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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행보관되다-67화 (67/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7화

제17장. 호된 신고식(2)

먼저 손을 든 김전일에게 모든 병사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삼포반장 역시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 우리 여섯포 신병. 장기자랑 뭐 할 건데?”

“노래하겠습니다!”

“오케이, 좋다! 한 곡 뽑아봐라!”

삼포반장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절로 박자를 타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하나둘삼넷!”

“네 빈자리~ 채워 주고 싶어~ 내 인생을~ 전부 주고 싶어~”

간드러진 트로트 한 가닥이 흘러나왔다.

사실 전일은 입대하기 전, 아는 형들과 선배들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전입 신고식에 관해서였다.

그럴 때 가장 무난한 건 노래 부르기. 그중에서도 특히나 트로트가 흥도 돋울 수 있고 좋다는 정보를 들은 적 있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트로트 한 곡 정도는 머릿속에 입력해놓고 입대했다. 그런데 정말로 써먹게 될 줄이야.

그리 잘 부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는 점 덕분에 꽤 만족스러운 평가를 얻었다.

“봤냐, 이게 우리 여섯포 막내다!”

같은 분과 선임병들의 기분은 잔뜩 업 되었다.

신병 장기자랑은 분과의 기세 싸움이기도 했다.

여섯포와 같이 오늘 새롭게 신병을 받은 삼포와 하나포도 질 수 없었다.

“성태야! 너도 가서 보여줘라!”

“이병 류성태! 예, 알겠습니다!”

하나포보다 삼포 측이 좀 더 빨랐다.

마지못해 일어선 류성태 이병. 솔직한 심정으론 하고 장기자랑 따윈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선임들의 압박이 그의 등을 강제적으로 떠밀었다.

“삼포 신병은 뭐 할래?”

“이병 류성태! 전…… 래, 랩 하겠습니다!”

“랩?”

“오, 진짜?”

“대박! 랩이라니!”

10대, 그리고 20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끌고 있는 게 바로 랩이었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큰 화자가 되고 있는 랩이란 소재를 삼포의 막내, 류성태가 구사하겠다고 하니 병사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쏠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기대감도 치솟았다.

“어흠.”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은 성태가 본격적으로 랩을 시작했다.

“Yo! 내가 여기에 온 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더 이상 난 훈련소 생활 따윈 안 해! 이제부터 난 제1포대의 떠오르는 해! 모두 다 같이 나의 활약을 기대해!”

프리스타일 랩이었다.

즉석으로 생각해낸 그만의 랩.

그러나.

“…….”

“…….”

“…….”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특별히 엄청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고, 내용이 재미있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읊은 것에 불과할 뿐.

‘어라? 이게 아닌데.’

위기감을 느낀 성태가 곧장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다, 다른 거 하겠습니다!”

“다른 거 뭐?”

삼포반장의 물음에 성태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춤추겠습니다!”

“오, 댄스!”

“렛츠 파뤼이?”

또다시 병사들의 기대치가 한껏 상승했다.

노래나 랩보다는 역시 역동적인 춤이 더 호응이 좋은 법이었다.

“동작이 좀 큰데, 잠깐 공간 좀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거기 하나포, 뒤쪽으로 이동해라.”

“예, 알겠습니다.”

같은 처지임에도 하나포 인원들 역시 성태의 춤을 잔뜩 기대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공간이 확보되자, 성태가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후우.”

호흡을 고르던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팔부터 시작된 그루브.

처음에는 작은 동작부터. 이후 윈드밀까지 이어지는 성태의 장기자랑에 병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생각보다 잘한다!

사전에 선보였던 랩 실력 때문에 사실 춤 실력에 엄청난 기대는 걸지 않았었다.

그저 분위기 띄우는 목적으로나마 막춤이라도 보여주면 좋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성태가 보여준 춤은 상상 이상으로 전문적이었다.

소위 말해서 비보이들이 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동작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두 발을 쩍 벌린 채 회전하는 그의 몸은 마치 팽이를 연상케 했다.

바닥에 무사히 착지한 뒤, 마지막으로 거수경례까지 했다.

“이상입니다! 충! 성!”

“우오오오!”

“대박이다, 대박!”

“미친, 춤 봐라! X발 눈 돌아가는 줄 알았네!”

여기저기서 극찬이 쏟아졌다.

남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동작들로 병사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으니, 찬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일은 트로트로, 성태는 춤으로 완벽하게 호응을 이끌어냈다.

마지막 주자인 진수의 어깨에 더더욱 많은 부담감이 실렸다.

“막내야, 하나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소진언이 진수를 격려했다.

분대장 자리를 내려놓은 그였지만, 분과들의 기 싸움에서 진다는 건 승부욕이 결코 용서치 않았다.

진수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 내키지 않았다.

트로트, 랩, 그리고 춤이 뭔지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전부 이세계의 문화였기에 왜 저런 것들에 열광하는지 공감은 되지 않았다.

그것보다 가장 문제인 건 바로 삼포반장 뒤에서 짙은 미소를 띠고 있는 강필두의 존재였다.

‘드리무어 앞에서 재롱잔치라도 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굴욕적인가……!’

철천지원수에게 장기자랑을 선보인다는 게 참으로 황당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필두 때문에 장기자랑을 안 하겠다는 말을 내뱉기라도 했다간 무슨 쌍욕을 들을지 모른다.

지금은 필두보다 진수를 지켜보는 시선들을 신경 써야 했다.

이등병 황진수를 연기하라!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혹시 검 있습니까?”

“검?”

뜬금없이 검을 찾는 진수였다.

그의 요구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군대라면 당연히 검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은 왜?”

“검무(劍舞)가 제 장기입니다.”

“……뭐라고?”

“검무입니다.”

“…….”

생활관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 와중에 필두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진수가 도리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너, 무슨 사극 영화 찍냐.”

“검무가 뭐냐, 검무가.”

“에휴, 그냥 막춤이나 춰라.”

진언도 포기한 모양인지 손사래를 치며 막춤을 지시했다.

검도 없을뿐더러,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검을 실내 생활관에서 마구 휘두르는데 그것을 삼포반장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막춤으로 강제 결정된 진수의 장기자랑.

‘아까 저 남자처럼 추면 되는 건가?’

혹시 몰라 성태의 춤 동작을 미리 봐뒀다.

그대로 따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진수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웨이브라든지 로봇춤 같은 건 따라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윈드밀이나 토마스 등 고난이도 동작이었다.

‘이 정도야 어렵지 않지!’

근력과 유연성을 요구하는 어려운 동작이었지만 진수에겐 식은 죽 먹기 수준에 불과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부터 꾸준히 육체를 수련해 온 효과가 제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동작임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따라 하는 진수의 모습에 병사들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심지어 좀 추다 보니 성태보다 더 화려한 동작을 선보였다.

“이 정도면 됩니까?”

폭풍 같았던 장기자랑 순서를 마친 진수가 선임병들을 바라본 채 물었다.

어벙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하나포 분대원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뭐였더라? 저 관심병사 이름.”

“황진수래, 황진수.”

“대박이네. 아까 그 삼포 신병보다 더 잘 추는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이번 기수들은 댄스 특화네.”

어찌 저 찌 무사히 자신의 차례를 넘기는 데에 성공한 황진수.

그가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한편, 이 모든 정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필두는 이내 말없이 생활관을 떠나 퇴근을 준비했다.

‘재미있는 걸 봤군.’

설마 이계에 와서 원수라 생각한 남자의 장기자랑을 보게 될 줄이야.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참으로 기묘했다.

* * *

다음 날 오전.

어김없이 찾아온 9090대대의 아침은 꽤 쌀쌀했다.

“으, 추워라.”

“엣취!”

살인적인 추위로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고충이 들려왔다.

애국가를 비롯해 우리의 결의 낭독, 그리고 국군도수체조 등.

아침 점호를 끝낸 병사들을 향해 삼포반장이 반가운 멘트를 들려줬다.

“아침 구보는 생략한다. 들어가서 세면세족하고 식사 집합 준비해라.”

“아싸!”

“역시 삼포반장님! 감사합니다!”

이런 융통성 있는 점호 방식 때문일까. 제1포대 당직사관 라인업 중 삼포반장의 인기는 단연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물론 가장 기피하고 싶은 당직사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강필두였다.

구보 없는 아침 점호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자대는 구보를 생략할 수도 있군. 몸 좀 풀려 했는데.’

진수가 입맛을 다시며 세면세족 준비에 돌입했다.

어차피 개인정비 시간 이후에 따로 체력 단련을 하면 되지만, 그래도 몸을 단련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몸은 마일더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컴퓨터 게임과 술에 찌든 생활을 해오던 몸이 마일더에게 큰 만족을 줄 리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했던 게 헬스장 등록이었을 정도니, 그의 답답함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삼포반장의 활약(?)으로 편안한 아침 점호를 보내게 된 제1포대 병사들.

아침 식사 집합을 하기 전에 도혁이 그를 불렀다.

“진수야.”

“이병 황진수.”

“집합할 일 있으면 후임병들은 마지막에 남아서 침상 정리하고 나가면 돼. 매트리스 선이 제대로 맞춰져 있는지, 활동화하고 슬리퍼 선 제대로 맞춰 진열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만 확인하면 되니까 알아둬.”

“예, 알겠습니다.”

훈련소에 있을 때와 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대는 훈련소에 비해 그렇게까지 심하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대에서의 첫 아침 식사를 치르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간 사이, 필두가 출근을 마쳤다.

그를 보자마자 삼포반장이 피곤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충성!”

“충성. 당직 서느라 수고했다.”

“아닙니다. 행보관님께선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어. 그보다 어제 신병들 상태는 어땠나.”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적응은 잘 하는 거 같나?”

“어리바리 타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괜찮은 애들 같습니다.”

“그렇군.”

내심 간밤에 마일더가 문제라도 일으킨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들었지만, 딱히 그렇진 않은 듯했다.

하기야. 마일더도 눈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 죽여야 할 대상이 있지만,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로지 목적만을 달성하겠다는 무대포식 방식을 고르진 않을 터였다.

취침 시간을 이용해 막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필두를 노리는 수도 있지만, 신병 대기 기간 때에는 그를 지켜보는 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그런 시도도 없으리라 예상되었다.

설사 그런 시도를 한다 하더라도 필두가 곱게 당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도 어제 저녁, 퇴근 이후 나름의 대비책을 다 갖췄다.

‘마일더가 상대라면 결코 방심해선 안 되겠지.’

조심, 그리고 또 조심.

그것이 마일더를 상대하는 필두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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