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05화 (105/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05화

제27장. 엇갈리는 관계(1)

“행정보급관이라고요?”

“응. 맞아.”

에리나는 나름 표정 관리에 자신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미간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혜정이 좋아하는 사람의 정체는 바로 드리무어였으니까.

“저기, 혜정 언니.”

“왜?”

“많고 많은 남자 중에서 왜 하필이면 그딴 자식을…… 어흠! 왜 하필이면 행보관님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부터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리무어는 에리나에게 있어서 절대 악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드리무어를 잡기 위해 차원 이동까지 감행했겠는가.

그러나 앞의 말은 미처 못 들은 모양인지 혜정이 천천히 설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야 멋있으니까.”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에리나가 알고 있는 드리우머는 멋과 거리가 먼 존재임에 틀림 없었다.

물론 행정보급관, 강필두로서의 드리무어가 어떤지에 대해 혜정이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말을 아꼈다.

그래도 드리무어는 안 된다.

게다가 혜정은 에리나가 처음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 예나의 가족과 더불어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철천지원수 같은 드리무어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우호적이진 않았다.

“혹시 또 모르지 않습니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지도요. 알고 보면 쓰레기에 인간 말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나. 너, 필두 씨랑 아는 사이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그런 말 하는 건 못써.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함부로 험담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혜정이 정색을 했다.

하기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가 면전에서 그 사람을 욕하면 누가 좋아할까? 그건 에리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본인이 실수했음을 인정한 에리나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혜정 언니.”

“괜찮아. 대신, 앞으로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레디너스에서 드리무어의 험담은 이들의 기본 대화 패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서 드리무어를 옹호하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처음 접해보는 유형이었다.

물론 혜정은 필두의 정체가 드리무어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어쩐다. 면회 때 드리무어와 마주칠 수도 있겠어.’

혜정은 필두와 만날 것이다.

그녀와 같이 면회를 가니 필두와 마주치는 건 거의 확정이라 봐도 무방했다.

드리무어와 마일더, 그리고 에리나.

이 세 명이 한자리에 모인다.

참으로 묘한 운명이다.

* * *

토요일 오전이 되자마자 성태가 진수를 불렀다.

“진수야. A급 전투복 좀 줘 봐라.”

“전투복 말입니까? 이거 조금 있다가 입고 가야 하지 말입니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

영문을 모르겠다.

면회 때 입고 가야 할 전투복을 왜 달라고 하는 걸까.

선임병의 명령이었기에 안 줄 수도 없었다.

전투복을 넘기자, 그것을 챙겨 들고 재봉실로 향하는 정성태.

그를 따라 도혁도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진수야. 이거, 네 전투화지?”

“예. 그렇습니다.”

“A급이지?”

“네.”

“그럼 잠깐만 빌린다.”

“……?”

졸지에 전투복과 전투화를 강탈당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조항이 뒤늦게나마 상황을 설명해 줬다.

“면회 준비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준비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부대는 이등병이 첫 면회나 외박 나갈 때 선임병이 전투화하고 전투복을 다려주는 관습이 있거든. 네 꺼 A급 전투복, 줄도 안 잡혀 있잖냐.”

“그렇습니다만.”

“전투화에 광도 안 나 있고.”

“예.”

“줄잡는 거하고 광내는 거, 둘 다 성태하고 도혁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저 녀석들, 전문가거든.”

선임이 직접 해준다.

그러나 후임병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해야 하는 것들 아닙니까?”

“신병이 잘 할 리가 없잖아.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앉아 있어. 10시에 온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전에는 끝날 거다. 그 성가대 아가씨,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기왕이면 말끔하게 하고 가야지.”

물론 군인이 삼선일치하고 전투화에 불광을 낸다 하더라도 민간 여성들이 그것을 알아봐 줄 리는 없었다.

그래도 뭐랄까. 안 하면 또 섭섭한 게 줄잡기와 광내기였다.

그렇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성태와 도혁이 진수의 A급 전투복과 전투화를 들고 나타났다.

“자, 여기 있다.”

진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구김이 져 있던 전투복이 말끔하게 다려져 있었다. 게다가 선 역시 말끔하게 잡혔다.

전투화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전투화.

말 그대로 환골탈태(換骨奪胎)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중에 너도 후임 들어오면 이렇게 해줘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면회 준비 덕분에 본의 아니게 전우애를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사복 차림의 필두가 1생활관을 방문했다.

“황진수.”

“이병 황진수!”

“면회 왔다. 위병소로 내려가자.”

“예.”

전투화를 빠르게 신은 후에 필두를 따라나섰다.

나란히 걷는 두 남자. 그러는 사이에 필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기 좋군, 마일더.”

“시끄럽다.”

이들을 예의주시하는 시선은 없었다.

그렇기에 진수도 계급장 떼고 마일더로서 드리무어의 말에 반응했다.

“그나저나 별일이군. 너라면 그 성가대 아가씨가 너 보러 면회 올 거라고 말했을 때 네가 먼저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군.”

“사람의 선의를 거절하는 건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

“과연 그럴까.”

며칠 전부터 마일더의 행동이 매우 수상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마석의 존재. 아직도 그 정체가 뭔지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성가대 여성이 왜 뜬금없이 진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의문 투성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수는 그에 대해 마땅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어차피 같이 만날 터이니, 그때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이것은 마일더의 숨겨진 속내를 파악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 * *

위병소 앞에서 두 남자를 기다리는 혜정과 예나.

두 미인의 등장에 병사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혜정은 이미 9090대대 병사들에겐 유명 인사였다. 목사님의 미인 딸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러나 예나는 신선한 얼굴이었다.

성가대로서 간혹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혜정처럼 자주 부대를 드나든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예나라는 존재에 더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예나야. 내 옷, 어때?”

“괜찮은 거 같습니다. 예쁘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그래? 고마워.”

예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주며 혜정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복장도 제법 신경을 많이 썼다. 흰색의 타이트한 스키니진에 핑크색 코드. 최대한 밝은 색상을 중점으로 코디했다.

반면 예나는 청바지에 패딩으로 무난한 패션이었다.

혜정이 어제 백화점에서 옷까지 직접 골라줬건만, 결국 예나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위병소에서 제1포대 행정반으로 키를 넣은 지 5분 정도 흘렀을 때.

“아, 필두 씨!”

혜정이 연병장으로 가로질러 걸어오는 두 남자 중 한 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필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행동을 마쳤다.

밝아 보이는 얼굴의 혜정과 다르게 세 남녀의 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헤정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

드리무어 쪽을 슬쩍 바라본 진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녀석은 아직 에리나의 정체를 모르고 있어. 그렇다면…….’

예나를 보자마자 진수가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이병 황진수입니다!”

그의 반응에 순간 에리나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수는 엄연히 그의 상관이다. 그런 그에게 거수경례를 받으니 어떤 대처를 보여야 좋을지 난감했다.

그러나 예나도 드리무어가 본인의 정체가 에리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여기선 장단에 맞춰줘야 해!’

굳은 결심을 한 예나가 최대한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안녕하세요. 진수 씨. 소예나라고 해요. 마, 만나서 반가워요.”

여성스러움을 최대한 어필한다. 그게 에리나의 전략이었다.

에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과 어울리며 기사 수업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일까. 여성스러운 면모보다 남자다움이 더 물씬 풍기는 그런 여자였다.

드리무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리나는 최대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로 했다. 그래야 드리무어의 눈을 속일 수 있을 테니까.

어색한 에리나의 여자다운 연기 때문일까. 진수도 사실 그렇게까지 편하진 않았다.

그렇게 서로 각기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사람. 그런 그들을 필두가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감을 느낀 에리나가 혜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일종의 신호였다.

‘혜정 언니!’

‘아, 알았어.’

결국 마지못해 혜정이 필두를 전담 마크했다.

“필두 씨. 저 두 사람, 따로 이야기할 수 있게 저희가 자리 비켜 드릴까요?”

“그렇군요. 괜히 방해될 수 있을 테니까요.”

말은 혜정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한눈에 봐도 수상쩍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혜정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 다른 면회 장소로 이동했다.

그제야 진수와 예나가 한숨을 돌렸다.

“설마 네 여성스러운 면모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그,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하하, 그래. 나도 안다. 그보다 일단 좀 멀리 떨어지는 게 좋겠구나.”

“예, 진수 님.”

이들 말고 다른 면회자, 병사들이 면회실을 가득 메웠다.

좀 더 떨어진 장소로 향하는 두 사람.

나무 벤치에는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잠깐만.”

주변 나무들을 경계하는 진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드리무어의 소환수가 있나 없나 살피는 거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괜히 방심했다가 드리무어에게 전부 다 들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제야 착석한 진수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그래도 나와는 다르게 넌 민간인이라 게 다행이군. 행동에 제약이 안 걸리니까.”

“대신 드리무어를 감시하지 못하니까 그게 좀 답답합니다.”

“그건 내가 하면 된다. 그보다 너도 마석은 가지고 있겠지?”

“예. 차원 이동 전에 하인드 님한테 받았습니다.”

“다행이군.”

예나는 진수와 다르게 드리무어의 눈치 볼 것 없이 마음대로 차원 통신을 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이점이었다.

진수가 마석을 사용하기 힘들 때, 예나에게 대신 부탁하면 된다.

“그래도 아무런 접점이 없는 너와 내가 이렇게 자주 면회나 통화를 주고받으면 드리무어가 필히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너와 연락을 계속 주고받기 위한 명분이 있으면 될 거 같다.”

“역시 마일더…… 아니, 진수 님이십니다! 그게 뭡니까?”

“오해하지 말고 듣도록.”

잠시 목을 가다듬은 진수가 놀라운 제안을 꺼냈다.

“연인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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