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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62화 (162/164)

외전 4화

용서

남량과 유라가 혼례식을 올린 다음 날.

위지혁은 이른 아침 도관을 나섰다.

남량은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너무 일찍 돌아가는 거 아니냐?”

“미안. 흑영대 일이 바빠서.”

위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행복해 보이더라. 너랑 유라.”

“부러우면 너도 연인을 만들어.”

“흑영대는 연인 만드는 거 금지야. 간다.”

산길을 내려오던 위지혁은 화산 초입에서 낯익은 얼굴의 사내와 마주쳤다.

사내는 바로 유계성의 아들, 유안이었다.

그를 보자 위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유계성과 관련된 자들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위지혁은 싸늘한 눈으로 유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평생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무슨 일이지?”

유안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형님을 뵈러 왔습니다.”

“누가 네 형님이냐.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죄송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전하고 꺼져라. 어차피 귀담아 듣지도 않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위지혁은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차갑게 대꾸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냥 알려 드리려 왔습니다. 그럼.”

유안은 고개를 숙인 다음, 뒤돌아 그 자리를 떠났다.

위지혁은 한참을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림맹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마음이 심란한 탓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조언을 받기 위해 무림맹 부총관으로 있는 제갈랑을 찾아갔다.

‘현명한 분이니 분명 답을 내려 줄 것이다.’

위지혁은 곧장 제갈랑을 찾았다.

그는 차 한 잔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랑이 입을 열었다.

“망부(亡父:죽은 아버지)를 뵙고 오시지요.”

“그자는 더 이상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감정도, 전할 말도 없습니다.”

“그럼 마음이 심란할 이유도 없겠지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위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드륵. 방을 나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혁아. 위지혁. 너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다음 날, 휴가를 받은 위지혁은 말을 몰아 섬서성 유림으로 향했다.

***

유안은 유계성의 저택 마당에서 홀로 곰방대를 피우고 있었다.

팟. 위지혁이 갑자기 나타나자 유안은 깜짝 놀라며 곰방대를 떨어뜨렸다.

위지혁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계성은 어디에 묻었지?”

“저. 저택 뒷산에 묻었습니다.”

“조용히 안내해라. 시끄럽게 굴 생각은 없으니까.”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위지혁을 무덤으로 안내했다.

유계성의 무덤 앞에 선 위지혁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직전까지도 당신에게 할 말을 찾지 못했어. 할 말은 그때 다 했으니까.”

그때란, 그가 남량과 함께 임무를 받고 왔을 때를 말했다.

“내가 여기 온 건, 당신에게 남은 증오 어린 감정을 마저 쏟아 보내기 위함이야.”

어떤 방식을 택할지 오는 내내 생각했다.

욕이라도 질릴 때까지 퍼부어 줄까.

아니면 유가의 장원을 모조리 박살 내 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자식을 불구로 만들까.

고심 끝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하지.”

용서. 그것만이 그에게 향한 증오 어린 감정을 모두 벗어던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젊은 시절의 그였다면 용서란 결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의 그는 많은 경험을 겪으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층 성장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유안이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생각했다.

‘형님은 정말 강한 사람이군요.’

위지혁은 가져온 술을 무덤에 부었다. 잠시 눈을 감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됐어. 이제 정말 끝났어.”

몸을 돌려 무덤가를 벗어나는 위지혁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층 후련해져 있었다.

유림을 벗어나며,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사실 이전까지는 여인을 만나는 데 있어 어떤 망설임 같은 것이 있었다.

유계성을 증오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량과 유라를 보면서, 유계성을 용서하게 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이루는 행복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운휘 녀석한테 소개를 부탁해 볼까. 아, 흑영대는 어떡하지?’

***

1달 뒤. 낙양의 한 객잔.

위지혁은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한 곳에 앉아 있었다.

운휘에게 소개를 받은 여성을 만나는 자리였다.

‘풍운검대의 대원 중 한 명이라고 했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무인이니 활기찬 분위기의 여장부일까? 아니면 양갓집 규수처럼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릴 때였다.

한 여인이 위지혁이 있는 자리로 걸어왔다.

단정한 옷차림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위지혁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풍운검대 2조 조장인 동향(東香)이라고 합니다.”

침착하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위지혁은 예를 받으며 말했다.

“위지혁이오. 만나서 반갑소. 앉으시오.”

동향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위지혁은 미리 준비해 둔 다음 대사를 꺼냈다.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여긴 내가 자주 오는 곳인데, 숙수의 요리 솜씨가 퍽 훌륭하다오.”

음식을 먹는 동안, 위지혁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던 중, 갑자기 동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혁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방금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었소?”

“죄송합니다. 위 도장님의 손을 보고는 그만.”

“내 손?”

시선을 내린 위지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멍청한 놈! 긴장해서 손이 떨리는 것도 모르고!

당황하는 그를, 동향은 지그시 쳐다보았다.

처음 운휘에게 소개를 제안받았을 때, 그녀는 궁금해서 물었다.

‘위 도장님은 맹에서도 인기가 아주 많은 분인데, 저같이 평범한 여인이 어울릴까요?’

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녀석에게는 네가 가장 잘 어울려.’

‘어째서죠?’

‘너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잖아.’

동향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지혁은 여인을 대하는 데 있어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그걸 빼면,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진중하고 겸손한 사내임을 짧은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위지혁에게 호감이 생긴 동향은 자신의 재주를 펼쳐 그와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며 위지혁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어느새 위지혁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노을이 지는 길을 걷던 도중, 그가 용기 내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소.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소?”

동향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 뒤로 두 사람은 몇 번을 더 만났고,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반년 뒤, 위지혁은 동향에게 청혼했다.

“동향. 나와 혼인해 주시오. 당신을 평생 사랑하고 존중하겠소.”

동향은 크게 기뻐하며 청혼을 받아들였고, 보름 뒤 두 사람은 혼례식을 올렸다.

혼례식에 참석한 찬야와 운휘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 자식.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알지?”

“멍청한 녀석. 스스로 지옥굴에 들어가다니. 쯧쯧.”

“그걸 축하 인사라고 하는 거냐, 네놈들은?”

출산이 임박해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유라는 서신으로 축하 인사를 대신했다.

남량은 위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 흑영대는 연인 만드는 거 금지라고?”

“그 규칙 나 때문에 깨졌대. 하하.”

피식 웃은 남량은 위지혁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위지혁.”

“고맙다. 남 사제.”

펑! 펑! 사방에서 폭죽이 터졌다. 찬야와 운휘가 큰 목소리로 환호했다.

동향과 손을 잡은 위지혁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

1년 뒤, 임무에서 돌아온 위지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자, 동향이 하얀 이불로 감싼 아이를 들고 있었다.

동향은 위지혁을 향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왔어요? 조금 늦었네.”

“최대한 달려왔소.”

천천히 다가간 위지혁이 동향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떻소?”

“괜찮아요. 그보다 우리 아기 얼굴 좀 봐요. 아들이에요.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동향으로부터 아기를 건네받은 위지혁은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물었다.

“동향.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겠소?”

“네?”

“내가 이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겠소?”

동향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요. 당신은 분명 좋은 아버지가 될 거예요.”

“흑. 으흑.”

위지혁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동향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울지 말고. 아이 이름을 정해야죠.”

위지혁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健)이라는 이름은 어떻소?”

“튼튼하게 잘 자라 달라는 뜻인가요?”

“그런 의미도 있지만, 내 스승님의 이름을 딴 거요.”

위지혁은 아이와 동향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동향. 당신의 말대로 나는 이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오.”

출산 소식을 듣고 찾아온 운휘는 문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말했다.

위지혁.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

그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무림학관.

무술을 가르치는 교관은 관생들을 향해 물었다.

“각자 존경하는 무인의 이름을 말해 보겠느냐?”

누군가는 오래전 장삼봉이나 달마의 이름을.

또 누군가는 명왕 고경홍이나 검황 남량의 이름을 말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교관은 한 소년을 향해 물었다.

“위건. 너는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

위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저의 아버지이신 위지혁 도장님이십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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