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77화
제20장. 혹한기(2)
“야, 마셔라, 마셔!”
짠!
격렬하게 부딪치는 맥주잔들.
대여섯 명의 젊은 청춘들이 알코올에 취해 늦은 저녁까지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소진언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이런. 잠깐만.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전화? 누구한테.”
“설마 여친이라도 생긴 거냐?”
“군인 주제에 여친을 만들어? 능력자네, 능력자!”
“야, 그런 거 아니다. 부대한테 연락하는 거야.”
스마트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이탈하려는 그에게 친구들이 야유의 목소리를 냈다.
“너, 말년 맞냐? 휴가에 일일이 전화로 보고하는 놈이 어디 있어!”
“그런 거 걍 무시해. 어차피 당직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들 역시 말년 시절을 겪어봤기에 어떤 느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언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에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아무튼, 잠깐 전화하고 올게.”
“그래, 그래. 알아서 해라.”
“성실하구먼!”
잠시 가게 바깥으로 나온 진언이 곧장 연락처를 검색했다.
이윽고 9090대대 제1포대라는 명칭을 터치하지, 부대 행정반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통신보안. 일병 전도혁입니다.
“응? 네가 이 시간에 전화를 왜 받냐.”
-소진언 병장님이십니까.
현재 시간은 저녁 11시 반.
병사들이 취침에 빠져들 시간이었다.
진언의 물음에 전도혁이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직설 사람 없다고 해서 제가 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네 차례까지 왔냐.”
당직병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리게 된 전도혁.
그러나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당직이 천직이라는 병사도 있고, 근무 휴식도 보장되니 그 점을 생각한다면 분명 이점이 존재하긴 했다.
게다가 당직을 서게 되었다는 건, 다시 말해서 이제 전도혁도 선임급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혹한기 끝나고 진급시험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올~ 전도혁! 이제 상병 되는 거냐?”
-진급시험 통과해야 되는 거지 말입니다.
“하긴, 그렇지.”
그래도 지금까지 보여준 도혁의 신체 능력이라면 무난히 통과할 거로 예상되었다.
“그래. 부대 분위기는 어떠냐?”
-괜찮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준비도 수월하게 잘 되어가는 거 같습니다. 다만…….
“다만?”
-혹한기 때 눈 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시기가 안 좋았다.
하필이면 혹한기 때 눈이라니.
“행보관님이 엄청 짜증 내셨겠네.”
-티는 잘 안 내려고 하시지만, 신경 많이 쓰시는 티가 납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훈련 도중의 기상 변화는 보급계에게 많은 일을 할당시킨다.
부대 관리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필두로서는 폭설 소식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알았다. 그리고 내일 4시? 5시쯤 복귀할 거니까 그리 전해둬라.”
-예, 알겠습…… 아.
통화 도중에 누군가가 도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신보안. 상병 김조항입니다.
“오, 조항이냐? 너도 당직이야?”
-전 막 근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근데 왜. 이 형 목소리가 듣고 싶었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휴가 나가서도 제때 전화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솔함에서 우러나오는 조항의 감사 말에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조항의 말대로 진언은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부대로 전화를 줬다.
보통 말년병장이 휴가를 나가면 이런 성실함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진언은 자신이 전화를 안 하면 실시간으로 분대원을 체크해야 하는 분대장에게 많은 부담이 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찮더라도 한 통화씩 꼭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게 조항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몸조리 잘하시고, 내일 무사히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임마. 너도 훈련 준비 잘하고.”
-예.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충성!
“오냐.”
소진언의 성실함은 부하들에게 늘 좋은 귀감이 된다.
통화를 끊은 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진언.
부대에서 매번 보던 초록색 경관과 다르게 지금은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랄까. 그토록 바랐던 민간 사회의 밤이었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네.’
이제 더 이상 전우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 * *
혹한기 훈련까지 앞으로 남은 일자는 단 하루!
내일이면 드디어 9090대대 혹한기 훈련이 시작된다.
시작은 월요일.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있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마찬가지로 종교행사에 참가하는 병사들.
이들과 함께 교회로 내려온 필두가 다른 쪽으로 관심을 표명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필두의 물음에 따라 혜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끝에는 다수의 젊은 사람들이 뒤섞인 채 한 곳에 앉아 있었다.
다 합해서 도합 10여 명 정도 됐다.
“아, 성가대 분들이에요.”
“성가대?”
“네. 아빠 교회 분들이신데,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성가대 분들까지 모시고 왔어요.”
“그렇군요.”
“반응 좋으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쯤 해서 계속 성가대 분들 참가하시게끔 하겠다고 하던데요. 대대장님도 좋다고 하셨어요.”
성가대의 참가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교인이다 보니 군인들과 트러블 일으킬 거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야, 저기 봐봐. 저 여자, 장난 아닌데?”
“난 저쪽보다는 저기 청바지 쪽이 더 취향인데.”
“이 새끼들이. 단발의 매력을 모르는구먼! 단발 여자가 제일 예쁘잖아!”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필두의 귀까지 전달되었다.
젊은 여자들의 출연에 병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하기야. 한창 청춘을 불태울 젊은 나이인데 여자 없이 2년을 버티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까. 그건 필두도 공감하는 바였다.
‘오늘은 밤꽃 냄새가 진동하겠군.’
일찌감치 화장실 냄새를 짐작해 보는 필두였다.
그러는 동안 혜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혹한기 훈련이라면서요?”
“네.”
“눈 온다고 하니까 옷 단단히 껴입으시고 훈련받으세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혜정 씨.”
큰 훈련이 있을 때마다 관심을 표명하며 필두의 걱정을 하는 혜정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대화를 하던 도중에 혜정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혜정이 본인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와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혜정은 사랑에 빠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필두는 짐짓 모른 척을 해왔다.
애초에 그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필두를 따라 일부러 기독교 종교 행사까지 참가한 마일더도 있었다.
추격대가 오면 필두는 또다시 이 세계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혜정과 연인으로서의 정을 맺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다시 저번처럼 가족을 잃어버리는 꼴을 겪을 바에야 연을 만들지 않는 게 훨씬 속 편했다.
그러나 매정하게 혜정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본능이 그를 거부했다.
‘나 역시 사람이라 그런 것일지도.’
누군가로부터 따스한 온기를 전달받고 싶어 하는 욕심.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은연중에 필두의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골치 아프군.’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면서 인간의 정이란 요소는 다 배제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하나 좀처럼 쉽게 되질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혜정의 아버지인 교회 목사가 두 남녀에게 다가왔다.
“행보관님! 또 오셨군요.”
“인솔자로서 잠깐 들렸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자주 좀 와주세요. 저희 혜정이가 행보관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아, 아빠!”
당황한 혜정이 목사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그러나 이미 말은 다 새어나온 뒤였다.
머쓱한 미소를 선보인 필두가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일이 있어서 자리 비우겠습니다. 종교행사 끝나고 다시 오도록 하죠.”
“하하! 행보관님 바쁘신 거야 모두가 다 아니까요. 아무쪼록 너무 무리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예, 감사합니다.”
목사도 필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필두만 결정을 내린다면 아마 당장 식을 잡자고 나설지도 몰랐다.
목사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필두가 혜정과 아이 컨택으로 잠시나마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바깥으로 나온 후.
“기운이 다 빠지는군.”
훈련 준비보다 목사 부녀를 상대하는 게 더 힘들게 느껴졌다.
* * *
일요일 저녁.
당직사관을 맡게 된 필두에게 소진언의 복귀 소식이 들려왔다.
“위병소에서 연락 왔습니다. 소진언 병장, 지금 막 위병소 통과하고 막사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냐.”
오후 4시. 좀 더 늦은 시간에 복귀할 수도 있었지만, 진언은 내일이 훈련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부대로 돌아왔다.
행정반에 도착하자마자 필두 앞에 마주 선 소진언이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병장 소진언, 금일로 휴가 복귀했습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이나 반입금지 물품 같은 거 안 가지고 들어왔겠지?”
“예! 위병소에서 다 검사 맡고 왔습니다!”
“흠, 그러냐. 고생했다. 들어가서 짐 풀고 쉬어라.”
“예! 충성!”
들고 온 종이 가방 두 개를 챙기고 1생활관으로 진입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충성! 휴가 복귀하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진언 병장님!”
“이 자식들. 기다리던 건 내가 아니라 이것들이겠지.”
병사들이 각각 부탁했던 물품들이 종이 가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중 이등병 베레모 하나를 꺼낸 진언이 진수에게 다가갔다.
“진수야. 이거, 네 모자다.”
“저, 그거 있습니다만…….”
“얌마. 기왕이면 사제 쓰는 게 좋잖아. 안 그래?”
확실히 보급보다 사제가 여러모로 더 좋았다.
모양새라든지 착용감 등등.
게다가 진수는 선임의 배려를 단칼에 거절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도혁아, 성태야.”
“일병 전도혁.”
“일병 정성태.”
“너희 것도 준비했다. 자, 상병모다.”
“사, 상병모……!”
“감사합니다! 아껴서 잘 쓰겠습니다!”
진급시험에 통과해야 쓸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지금 당장 쓰고 다니긴 힘들었다.
그렇기에 관물대에 잠시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조항의 병장모도 사왔다.
휴가를 나갔어도 후임들 생각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혹한기 준비는 다 끝났냐.”
“예, 완벽합니다!”
“눈만 안 오면 좋겠습니다.”
환복을 하며 후임병들로부터 그간의 준비 과정을 비롯해 앞으로의 일정 등을 전달받았다.
말만 들어도 힘든 일정 그 자체였다.
그래도 진언은 이미 한번 혹한기를 경험했던 남자였다.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다른 후임병들보다 혹한기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덜했다.
“짜식들아. 너무 겁먹지 마라. 내가 이번에 훈련 같이 뛰면서 나만의 비법을 다 전수해 주고 전역할 테니까.”
“잘부탁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소진언 병장님!”
“그래, 그래. 나만 믿으라고!”
말년병장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을 유감없이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