럼 홀로 전국을 돌며 협행에 나섰다.

그는 가끔 화산으로 전서구를 보냈는데…….

“서신의 내용이 온통 여자에 관한 것뿐이군. 하하.”

“이 망할 놈이 화산 망신을……. 당장 끌고 와라!”

결국 분노한 공월 진인이 찬야를 강제로 불러들인 적도 있었다.

유라는 화산에 남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정성을 쏟았다. 뛰어난 실력과 외모, 인품으로 많은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공월 진인은 이화정에게 장문인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화정은 유라를 다음 대 장문인으로 내정한 듯했다.

남량은 폐허가 된 마교의 옛 터로 가서 지월과 탄영, 효초아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거리가 멀어 매년은 못 와도, 생각날 때마다 오마. 비록 날 배신했으나, 대가를 치렀으니 그곳에서는 편히 쉬어라.”

십만대산을 내려오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맑군.’

남량은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終章>

마교대전 당시. 호남성 상덕(常德).

“유우화! 진정해라! 혼자 가서 뭘 어쩌겠다는 말이냐!!”

“놈이 동정호에 혼자 있다는 개방의 정보를 못 들었습니까? 삼천위와 간부가 없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상대는 천마다! 너 혼자서는 당해 낼 수 없어!”

유우화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구양중을 향해 외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놈들의 손에 의해 죽어 나갔습니까?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놈을 쓰러뜨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월인비를 펼치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위광! 기다려라. 내가 가고 있으니!’

유우화는 이를 악물고 천마가 기다리는 동정호로 날아갔다.

늦은 밤. 흑룡포(黑龍袍)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뒷짐을 진 채 동정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슈웅! 유우화는 백발을 휘날리며 그의 앞에 착지했다.

고개를 돌린 중년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왔군. 너라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위광.”

그때, 위광의 옆으로 검은 장포를 입은 지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우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함정이었던 건가?’

지월이 유우화를 향해 말했다.

“이쪽에서 거짓 정보를 흘린 거다. 멍청한 거지 놈들은 속을 거라고 확신했지. 매화검선. 오늘이 네놈의 마지막 날이다.”

지월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위광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추게 했다.

“목숨을 걸고 단신으로 찾아온 자다. 내가 상대할 것이니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라.”

“교주님…….”

지월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위광이 흑룡포를 펄럭이며 유우화에게 다가갔다.

“매화검선. 비록 무예의 경지는 검성과 명왕에 미치지 못하나 너의 기개만큼은 남북 십성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거 영광이군.”

쩌어엉!

위광이 일으킨 천마신공의 기운과 유우화의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잠시 유우화를 노려보던 위광이 말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어쩐지 너와는 깊은 인연으로 엮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아니. 너와 나의 인연은 오늘로써 끝이다. 각오해라!”

유우화는 기합을 내지르며 매화천수검의 첫 초식을 쏟아 냈다.

“으아악!”

유우화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연화검을 부수고 그의 혈맥을 끊은 위광은 피가 흐르는 손을 슬쩍 쳐다본 다음 말했다.

“훌륭한 솜씨였다. 너의 그 검술과 경공술 모두.”

수도(手刀)를 세워 그의 숨통을 끊으려던 위광이 일순 멈칫했다.

‘이상하군. 놈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 어째서지?’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 유우화는 쓰러진 채 소리쳤다.

“어딜 가느냐 위광! 내게 치욕을 안겨 줄 셈인가!”

위광은 오른손 약지에 낀, 마교의 기물인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동정호를 떠났다. 유우화는 분노에 차 괴성을 질렀다.

***

유우화가 남량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3개월째 되던 날.

그 무렵 유우화는 남량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겉모습은 같지만 영혼은 다른 이의 것이었다.

성격이나 말투. 혹은 사소한 버릇 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다른 누군가 남량의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우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남량이 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스승님.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남량은 능숙하게 저녁상을 차렸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매화천수검의 6초식 화운용무는 매화홍주검의 정수를 담은 초식이니 부드러움보다는 강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또한 9초식인 천류신화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정수를 담은 초식이니 속도와 변화를…….”

말하던 도중, 남량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위광이었을 적의 버릇이 아직은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 행동을 목격한 유우화는 숨이 막힐 듯 놀랐다.

남량의 모습에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 까닭이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스승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남량의 물음에, 유우화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탁자 아래로 내린 그의 손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날 밤. 잠든 남량을 두고 밖으로 나온 유우화는 복잡한 표정으로 달을 응시했다.

‘내가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자가 살아 있을 리 없건만.’

남량이 한 행동은 분명 반지를 끼고 있거나 끼었던 자들이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화산은 장신구의 착용을 금지한다. 남량은 분명 반지를 낀 적이 없었다.

유우화는 한숨을 내쉬며 도관을 응시했다.

‘만약 저자가 위광이라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내가 적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던 유우화는 마음을 정했다.

믿어 보자.

그 아이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완결>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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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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