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85화 (85/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85화

제21장. 실제상황(1)

7691 진지에서 한창 상황조치훈련에 임하고 있는 9090대대의 모습.

어제저녁. 절벽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필두는 훈련에 제대로 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평상시였더라면 훈련에 대해 자잘한 잔소리 연타를 날렸을 그였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그런 필두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드리무어다. 틀림없어.”

거친 인상의 남성이 필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 곁에서 망원경으로 필두를 예의주시하던 남자가 아직도 믿기지 못한다는 말투로 물었다.

“저 남자가 드리무어라고?”

“그래.”

“믿을 수 없군.”

망원경을 든 남자는 동료에 비해 비교적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에 파란 넥타이.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그런 인상착의였다.

하나 그가 있는 곳은 사무실이 아닌 외진 산언저리였다.

그것도 허름한 차림의 남자와 함께.

“어떻게 저 남자가 드리무어라는 걸 알았지?”

“혹시나 해서 몇 번 실험을 해봤다. 그 덕분에 알게 되었지.”

“무슨 실험?”

“마법으로 공격했다.”

“이런 미친. 그러다가 역으로 당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결과적으로 안 당했으면 그만이잖아.”

“…….”

정장 남성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할 말이 없음을 뜻했다.

“예전부터 줄곧 말했지만, 너의 그 무대포 방식은 너무 위험해. 이건 너 혼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몰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안 됐으면 그만이잖나.”

“그놈의 결과론은.”

꽤 오랫동안 어울린 사이라 그런지 더 이상 나무라는 것도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허름한 차림의 남성이 정장 남성에게 의견을 구했다.

“마스터에게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대기다.”

“안 돼. 너무 늦어.”

“그럼 어쩌라고.”

“지금이 드리무어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그러다가 오히려 우리가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결과로 증명하면 되잖아.”

“그 결과 타령 좀 그만해라.”

정장 남성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 녀석과 어울리면 스트레스만 쌓인다. 딱 그런 표정이었다.

하나 허름한 차림의 남성은 정장 남성의 입장을 전혀 고려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곧장 행동에 임했다.

“못 믿겠다면 내가 직접 증명해 보이도록 하지.”

“뭐……?”

“겁쟁이는 얌전히 숨어 있으라고.”

그 말만을 남긴 채 빠르게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런 미친 새끼를 봤나. 어휴.”

정장 남성 역시 마지못해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중간부터 두 남자의 행태를 몰래 지켜보던 노인이 헛숨을 삼켰다.

“허미, 저것이 뭐 시다냐……!”

약초 캐러 왔다가 의심쩍은 것을 목격했다.

정장 남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허름한 남성은 한눈에 봐도 수상해 보였다.

특히나 남성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권총 한 자루.

그것이 유독 노인의 뇌리에 맴돌았다.

‘간첩이야! 틀림없구먼!’

관절이 좋지 않음에도 노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동시에 얼마 전에 봤던 스티커 내용물을 떠올렸다.

간첩신고는 국번 없이 111 혹은 113.

* * *

노인의 신고는 9090 대대에게도 전달되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들이 훈련받고 있는 7691 진지 근처에서 간첩 목격 신고가 들어왔으니, 이 이상 계속 훈련을 강행하는 건 무리였다.

“병력들 전원 집합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포대장의 명에 따라 FDC 측에서 각 분과에 전파사항을 전했다.

이윽고 제1포대 병력들이 CP텐트 앞에 집결했다.

이미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간첩 등장!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물들었다.

“너희도 벌써 들어서 알겠지만, 이 주변에 간첩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포대장의 말을 직접 듣는 순간, 병사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문에 우리 부대도 곧장 하던 훈련을 중단하고 간첩 수색에 나선다. 남은 혹한기 훈련 일정은 전부 취소다. 최소한의 병력만 이동 준비하고 나머지는 곧 실탄 지급될 테니까 그리 알도록.”

실탄 보급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병사 중 일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것은 실제상황이다. 모의훈련 같은 게 아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일이니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후 행보관님께서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해 주실 거다. 그럼 행보관님. 전 잠시 대대장님한테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포대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필두가 병력들 앞에 마주 섰다.

실제상황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묵직했다.

그것을 병사들의 눈빛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나 필두나 진수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런 위기상황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무덤덤했다.

그런 두 사람과 다르게 병사들은 이번이 처음 겪는 실제상황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본능 같은 것이었다.

필두도 그것을 잘 알기에 이들을 크게 나무랄 수 없었다.

그래도 군인인 이상, 사명을 내팽개치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즉시 탈영 취급을 당해 군법으로 처벌될 테니까.

“신고자가 목격한 간첩은 두 명. 그중 한 명은 정장을 입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옷이 많이 낡은 노숙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성이 권총을 휴대하고 있다고 하니 주의하도록.”

“궈, 권총이라니…….”

“…….”

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에 점점 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필두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부득이하게도 간첩 목격 신고가 들어온 장소에서 우리 부대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조만간 지원 병력이 올 테지만, 그전에 간첩이 다른 곳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곳 주변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포위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동준비는 FDC, 수송, 행정을 제외하고 분과에서 한 명씩 뽑아서 진행한다. 7명이 여섯 개 포 번갈아 작업하면 된다. 나머지 병력은 여기에 남아 경계 작전에 돌입한다.”

“네!”

“포대장님도 이미 말씀하셨다시피 이것은 실제상황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전우를 믿고,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두려움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거다.”

말없이 필두의 말을 경청하던 진수가 씁쓸함을 삼키듯 입맛을 다셨다.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던 녀석한테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웃기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필두의 말이 옳았다.

믿음과 신뢰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건 누구보다도 마일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건투를 빈다.”

필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사관들이 병력 통제에 나섰다.

“오대기들은 따로 모여라!”

“이동준비부터 서둘러, 어서!”

훈련이 실제상황으로 변했음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 * *

실탄 보급이 끝난 이후.

병사들이 신고가 들어온 지점을 향해 투입될 준비를 서둘렀다.

수색은 오대기가 담당할 예정이었다.

하나포 오대기 멤버는 정성태. 제아무리 근면 성실함의 상징이라 불리는 성태였지만, 간첩 수색을 앞둔 상황이라 그런지 긴장감을 숨길 수 없었다.

출동 준비를 서두르는 와중에 필두가 하나포를 방문했다.

“하나포 오대기 멤버 누구지?”

“일병 정성태. 접니다.”

“오대기 멤버, 진수랑 바꿔라.”

“……?”

“자, 잘못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다른 분대원이라면 몰랐다. 김조항이라든지 전도혁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 막 전입 온 신병에게 오대기를 넘기라고 하니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필두의 의지는 확고했다.

“반론은 듣지 않겠다. 진수한테 넘겨라.”

“하지만 행보관님. 그건 좀…….”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군대라는 조직이 지니고 있는 룰이었다.

“하나포 반장한테도 이미 이야기해뒀다.”

쐐기를 박는 발언이었다.

아마 하나포 반장한테도 계급으로 밀어붙여 강제로 오대기를 바꾸게끔 했을 게 틀림없다.

하나포 반장의 인성을 생각한다면 쉽게 필두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사자인 진수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제가 오대기로 나가겠습니다.”

“뭐?”

“얌마. 너, 오대기가 뭐 하는 건지나 알고서 하는 말이냐?”

“예. 이미 어깨너머로 다 숙지해뒀습니다. 자세한 건 이동하면서 다 외울 수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잘해낼 자신 있습니다.”

진수도 차라리 성태보다 자신이 오대기로 출동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정답이었다.

괜히 이들끼리만 내보냈다가 귀한 목숨만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진수가 나서서 활약하는 편이 좋았다.

필두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진수를 내보내려 했다.

물론, 서로 간의 합의는 없었다.

마지못해 필두의 명령을 받들기로 했는지 조항이 진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죽지 마라.”

“이병 황진수!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필두의 명령으로 진수의 출전이 결정되었다.

* * *

오대기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

임무 숙지를 위해 오대기용 수첩을 펼쳐놓고 시선을 고정시킨 진수에게 필두가 전음을 보냈다.

-너라면 간첩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겠지.

-북한이라는 곳에서 넘어왔다고 들었다만. 저들은 마법 쓸 수 있나?

-아니, 여기 인간들과 같을 거다.

-싱겁겠군.

몸풀기만도 못한 상대가 될 듯해 보였다.

하나 필두의 생각은 달랐다.

‘어쩌면 우리를 공격한 녀석들일지도 몰라.’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었기에 구태여 진수에게까지 말해주진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간첩을 잡아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무리를 해서라도 진수를 오대기 멤버로 강제 투입시켰다.

물론 간부와 병사들의 반발도 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을 오대기로 투입시키면 어쩌라는 식으로.

그래서 일부로 계급빨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강필두란 남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추진하는 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여러 번 증명해 보였다.

그 과거의 이력이 필두의 주장을 뒷받침해 줬다.

‘설마 마일더에게 기대를 걸게 될 줄이야.’

레디너스에 있을 당시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간첩이라는 공통적인 적이 등장한 이상, 군인인 이들은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수도 군말하지 않고 필두의 오대기 교체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과 같이 생활하는 전우들이 마음에 들었다.

무장공비의 위협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진수를 움직이게 했다.

기묘한 협력 관계. 그러나 목표는 명확했다.

무장공비 제압!

공통된 목표 앞에 더 이상의 갈등은 불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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