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75화
제19장. 말년휴가(2)
말년휴가를 떠나기 하루 전. 이제 정말로 전역일을 얼마 안 남긴 소진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급품들을 후임병들에게 최대한 다 나눠주는 데에 집중했다.
“세상에. 짐이 이렇게 줄을 줄이야.”
가벼운 더블백을 들어 보이며 놀라움을 토로했다.
군장이라든지 기타 다른 것들은 이미 행정분과에게 전부 반납했다. 차마 그것까지 후임병들에게 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멋대로 그것들을 다른 병사에게 뿌렸다간 오히려 영창을 갈지도 몰랐다.
몇 번 안 남은 저녁 점호를 받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는 소진언. 오늘 당직사관을 맡게 된 행보관, 강필두가 1생활관을 찾았다.
“부대~ 차렷!”
일일 생활관 책임자의 말에 따라 병사들이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후 병사들에게 쉬어 자세를 취하게끔 한 필두가 진언이 앉아 있는 곳 앞에 걸음을 멈췄다.
“휴가 준비는 다 끝났나.”
“예!”
“분대장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휴가 복귀하자마자 그다음 날 바로 혹한기 훈련 뛰게 될 거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물론입니다!”
휴가일을 조정하기도 좀 모호했다. 14박 15일이라는 휴가를 다 쓰고 난 이후에 혹한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날을 최대한 억지로 짜 맞춘 결과가 이러했다.
복귀 이후 바로 다음 날에 혹한기 훈련을 뛴다. 아마 말년병장이 아닌 일반 병사였더라면 부담감에 몸서리를 쳤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진언은 어떻게 해서든 혹한기 훈련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 바람을 필두가 이뤄준 셈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말년병장이니까 훈련 준비 시간 없어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겠다.”
“네!”
“내일 아침점호 받자마자 바로 짐 싸고 휴가 떠날 준비 해라. 내 특별히 대대장님한테 미리 보고했으니 대대상황실에 가서 따로 신고 안 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손을 뻗어 필두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줬다.
“휴가 잘 다녀오고.”
“병장 소진언!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점호는 이것으로 마친다. 2생활관 점호 끝나는 즉시 바로 취침 준비할 수 있도록.”
“예!”
필두가 당직사관을 맡은 것치고 상당히 무난하게 점호가 끝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혹한기 훈련 준비한다고 당분간은 병사들을 잔뜩 굴릴 생각으로 가득한 필두였기에 ‘쉴 때 푹 쉬어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점호도 병사들에게 큰 터치 없이 진행했다.
* * *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2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조항과 진수가 라면취식을 마치고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고생했다, 진수야. 잘 자라.”
“김조항 상병님도 안녕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그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10분 뒤.
“…….”
꿈나라로 떠난 조항과 달리 진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나 흐름 때문이었다.
‘설마 드리무어가?’
여기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이는 드리무어, 강필두밖에 없었다.
불침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조심스럽게 일어선 진수.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모포를 끌어당겨 사람이 안에 누워 있는 것 같은 형상으로 꾸몄다.
이윽고 마법을 걸어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초창기에 필두가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물론 필두는 병사가 아니었기에 침상 뒤처리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막사 바깥으로 나온 진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이질적인 마나 흐름이 감지된 곳으로 향했다.
장소는 제1포대 뒤편 뒷산 언저리.
주변을 탐색해 봤지만, 필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 느꼈다.
마나의 흐름이 비정상적이었음을.
그러나 막상 그 흔적을 추적해 오니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빨래터에 도달할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진수의 외도를 알아차린 듯 말을 걸어왔다.
“오밤중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나.”
“……드리무어.”
자신의 상관이지만 동시에 그의 적수이기도 한 필두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진수가 막사 바깥을 나가는 순간부터 그의 움직임을 눈치챘던 것이다.
“네 녀석이 저쪽에서 마법이라도 사용한 거 같아서 움직인 거다.”
“그렇다면 단단히 착각했군. 난 아니다.”
“내가 네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나.”
“물론 아니지. 어차피 진실을 말해줘도 세상 사람들은 내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
“…….”
그것이 필두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믿어주지 않는 이를 필두가 믿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갔다.
쉽사리 타인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남자. 그것이 강필두였다.
병사들을 믿는다는 말을 했지만, 그것과 필두가 생각하는 진정한 신뢰의 의미는 달랐다.
부하로서 이 사람은 책임을 다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정도까지 신뢰하진 않는다. 그런 뜻이었다.
고독한 늑대. 드리무어만큼 이 별칭이 잘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새벽 시간이었기에 병사들 대부분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탄약고 초소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이들의 대치 상황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드리무어를……!’
절호의 찬스였다.
목격자가 없을 때 드리무어를 제거한다!
그것이 마일더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였다.
상황은 드리무어도 엇비슷했다.
그러나 드리무어는 그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곧 있으면 불침번 교대 시간이다. 인원체크 할 테니 빨리 생활관으로 돌아가라.”
“네가 네 말을 따를 거라 생각하나.”
“이등병 주제에 행보관의 말을 어기다니. 명령 불복종이다.”
“내가 마일더라는 걸 잊었나 보군.”
마일더가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지 필두에게 덤벼들 수 있다는 그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필두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안 덤비나.”
마일더가 툭 내뱉은 말. 그러나 대답은 아까와 같았다.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
“어차피 여기서 싸워봤자 결판도 안 날 거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도 않으니까.”
드리무어의 말이 맞았다.
레디너스에 있을 당시에도 두 남자는 비등비등한 실력을 자랑했다.
드리무어를 죽음의 위기를 몰아넣은 건 마일더와 함께할 수 있는 동료와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드리무어를 죽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일더도 드리무어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보장 같은 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시간 낭비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원군이 오기까지 드리무어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끔 감시만 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시간은 이들의 편이니까.
“……흥.”
짧게 코웃음을 친 마일더가 자세를 풀었다.
일단은 드리무어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생활관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네가 느낀 마나 흐름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뭐?”
“그리 알아두면 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드리무어.
사실 그는 마일더가 움직이기 전에 한발 먼저 앞서서 장소를 탐색했었다.
그러나 저번과 마찬가지로 그가 도착하자마자 그 흔적은 자취를 감췄다.
드리무어가 모습을 감춘 뒤에도 마일더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라도 벌어지려는 건가.’
야밤임에도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 * *
이른 오전.
필두의 아침점호는 언제나 그렇듯 FM으로 이뤄진다.
“전체, 상의 탈의하도록.”
필두의 지시에 병사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혹한기 훈련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날씨는 유독 더 추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황진수였다.
예전부터 드리무어라는 인간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일더, 황진수였으나 아침점호 한정으로 필두만큼 마음에 드는 당직사관이 없었다.
삼포반장을 비롯해 다른 당직사관들은 대게 약식 점호를 선호했다.
그러나 필두는 비나 눈이 오지 않는 이상 구보를 포함해 항상 FM 점호를 실시했다.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좀 더 체력을 기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뛰어!”
“어잇!”
“가!”
“하나, 둘, 삼, 넷! 하나, 둘, 삼, 넷!”
그렇게 아침구보를 마친 이후.
막사로 바로 올라온 소진언이 빠르게 세면세족을 마치고 A급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종이가방 하나를 들고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는 분대원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 휴가 다녀오마!”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소진언 병장님.”
“그래, 그래.”
“진언이 형, 잘 갔다 와!”
“오냐!”
“선물, 잊지 말고!”
“알았다, 짜식아!”
전역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형이라 부르는 병사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빠르게 행정반으로 접어든 소진언.
그 앞에 필두가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휴가 떠날 준비는 다 마쳤겠지?”
“예, 그렇습니다!”
“총기현황판 수정이나 말판 이동 같은 건.”
“완벽합니다!”
“나갈 때 뭐 타고 가나.”
“시내버스 타고 가야 하지 말입니다.”
9090대대의 경우에는 연천, 전곡 지역에서도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부대를 벗어나 시내로 가는 것이 휴가의 첫걸음이었다.
그러기 위해 위병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하나 불행하게도 9090대대 앞을 지나는 버스는 40분에 한 대씩 올 정도로 배차 간격이 매우 길었다.
지금 휴가 신고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봤자 최소 20분은 기다려야 할 터.
“준비해라. 시내까지 태워주마.”
“자, 잘못 들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한 소진언이 재차 물었다. 그러나 필두는 오히려 그 확인 질문이 귀찮은 모양인지 살짝 짜증 섞인 말투를 냈다.
“왜. 타기 싫으냐.”
“아닙니다! 행보관님께서 직접 데려다 주신다는데, 제가 어찌 거절합니까!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사탕발림은 필요 없다. 바로 출발할 테니 와라.”
“예!”
당직사관 완장을 푼 뒤에 책상 위에 내려놓은 필두.
단독군장도 벗어두고 먼저 막사 바깥을 나섰다.
한편. 그의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당직병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목소리를 줄이며 입을 열었다.
“행보관님이 요즘 들어 왜 이리 친절하시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떠랴.
휴가자로서 이만한 기회도 없었다.
“아무튼 나 먼저 간다!”
“소진언 병장님! 휴가 나가서도 이틀에 한 번씩은 꼭 부대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하루 단위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렇게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손을 흔들며 병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전역을 앞둔 채 떠나는 마지막 정기 휴가.
필두의 차량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