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92화 (92/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92화

제23장. 전역, 그리고 새 출발(1)

“소진언 병장님.”

1생활관을 찾은 당직병. 자신을 찾는 것을 보자마자 소진언의 뇌리에 불안감이 스쳤다.

“왜.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냐.”

“TV 보는 게 바쁜 겁니까.”

“나한테는 바쁜 일이지.”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TV 아니겠나.

때마침 군인들이 좋아하는 걸그룹이 컴백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내 평생 걸그룹을 이렇게 좋아했던 때가 또 없었어.”

“군인이라 그렇습니다.”

“하긴, 그렇지.”

군대에 있을 때에는 걸그룹 멤버 이름 하나하나 다 외우는 건 기본이다.

하나 사회에 나가면 먹고 살 걱정부터 하느라 걸그룹에 잘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순서였다.

아마 소진언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지못해 상반신을 일으킨 진언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왜 부른 건데.”

“행보관님이 찾으시지 말입니다.”

“행보관님이?”

“예.”

“설마 또 작업 같은 거 시키시는 건 아니겠지.”

“직접 가보시면 알 거 같습니다만.”

“흠.”

전역이 바로 다음 날이라 하더라도 필두라면 작업을 시키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사 작업을 시킬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못 들은 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은 채 행정반으로 향하는 소진언. 그의 발걸음에서 불안감이 묻어나왔다.

“충성. 병장 소진언,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행보관실로 와라.”

필두가 먼저 행보관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침을 꼴딱 삼킨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문 닫고 앉아라.”

“예!”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행보관실에 올 때마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들었다.

전역을 하루 앞두고 있음에도 그 긴장감은 사라질 줄 몰랐다.

“내일 전역하니 기분이 어떠냐.”

“기분이라고 물어보셔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듭니다.”

“기쁘지 않냐.”

“기쁩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제가 전역하는지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실감이 안 난단 말이지.”

필두는 전역자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막상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왜 널 불렀을 거 같냐.”

“잘 모르겠습니다.”

감도 안 잡혔다. 이미 저녁 시간을 넘었기에 작업을 시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무리한 작업 같은 걸 억지로 시키지 말라고 대대장이 직접 지침을 내렸다. 필두가 제아무리 까다로운 간부라 하더라도 대대장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작업을 시키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소진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호기심을 해결해 주기 위함일까. 필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별건 없다. 그냥 저녁에 치맥이나 같이할까 해서 불렀다.”

“잘못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치맥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치맥이라는 단어, 모르냐. 20대 애들이 잘 사용한다고 하던데.”

“아, 알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부대에서 치맥 해도 되는 겁니까? 게다가 전 병사인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행정보급관, 강필두다. 국방부 장관조차 인정한 남자 아니겠는가. 9090 대대 내에서 함부로 필두에게 뭐라 할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설령 대대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본래 FM대로라면 병사는 부대 내에서 금주였다.

하나 군대에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안 걸리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역시 행보관님이십니다.”

진언이 무의식적으로 엄지 척! 을 선보였다.

부대에서 먹기 힘든 치맥을, 게다가 필두가 공짜로 사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천만에. 이것은 절호의 찬스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해야지.”

이로서 야밤의 치맥 협정이 체결되었다.

* * *

개인정비시간이 끝나고 저녁 점호 시간이 다가왔다.

9시 반. 병사들이 일제히 생활관 마룻바닥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생활관 문을 전부 개방한 상태에서 필두가 쩌렁쩌렁 외쳤다.

“금일 저녁 점호는 당직사관이 직접 취하겠다. 점호는 1생활관부터. 점호를 취하지 않는 2생활관은 잠시 대기할 수 있도록.”

당직사병과 함께 1생활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1생활관에 모습을 드러내자, 전투복을 갖춰 입은 소진언이 뒤로 돌아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부대~ 차렷!”

다시 뒤로 돈 이후, 필두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충성.”

“제1포대 저녁점호 인원 보고. 총원 65명. 열외 삼. 열외 내용 휴가 둘, 당직 하나. 이상 점호준비 끝!”

“쉬어.”

“쉬어!”

복명복창을 한 뒤, 앉은 채로 차렷 자세 중인 병사들에게도 쉬어를 명했다.

모든 동작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필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생활관 책임자 안했어도 잘 하는군. 이렇게 된 김에 부사관이라도 지원하는 건 어떠냐.”

“병장 소진언! 죄송합니다만 그건 극구 사양하겠습니다!”

“철벽이구먼.”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전역 마지막 날에 이런 제안을 받는다면 치를 떨 것이다.

소진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른 전역자들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주 드물게 부사관을 지원하는 병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중에서도 소수였다.

“특이사항은 없겠지.”

“예, 없습니다!”

“그럼 편히 쉰 상태로 2생활관 점호 끝날 때까지 대기하도록.”

당직사병과 함께 1생활관을 나선 필두가 빠르게 2생활관 점호를 마쳤다.

저녁 9시 50분.

취침 준비를 서두르는 병사들 사이로 유독 혼자서 여유를 부리는 이가 있었다.

“그럼 난 치맥 먹으러 간다.”

소진언이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이들의 염장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이 설마 방아쇠가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가긴 어딜 가려고!”

“우리가 순순히 보내줄 거 같아?”

좌, 우에서 우수수 덤벼드는 병사들!

순간 소진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뭐긴!”

“뻔하잖아, 전역빵이지!”

모포말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이었다.

치맥 때문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모포말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진언의 머리 위로 모포와 포단이 날아들었다.

도망치려 했지만, 바로 뒤에서 전도혁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진언이 형, 어딜 도망가려고!”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놔라! 놓으라고! 나, 아직 너희 선임이야!”

“어차피 내일이면 민간인이잖아!”

모포와 포단을 뒤집어쓴 채 그대로 도혁에게 내팽개치기를 당했다!

미리 깔린 매트리스 위를 나뒹굴던 소진언.

그 틈을 타 병사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한편, 이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진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게 뭐하는 겁니까?”

“저거? 모포말이. 전역빵이라고들 하지.”

김조항이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해 줬다.

“전역하는 사람을 때리는 겁니까?”

“그래.”

“왜 때려야 하는지 이유 같은 건 없습니까?”

“그냥 우리 놔두고 전역하니까 꼴 보기 싫어서 때리는 거지. 거기에 덧붙여서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순간적으로 조항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다들 아쉬워서 그래. 소진언 병장님이랑 지금까지 함께했는데, 이제 같이할 수 없다는 아쉬움도 담겨 있지.”

“그렇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니 얼추 이해되는 거 같기도 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사람은 기쁨과 아쉬움을 반복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매번 전역자를 배출하는 군대지만, 그럴 때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병사들은 쉽사리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2년 가까이 동고동락을 해왔다면 더더욱 그러할 터.

게다가 소진언은 후임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아온 선임이었다.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모포말이는 모포말이다.

겨우 얼굴만 빼꼼 내민 소진언이 이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 모포 안으로 숨었다.

그것을 신호로 병사들이 발을 들어 올렸다.

“애들아! 때려라!”

퍼버벅! 퍼억! 퍽퍽!

매섭게 쏟아지는 발길질! 최대한 몸을 웅크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버둥을 쳐보는 진언이었으나, 모포말이의 위력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발길질이 겨우 끝날 무렵.

“이…… 썅놈들……!”

몰골이 말이 아닌 채로 모포 속에서 기어 나온 소진언이 욕지거리부터 내뱉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본인들의 자리로 돌아가 취침 준비에 임했다.

“우리가 다 진언이 형 좋아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우리 맘 알지?”

“알긴 개뿔.”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려 했으나, 치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불필요했다.

* * *

저녁 11시.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처음으로 군 부대를 방문한 배달원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이 군대구나.”

그는 아직 미필이었다. 그러니 군부대가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위병소에 진입하자, 선임 근무자가 그를 의아한 듯 바라봤다.

“치킨? 관사에서 시켰나.”

“아, 이거 알파 포대 거야.”

조장이 바로 튀어나와 배달원을 통과시켰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갈 때, 치킨의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 나도 치킨 먹을 줄 아는데.”

“전역하면 행보관님한테 사달라고 해.”

“우리 행보관님이 사주겠냐.”

“하긴, 그렇지.”

알파 포대 행보관을 부러워하는 타 병사들의 시선.

물론 알파 포대 병사들은 이들의 기분을 절대로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제1포대에 도달한 배달원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직사병을 발견했다.

“치킨입니다.”

“여기요.”

필두에게서 받은 카드로 결제를 마쳤다. 이후 아직 따끈따끈한 치킨을 들고 막사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행보관님, 치킨 왔습니다.”

“행보관실 안에다가 세팅해둬라.”

“예!”

당직사병과 당직병들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도 치맥 파티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두의 아량이었다.

물론 계기는 어디까지나 소진언의 전역이었지만 말이다.

한참 막 치맥 세팅을 진행하던 중에 소진언이 호기롭게 등장했다.

“병장 소진언! 행정반에 치맥 먹으러 왔습니다!”

“보고는 제대로 하고 들어와라, 짜샤.”

“죄송합니다!”

필두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병사 아니겠는가.

몸 건강히 무사하게 전역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보관으로선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행보관실에 들어서자 진언이 입맛을 다셨다.

“치킨! 휴가 때 보고 또 보는구나!”

휴가 나가서 실컷 먹고 왔음에도 군대에서 먹는 치킨의 맛은 특별했다.

그래서 절로 군침이 감돌았다.

필두를 비롯해 당직사병, 당직병, 그리고 전역자인 소진언까지.

이렇게 네 명이 자리를 잡았다.

“행보관님, 제가 먼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그래라.”

소진언이 먼저 벌떡 일어서 맥주병을 차지했다. 이윽고 필두의 잔을 채워줬다.

병사에게서 술잔을 받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모든 이들이 잔을 채웠을 때, 필두가 건배를 주도했다.

“그럼 가볍게 짠하자.”

“예!”

건배를 시작으로 치맥 파티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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