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27화
제8장. 첫 포대전술훈련(2)
돼지기름이라 불리는 위장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예비역은 둘째치고, 현역들조차도 위장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데에 많은 거부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목을 포함해서 손등, 심지어 귓속까지 위장크림으로 도배를 하라니.
찝찝함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필두의 명령이었기에 차마 면전에서 불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소진언은 말년병장 아닌가. 괜히 말년에 문제 일으켰다가 영창이라도 가는 날에는 지옥보다 더한 체험을 겪게 될지도 몰랐다.
전역날이 다가오기까지 달력에 하루하루 X자 표시로 체크하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군 복무 기간까지 늘어나게 된다면 자살 충동까지 들 것이다.
이번 한 번만 참으면 된다.
딱 한 번만 참자!
그런 결심이 소진언을 움직이게 했다.
위장크림을 꺼냄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목과 손등에 덕지덕지 위장크림 덩어리를 바르기 시작하는 소진언.
말년병장이 솔선수범을 보이는데, 밑의 부하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얼굴에는 잔뜩 싫은 기색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소진언이 먼저 저렇게 행동하는데 안 하겠다고 버티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살색의 피부 위에 기름진 위장크림이 덧붙여질 때마다 피부 트러블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지닌 채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위장크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외출 나갔을 때 사재라도 사올걸!’
후회라는 감정이 소진언뿐만 아니라 하나포 인원들 전부를 덮쳤다.
한편, 포상 안의 인원들이 위장크림을 바르는 동안 필두의 시선이 포상 바깥의 호에서 사주경계를 취하고 있는 문나정과 전도혁에게 향했다.
“너희도 발라라. 한 명씩 번갈아가면서. 한 명은 사주경계 취하고, 다른 한 명은 위장크림 바르고 알겠냐.”
“아, 알겠습니다!”
“즉시 바르겠습니다!”
경계 근무를 서는 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 * *
“…….”
“…….”
소진언과 김조항, 그리고 기타 하나포 분과에 소속된 병력들이 일렬로 나란히 마주 섰다.
이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필두가 이내 만족스러움을 표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합격.”
“감사합니다!”
한 명 한 명씩 면밀하게 위장 여부를 살핀 필두가 마지막 차례인 소진언에게 다가갔다.
살색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위장 실력을 뽐낸 소진언.
그의 모습에 강필두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시키면 잘하는데 왜 스스로 안 하냐.”
“하, 하하…….”
“여튼 합격이다. 제자리로 가서 볼일들 봐라.”
“예, 알겠습니다!”
이로서 하나포는 클리어했다.
다음 목적지는 둘포.
이미 소문이 퍼진 탓일까. 포상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이 마치 필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르르 달려 나와 일렬로 마주 섰다.
“충성!”
“뭐냐, 니들. 왜 그러고 서 있어.”
“행보관님께서 위장크림 검사한다고 들어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녀석들, 눈치는 더럽게 빠르구먼.”
그래도 오히려 이런 게 좋았다. 필두가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위장 똑바로 안 하냐!’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척척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인까지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하나포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세심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확인을 마친 필두.
“좋다. 가서 일들 봐라.”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곧 오신다고 하니까 그때 경례 똑바로 하고. 모기 마냥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면…… 알아서 해라.”
“거, 걱정 붙들어 매시지 말입니다! 목소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그래, 바로 그 억양, 그 톤이다. 계속 유지하도록.”
“예! 알겠습니다아!”
패기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형상화시킨 듯한 모습이었다.
둘포에 이어 삼포, 넷포, 다섯포, 마지막으로 여섯포까지.
전포는 이미 한 번씩 다 순찰을 마쳤다.
소문이 퍼진 덕분에 사실 필두가 이래라저래라 신경 쓸 만한 요지는 별로 없었다.
“어디 보자. 그럼 다음은…….”
전포의 포상 순찰이 끝났다고 멋대로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중요한 곳이 두 군데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 곳은 탄약고 초소.
그리고 다른 안 곳은 사격지휘통제실이다.
탄약고 초소는 산 정상에 있다. 그 중간에 사격지휘통제실이 있기에 순서상으로도 사격지휘통제실부터 먼저 들리는 게 옳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곳은 워낙 은폐할 만한 수납공간이 많아, 병사들이 어떠한 물건들을 숨겨놓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 힘들다.
만약에 그것이 대대장의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포대전술훈련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엎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병사들 몰래 사격지휘통제실을 급습한다!
그것이 필두의 계획이었다.
막사 뒤쪽으로 나온 필두가 산으로 올라가기 전의 입구에 들어섰다.
이윽고 마나를 움직여 자신의 두 발에 집중시켰다.
발걸음 소리를 차단해 주는 마법을 건 것이다.
사격지휘통제실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 있는 나무 계단. 그 계단을 밟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 덕분에 자신의 방문 사실 여부가 들통 날지도 몰랐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법까지 발동을 시킨 것이다.
나무 계단에 접어들었음에도 소리 하나 제대로 나지 않았다.
심지어 몸집 작은 고양이나 강아지가 올라서도 소리가 나는 나무 계단인데도 말이다.
이게 마법의 힘이었다.
병사들이 꿈도 꾸지 못할 마법의 힘. 그것을 설마 필두가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아마 같은 간부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거의 나무 계단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무렵.
안쪽에서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며 안에 있는 병사들의 정체를 빠르게 파악해내는 필두였다.
‘류태만과 한지철, 그리고 나전구인가.’
류태만은 사격지휘분과, 소위 말해서 FDC의 분대장을 맡은 병장이다.
소진언과 같은 동기이며, 그 역시 포대전술훈련 뒤 두 달 후에 전역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지철은 류태만이 소속되어 있는 FDC 분과의 일병. 그리고 나전구는 두 사람과 다르게 통신분과에 소속되어 있는 상병이다.
도합 세 사람이 사격지휘통제실에 있는 것으로 판별되었다.
간부는 없는 듯했다.
하기야. 포대장과 전포대장은 대대장이 온다는 소식에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부사관들 역시 마찬가지.
행정반을 책임지고 있는 통제관과 통신반장도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였다.
간부가 없는 밀실 공간.
‘더더욱 구린내가 나는군.’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최대한 빠르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필두의 모습에 세 명의 병사가 기겁을 했다.
“추추추추충성!”
얼떨결에 거수경례를 하는 류태만.
그러던 순간.
그의 발밑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필두를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그 무언가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필두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물건의 정체는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 * *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
그 순간, 한지철이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척을 선보였다.
“우왓……!”
어색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누가 봐도 연기였다.
설마 필두가 그것조차 분간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했단 말인가.
한지철이 필두의 시선을 본인에게 집중시킨 동안, 나전구가 빠르게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자신의 건빵 주머니 안쪽으로 넣었다.
완벽한 콤비 플레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이미 필두의 시야에 검은색의 스마트폰이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는 약삭빠르군.’
평소에도 이런 우수힌 팀플레이를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필두였지만,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처음 드리무어가 9090대대 제1포대 병력들의 모습을 접했을 당시에 여긴 군대도 아니라는 욕 같은 것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욕을 먹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분명 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활약 덕분에 필두는 아슬아슬하게 스마트폰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필두는 모든 정황을 다 목격한 이후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들에게 쓴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이 순찰을 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기행을 못 본 척하고 넘길 의도 없다.
“괜찮나.”
넘어지는 척 연기를 했던 한지철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한지철이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아픔을 연기하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됐다. 그보다 근무 잘 서고 있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조금 있다가 암구호 바뀔 예정이니까 잘 기록해 둬라. 병력들하고 행정반한테 암구호 바뀐 거 전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암구호는 100% 물어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
“저희만 믿으시면 됩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대에 몰래 반입한 스마트폰으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던 주제에 이들의 표정에는 가식이 잔뜩 깃들여져 있었다.
사격지휘통제실을 나서는 필두.
류태만이 대표로 배웅을 나갈 때, 필두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훈련 끝나고 너희 셋은 행보관실로 따로 집합한다. 알아둬라.”
“……?”
“대답은?”
“……네! 알겠습니다!”
필두는 알고 있었다.
이들이 사격지휘통제실에서 간부들 몰래 스마트폰으로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훈련 때문에 지금은 조용히 넘어가겠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의미를 담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는 필두의 한 마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 * *
탄약고 초소로 직접 가 근무자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 경계 반경, 기타 상황 조치 등등을 전부 다 체크한 필두가 천천히 초소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탄약고 초고 근무자들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필두에게 몇 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난 뒤 겨우 합격을 인정받은 이들.
진절머리가 다 날 지경이었다.
그나마 대대장이 순찰을 올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런 커트라인도 없었더라면…….
오늘, 두 근무자는 하루 종일 필두 앞에서 탄약고 초소에 관한 사항들을 자체적으로 훈련받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한편. 막사 아래로 내려온 순간, 행정병이 필두를 다급하게 찾았다.
“행보관님! 대대장님이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포대장님은 어디 계시냐.”
“대대장님하고 같이 오는 중입니다.”
“그렇군. 알았다. 병사들한테도 곧 대대장님 오신다고 전해둬라.”
“예, 알겠습니다!”
연대장의 방문에 앞서 9090 대대장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자체 평가.
이번 기회를 통해 필두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