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4화
제20장. 혹한기(9)
그렇게나 큰 소란이 벌어졌음에도 9090부대는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하기야. 위기 상황이긴 했지만, 소리가 거창하게 들릴 만큼의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절벽 아래로 내려온 진수가 여전히 불신의 얼굴로 필두에게 답변을 촉구했다.
“방금 그게 뭐지?”
“나한테 물어봤자 원하는 대답은 못 얻을 텐데.”
그 말은 곧 필두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진수의 머릿속에 얼마 전, 필두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전입하기 전에 자신을 노리고 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때에는 왜 필두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이것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필두는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 있었다. 그때도 누가, 왜 이런 현상을 벌였는지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수가 전입온 그다음 날에 그런 질문을 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가 우리 말고 또 있다는 건가?”
“글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자가 왜 필두와 진수를 노리는지 이해가 안 됐다.
드리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일더는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짓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 전의 그 공격은 드리무어뿐만 아니라 마일더까지 노린 것 같았다.
아니, 그게 확실했다.
‘사실 공격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적으로 마나의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노리는 공격 마법 형태로 바뀌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계속해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두는 이미 몇 차례 유사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마일더보다 더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보여줬다.
“가서 잠이나 자라. 어차피 여기서 고민해 봤자 아무것도 해결 안 된다.”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들어가서 자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 경험상, 이런 일이 한 번 발생하면 당분간은 또 잠잠해진다. 이것도 나름 텀이 있더군.”
“…….”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여기서 밤이라도 새든가. 어차피 내 알 바 아니니까.”
마일더를 걱정해 줄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손해는 본인이 볼 뿐이니.
할 말을 마친 채 다시 CP텐트로 돌아갔다. 그런 필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수도 마지못해 하나포 텐트로 향했다.
범인이 필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새벽 6시.
아침 해조차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에 기상한 병사들은 말 그대로 꼬질꼬질함 그 자체였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
억지로 함성을 냈다. 덕분에 목이 갈라지고 기침도 새어나왔다.
오늘이 혹한기 훈련 3일 차. 오늘 하루만 버티고 내일 점심에 주간 행군만 소화하면 고단한 혹한기도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첫날을 제외하고 눈이 안 온다는 점이랄까.
아니, 오히려 눈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드는 병사들도 더러 있었다.
눈, 그리고 비가 오면 부득이하게 훈련을 잠시 중지하는 일도 발생한다.
하나 군대 날씨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자고로 군대 날씨란 평소에는 잘만 오던 눈과 비가 정작 필요할 때에는 안 오는 그런 경우를 말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눈이라도 내리면 훈련도 안 받고 좋을 텐데.’
‘하, X발. 이놈의 눈은 눈치도 없어.’
직접 말을 안 할 뿐이지, 병사들의 눈빛에는 그런 원망이 가득했다.
부대 이동과 상황조치훈련 등을 서너 차례 반복하다 보니 오늘 하루도 금세 지나갔다.
저녁 식사 시간 직전.
“휴지 있는 사람.”
진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때마침 건빵 주머니에 두루마리 휴지가 있던 전도혁이 손을 들었다.
“저, 있습니다.”
“잠깐 좀 빌려줘라. 큰 거 왔다.”
“아, 네.”
“포반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총 들고 가는 거, 잊지 마라.”
“예!”
총기는 어딜 가든 항상 휴대해야 한다.
단독군장 차림에 총기 휴대까지 하니 불편해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어찌하랴.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야외 화장실에 도착한 소진언.
문을 열자마자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우웩!”
지독한 냄새!
위생 상태 역시 좋지 않았다.
산언저리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몰래 싸고 오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나 진지를 이탈할 순 없었다.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탈영병 취급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게 말년병장이지 않은가.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까지 배변 활동을 참는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복귀 행군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까지 무슨 수로 참아낸단 말인가.
불편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하아, 젠장. 이 짓도 전역하면 끝이겠지!”
혹한기 뛴다고 괜한 호기를 부렸던 걸까.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자, 진언의 시야에 거미줄들이 포착되었다.
그곳에 엉켜 있는 죽은 벌레들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
“X발, 진짜!”
입에서 욕지거리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배변 활동 한번 하기 정말 힘들다.
최대한 빠르게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가져온 휴지로 뒤처리를 마쳤다.
문을 열고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던 고만해 일병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볼 일 다 끝나셨습니까, 소진언 병장님.”
“뭐야. 너도 싸러 왔냐?”
“하, 하하…….”
대답 대신 작은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너, 여기서 볼 일 본 적 있냐?”
“없습니다만.”
“그래?”
갑자기 손을 뻗은 진언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조심해라. 이 앞은 지옥이야.”
“…….”
“절대로 밑을 내려다보지 마라. 오늘 먹은 식사들이 구토로 다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입니까?”
“지독하다.”
“…….”
만해를 놀리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럼 무사히 살아서 만나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언의 충고에 만해의 몸이 절로 떨렸다.
이윽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런 씨바아아알!”
고만해의 비명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 * *
계속되는 훈련.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는 여전히 강추위였다.
박스카에 온종일 앉아 있기 답답했던 모양인지 류태만 병장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자마자 그가 내뱉은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어흐, 추워라.”
다시 박스카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팠다. 가볍게 몸을 푸는 동안, 옆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하던 삼포 반장이 눈을 흘겼다.
“팔자 좋다, 류태만.”
“병장 류태만.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안 그래. 우리는 바깥에서 덜덜 떨면서 훈련받고 있는데. FDC가 완전 땡보야, 땡보.”
“그건 부정 못하겠습니다만…… 여름에는 오히려 박스카가 지옥입니다. 삼포 반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군대 법칙 중 하나.
무조건 내가 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그건 병사든 간부든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행보관님이 엄청 조용하시지 말입니다.”
“행보관님?”
“네. 삼포 반장님도 그렇게 생각 안 하십니까?”
“그러고 보니…….”
다른 행보관에 비해 필두는 훈련 때 유독 간섭이 많은 행보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답지 않게 매우 조용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내가 알기론 그런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보고받은 것도 없었다.
하나 필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이들이 모르는 필두의 고민.
하긴, 알 리가 없었다.
어제 저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새벽에 벌어졌던 일이 여전히 신경 쓰였다.
‘자연 현상은 아니야. 분명 누군가가 마법을 쓴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 누군가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이 세계는 마법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다. 1클래스 마법사조차 본 적 없는 이곳에서 필두와 마일더를 그토록 몰아붙일 만큼의 실력을 지닌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혹시……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가설 하나가 떠올랐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군.’
원인은 모르지만,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일을 몇 차례 겪다 보니 자연스레 경계심이 높아졌다.
그건 비단 필두뿐만이 아니었다.
하나포 뒤에 정렬해 휴식을 취하는 중인 진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드리무어가 아니라면 누구지?’
진수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100퍼센트 드리무어가 범인이라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 정도 크기의 마나 파장을 일으킬 만한 실력자는 마일더가 아는 바로는 드리무어밖에 없었으니까.
하나 드리무어는 아니었다. 어제 일로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골 때리네.’
마일더는 사실 복잡하게 머리를 쓰거나 하는 일에는 그렇게까지 큰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리나가 있었으면 분명 이런 쪽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을 텐데.’
레디너스에 있을 자신의 부관이 절로 떠올랐다.
그녀는 이런 방면에 있어서 전문가였다. 사건을 조사하고, 추리하는 데에서 발군의 능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의 부재가 이렇게까지 아쉽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레디너스에서 연락이 와야 지원이라도 요청할 수 있을 것인데, 언제쯤 되려나 모르겠군.’
진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일뿐.
한편, 아침부터 진수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김조항이 그에게 다가왔다.
“진수야. 어디 아프냐?”
“이병 황진수. 괜찮습니다.”
“아침부터 쭉 봤는데, 전혀 안 괜찮아 보이던데. 아까부터 넋 나간 표정이잖아.”
조항의 말을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티가 많이 났나 보군.’
나름 표정 관리 한다 했었으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프거나 그런 거 아니니 너무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그래도 분대장으로서 도리가 있지. 일단 의무병한테 진찰이라도 한번 받아보자. 열은 없고?”
“정말 괜찮습니…….”
말을 이어가려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하나포 반장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헐레벌떡 이곳으로 뛰어왔다.
하나포 반장을 보자마자 조항이 마침 잘 됐다며 입을 열었다.
“포반장님. 드릴 말씀 있습니다. 진수가 좀 아픈 거 같은데, 의무병한테 잠시 데려다 주고 와야…….”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왜 그러십니까?”
하나포 반장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웬만한 일은 그냥 웃으면서 넘기는 하나포 반장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봐도 예삿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머지않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식은 귀를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기 근처에 간첩 봤다고 신고 들어왔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