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스승과 제자
늦은 밤, 무림맹 총대주는 풍운검대 대주 운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호남 지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최근 사파 조직 하나가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야. 운휘 대주. 자네가 부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내려가 놈들을 소탕하도록.”
듣고 있던 운휘가 말했다.
“호남 지부장이라면 맹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데……. 놈들의 저력이 상당한 모양이군요.”
“여기, 흑영대에서 보내온 정보다.”
운휘는 총대주가 내민 종이 뭉치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적봉문(赤鳳門)’이라는 이름의 문파로, 생긴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신생 문파였다.
그런데도 호남 일대에서 제법 세를 떨칠 정도로 성장했다.
아무래도 놈들을 이끄는 수장의 수완이 상당한 듯했다.
“어디 보자. 수장의 이름이……. 원웅(院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네.”
“마교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이름을 날린 노괴(老怪)다. 전대 무림맹주가 전국의 사파 조직을 토벌할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숨었지. 이자를 상대할 때는 조심해.”
운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전대의 고수라. 얼마나 강할지 기대되는군요.”
드륵. 운휘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부장 섭준(燮俊)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을 전해 들은 그가 말했다.
“이번 임무는 쉽지 않겠군요.”
“오랜만에 제대로 싸워 보겠어. 내일 바로 출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둬.”
“알겠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온 운휘는 원웅에 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법, 권법, 각법 등 다양한 무공을 익혔군. 주로 사용하는 무공은…….’
그때, 창문 너머로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문파에서 제자들이라도 보낸 건가.
‘좋을 때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운휘는 미소를 지으며 한쪽 벽에 걸린 그림을 응시했다.
매화오절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저 때에 머무르고 있는 듯했다. 매일 가슴이 뛰던 그 시절에.
‘아, 갑자기 다들 보고 싶다. 임무 끝나면 잠깐 화산에 다녀올까?’
***
운휘가 이끄는 풍운검대는 곧장 적봉문의 본진을 들이쳤다.
콰앙! 문을 부순 은휘는 선두에 서서 달려 나가며 외쳤다.
“항복하는 자는 생포하고, 저항하는 자는 죽여라!”
“존명!”
적봉문의 문도들이 무기를 들고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무림맹 놈들. 겁도 없이 쳐들어오다니!”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운휘는 달려드는 적들을 응시하며 섭준에게 말했다.
“원웅은 건물 안쪽에 있을 거야. 먼저 갈 테니 이곳을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적봉문도 다섯 명이 몸을 날리며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흥. 길 막지 말고 비켜라. 졸개들아.”
운휘는 공격을 어깨로 받아 낸 다음, 칠절매화검의 절초를 펼쳤다.
싸늘한 검광이 한 차례 번쩍이자 적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머지 문도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검을 맨몸으로 받아 내?”
섭준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금강검왕(金剛劍王)이 우리와 함께한다! 가자!”
“우와아아아아!”
기세가 오른 풍운검대 대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직후, 문도 한 명이 놀라 외쳤다.
“금강검왕? 그럼 선두에 선 저 사내가 화산야차(華山夜叉) 운휘?!”
금강검왕이라는 별호는, 운휘가 금강명왕을 펼친 모습을 보고 대원들이 붙인 별호였다.
반면 적들은 운휘의 무시무시한 무위에 치를 떨며 ‘화산야차’라는 별명을 붙였다.
“화산야차라. 그 별명 오랜만이군.”
피식 웃은 운휘는 적들 사이로 뛰어들어 한바탕 날뛰기 시작했다.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운휘를 상대할 수 있는 문도는 아무도 없었다.
쩡! 쩌엉! 운휘는 적들을 가볍게 날려 보내며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흐음.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가 대전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쇄애액! 바람을 가르며 권기(拳氣)가 날아들었다.
“기습인가.”
코웃음을 친 운휘가 검을 들어 권격을 막아 냈다. 그런데 생각보다 위력이 묵직했다.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난 운휘는 고개를 들어 권기를 날린 사내를 응시했다.
검은 피풍의를 두른 사내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네가 원웅이냐?”
“그래, 내가 원웅이다. 실력 한번 제법인 놈이구나.”
“계속 숨어서 살 것이지, 죽기 전에 무림 정복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무림 정복이라. 그것도 좋겠지.”
우웅. 원웅의 전신에서 검붉은 살기가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람을 가르며 쇄도한 원웅이 운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운휘는 칠절매화검의 초식을 펼치며 주먹을 막아 내려 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운휘가 당황해 소리쳤다.
“뭐야. 몸이 왜……!”
설마 그새 환술을 건 것인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쩌엉! 원웅의 권격이 운휘의 명치에 작렬했다. 운휘가 신음을 토했다.
“크윽!”
원웅은 휘청거리는 운휘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분명 권격이 제대로 들어갔을 텐데……. 금강불괴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군.’
원웅은 내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창과 방패의 대결인가. 좋다. 어디 해보자.”
퍽! 퍼억! 원웅의 주먹이 운휘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운휘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원웅의 공격을 받아냈다.
한참 동안 주먹을 날린 원웅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걸 버텨 낸다고? 괴물 같은 놈!’
수십 년 동안 은거한 전대의 고수는 알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가 어떤 자들을 상대로 싸우며 강해졌는지.
남북 십성. 마교의 간부들.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된 자.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몸을 단련한 운휘였다.
“이건 막지 못할 것이다. 죽어라!”
자존심이 상한 원웅은 이를 악물고 자신이 가진 최강의 절기를 발했다.
쩌엉! 다음 순간, 원웅의 주먹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고개를 든 원웅은 자신의 주먹을 막은 거대한 환영을 보고 입을 벌렸다.
“어?”
금강불괴의 비술. 금강명왕을 펼친 운휘가 목을 풀며 말했다.
“환술을 푸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이제는 내가 반격할 차례다.”
콰직! 운휘가 검을 휘두르자, 원웅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악!”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 주도록 하지. 잘 가라.”
콰아아앙! 명왕의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원웅은 한 줌의 핏물로 변했다.
“후우.”
숨을 내쉬며 기운을 거둔 운휘가 몸을 돌려 대전을 나갔다.
원웅이 죽자, 전의를 상실한 적봉문도들은 일제히 항복했다.
잔당들을 포박하라 지시한 섭준이 운휘에게 다가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주님.”
“너도 수고했어. 포박한 잔당들을 호남 지부장에게 인계하고 나면 푹 쉬자고.”
섭준의 어깨를 툭 치고 건물을 나가던 운휘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아이?’
살아남은 문도 중에 어린 남자아이 한 명이 섞여 있었다.
순간 운휘는, 그 아이에게서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주님?”
섭준이 멍하니 서 있는 운휘를 불렀다.
운휘는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이야. 너는 어쩌다 여기 들어오게 된 거냐?”
소년은 공허한 눈을 들어 운휘를 바라보았다.
“배고파서요. 들어오면 먹을 걸 준다고 해서.”
“부모님은?”
“절 버리고 도망쳤어요.”
“……그랬구나. 나랑 똑같네.”
소년이 물었다.
“똑같다고요?”
“응. 아저씨도 어릴 적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떠돌다 흑사파라는 곳에 들었거든.”
운휘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많이 외롭고 힘들지?”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랑 같이 가자.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이 말은 그의 스승이었던 화성 진인이 해 준 말과 비슷했다.
-도사님이랑 같이 가자꾸나. 거긴 너에게 가족이 되어 줄 사람들이 있단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운휘가 스승의 입장이 되어 어릴 적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래서 인연은 돌고 돈다는 것일까.
소년은 잠시 망설이다 운휘에게 물었다.
“그곳에 가면 더는 외롭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 거긴 좋은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아저씨가 네 곁에 항상 있을 거야.”
운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개도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내 이름은 운휘. 화산의 도사다. 너는?”
소녀는 운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한승.”
운휘는 한승을 일으키며 물었다.
“승아. 배고프지 않아?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 아저씨가 얼굴은 험악하게 생겼는데 요리는 잘하거든. 웃기지? 하하하.”
무림맹으로 돌아온 운휘는 곧장 총대주를 찾아갔다.
“대주직 그만두겠습니다.”
“뭐?”
“화산으로 돌아가려고요.”
총대주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임무 잘 수행하고 돌아와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가?”
운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제자가 생겼거든요.”
***
풍운검대 대주 자리에서 물러난 운휘는 홀가분한 몸이 되어 한승과 함께 화산으로 향했다.
운휘는 가는 동안 한승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해 주었다.
화성 진인이 죽고 난 뒤로 힘들어했던 날들.
그러나 남량을 만나 그를 따르게 된 순간.
동료들과 강호로 나가 경험했던 것들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한승이 말했다.
“화산은 좋은 곳인 것 같아요.”
“너도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운휘는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
화산파에 도착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남량과 유라, 위지혁, 찬야, 그리고 남서향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하하. 마중까지 나오다니, 이거 감동인데?”
“난 낮잠 자다가 서향이한테 끌려 나온 거다.”
찬야는 코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퍼억!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남량이 웃으며 말했다.
“잘 돌아왔다. 운휘.”
“오랜만입니다. 형님.”
위지혁은 내심 운휘가 부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도 이참에 흑영대 그만둘까.”
“그러든가.”
옆에 있던 유라가 말했다.
도도도도-.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온 서향이 운휘의 품에 안겼다.
“운휘 숙부! 보고 싶었어요!”
“서향아! 녀석, 그새 많이 컸구나.”
서향은 손가락으로 한승을 가리켰다.
“숙부. 이 녀석이 숙부 제자인가요?”
“그래.”
서향이 한승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반가워! 난 남서향. 앞으로 남 사저라고 불러.”
움찔한 한승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한승이라고 합니다.”
서향이 어색하게 서 있는 한승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내가 화산 구경시켜 줄게. 숙부! 잠깐 데려갈게요!”
“그래. 부탁한다.”
운휘는 한승의 등을 밀며 말했다.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야. 화산파에 온 걸 환영한다. 한승.”
서향은 한승의 팔을 잡고 먼저 가 버렸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운휘는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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