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4화 (124/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4화

제31장. 내게도 후임이(4)

“생활관이 꽤 소란스러웠던 거 같은데.”

필두의 시선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리스마가 묻어나오는 그의 눈빛에 병사들이 잔뜩 주눅 들었다.

조금 전까지도 기세등등했던 오구철과 서수일도 필두 앞에선 순한 양에 불과했다.

“오구철.”

“병장 오구철!”

“아까 있었던 일, 자세히 설명해 봐라.”

“…….”

난감한 질문이 들어왔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한다면, 오구철이 내무부조리를 조장한다는 사실을 필두에게 들키게 된다.

전역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 영창 신세가 될 순 없었다.

“그, 그냥 애들이 하도 시끄럽게 굴기에 조용히 하라고 소리 좀 질렀습니다.”

“그것뿐이냐.”

“예, 그렇습니다!”

병사들은 오구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잘못은 병사들이 아닌 오구철에게 있었다. 그러나 오구철은 자신이 잘못 없다는 것 마냥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타이밍을 노려 수일이 구철의 지원을 나섰다.

“구철이 말이 맞습니다, 행보관님. 제가 다 지켜봤습니다. 애들아, 맞지?”

서수일이 노골적으로 병사들에게 눈치를 줬다.

마지못해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혀를 찬 필두가 오구철을 주의시켰다.

“다음부터는 멋대로 소리치지 말고 조용히 훈계해라. 알았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곧 점호 시작할 테니 준비하고.”

“네!”

행정반으로 다시 돌아가는 필두. 그제야 구철과 수일이 안도했다.

“자칫 잘못했다가 들킬 뻔했네. 휴!”

“이게 다 하나포 때문이야.”

모든 책임을 하나포에게 돌리는 구철과 수일의 말이었다. 두 사람의 말에 반론을 가하고픈 도혁과 성태였으나, 짬에서 밀리는 탓에 대들긴 힘들었다.

한편, 복잡한 병사들 간의 기 싸움을 방관하듯 지켜보던 진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 * *

저녁 점호까지 마치고 다시 행정반으로 복귀한 필두 앞에 근무 교대자들이 나란히 마주 섰다.

“충성! 신고합니…….”

“됐다. 신고는 생략하고 근무 투입해라.”

FM을 고집하는 필두답지 않은 처사였다.

행보관이 바로 근무 투입하라고 하는데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있을까.

당직과 후번 근무자들이 곧장 근무 투입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는 동안 필두의 시선이 1생활관 쪽으로 향했다.

‘뻔한 거짓말을 잘도 하는군.’

필두가 모를 리 없었다.

오구철과 서수일이 의도적으로 하나포를 갈구는 걸 눈치챘기에 일부러 생활관으로 진입했다.

목적은 간단했다. 갈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필두의 주의가 효과는 있을지언정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쉽사리 적극적으로 개입하긴 힘들었다.

병사들 간의 생태계가 있는 법이다. 간부가 너무 많은 간섭을 하면 오히려 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꼴이 된다.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래서 필두는 내무부조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은 병사들을 억압하지 않았다.

‘김조항이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더 나아졌으려나.’

조항의 존재를 떠올려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긍정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김조항이 병장 계급을 달긴 했지만, 짬으로 따지면 오구철과 서수일이 위였다.

이들은 포대 왕고. 병사 중에서 두 사람을 통제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놈의 군대는 참 어렵군.’

인권 이런 거 없이 힘으로 통제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못하는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 * *

아침 점호가 시작되기 전.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구철에게 다가간 수일이 하나포 쪽을 가리켜 말했다.

“야, 구철아. 저쪽 신병 둘. 아직 애들 이름 다 못 외웠겠지?”

“암기 천재가 아닌 이상, 그렇겠지.”

“좋았어.”

뭔가 꿍꿍이가 떠오른 모양인지 이번에는 하나포쪽으로 다가갔다.

“거기 신병 둘.”

“이병 전의성!”

“이병 박대박!”

“저 녀석, 이름 뭔지 맞춰봐라.”

수일이 가리킨 사람은 도혁의 동기 중 한 명인 고만해 상병이었다.

이름이 특이하긴 하지만, 어제 막 전입온 신병들이 무엇을 알까. 병사들 이름 외울 시간조차 없었기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저 녀석은.”

FDC의 한지철 상병이었으나 그마저도 대답하지 못했다.

“진수야.”

“일병 황진수.”

“후임 교육 똑바로 안 시키냐. 엉?”

잘 됐다는 듯이 바로 진수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수일이었다.

두 신병에게 이름 테스트를 할 때부터 이 사태를 예견한 모양인지 진수는 비교적 담담하게 반응했다.

“죄송합니다. 교육시키겠습니다.”

“하여튼 하나포, 너희 내 눈에 거슬리는 거 하나라도 있으면 알아서 각오해라.”

아침부터 이들에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벌벌 떠는 두 신병에게 진수가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위로했다.

“괜찮다. 사람이라는 게 완벽한 존재도 아니고. 하루 만에 이름 못 외울 수 있지. 그러니 너무 과하게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러나 진수의 이런 위로에도 두 신병은 여전히 선임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노골적으로 타 분과 일에 개입하면서 후임병들 기죽이기 작업에 돌입한 구철과 수일 때문에 연도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럴 때 소진언 병장님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진언이 포대 왕고였을 때, 이런 일은 발생할 일도 없었다. 설사 일어난다 하더라도 진언이 전부 다 커버를 쳐줬다.

그때가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 * *

아침부터 시작된 구철과 수일의 하나포 저격은 식사 시간에도 이어졌다.

전의성과 박대박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은 수일과 구철이 일부러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

순식간에 굳은 표정으로 변하는 두 신병이었으나, 구철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밥 먹어.”

“아, 알겠습니다!”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일부러 식사에 열중하는 사이, 구철이 진수와 연도 쪽을 바라보며 또 태클을 걸었다.

“야. 하나포 신병, 우리한테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라는 말도 안 하는데?”

“우와. 요즘 신병들은 병장이 숟가락 들기도 전에 밥 먹는구나. 대단하네, 대단해! 완전 이등‘별’님이시구먼!”

병장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그다음에 밥을 먹을 수 있다든지 하는 그런 건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들이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시비를 걸기 위함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진수는 변명보다 사과하기를 택했다.

“죄송합니다. 교육시키겠습니다.”

“교육시키겠다고 하면 다냐? 밥 먹고 일, 이등병들 다 집합시켜라. 오래간만에 내가 직접 교육 좀 시켜줘야겠네.”

“…….”

이번에는 도가 지나쳤다.

그러나 진수가 일병을 달고 있는 이상, 이들에게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 * *

조연도와 진수를 비롯해 일, 이등병들이 전부 다섯포 포상으로 집합했다.

“조연도.”

“이, 일병 김성환!”

“네가 여기에서 짬이 가장 많지 않냐.”

“예, 맞습니다!”

“네가 군기 안 잡으니까 하나포가 저따위로 하잖아.”

“죄송합니다!”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성환으로선 억울할 것이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대표로 혼이 나야 하다니.

그것도 후임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다 필요 없고. 엎드려라.”

“자, 잘못 들었습니다?”

“엎드리라고. 얼차려 주려고 그러는 거다.”

“…….”

몇 번을 망설이던 김성환이 마지못해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 순간, 진수가 나섰다.

“잘못은 저한테 있습니다. 얼차려를 부여하겠다면 제가 홀로 받겠습니다.”

“네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몫까지 다 한다고?”

“예.”

진수의 패기에 구철이 혀를 찼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엎드려!”

바로 자세를 취하는 진수에게 곧장 얼차려가 부여되었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하나!”

“정친을!”

“둘!”

“차리자!”

대충 몇 번 하고 끝낼 줄 알았었다. 물론 구철도 그럴 생각이었다.

본래 목적은 얼차려를 버티다 못 한 진수가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쳐 울고불고 짜면서 죄송하다고 구철에게 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구철의 착각이었다.

“하, 하나…….”

“정신을!”

“두울…….”

“차리자!”

오히려 구호를 외치는 구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몇 번의 구호를 외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최소 세 자리 수는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진수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저게 사람이냐?’

‘미쳤네, 미쳤어!’

후임급 병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철과 수일도 마찬가지였다.

“구, 구철아. 힘들면 그만하자.”

수일이 구철에게 물러설 것을 제의했다.

푸쉬업을 반복하는 진수보다 가만히 앉아 선창만 했던 구철의 목을 걱정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구철의 성대가 나갈 것 같았기에 수일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만하고 돌아가라.”

“예. 충성.”

다시 벌떡 일어선 진수는 거수경례까지 말끔하게 선보였다.

지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게 사람이냐.’

‘괴물 같은 놈.’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 * *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각 분과로 우르르 흩어졌다.

때마침 이 상황을 목격한 필두가 병사 중 한 명을 호출했다.

“거기 너.”

“일병 한석호!”

“네가 왜 다섯포에서 나오냐.”

한석호는 둘포 소속 병사다. 다섯포에 볼 일은 없을 터. 필두가 이런 질문을 해오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자, 잠시 건네줄 물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물건이 뭐냐.”

“그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짓말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구태여 한석호에게 겁을 주면서까지 자초지종을 실토해 보라고 압박 넣을 필요까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필두에겐 믿음직스러운 스파이가 있다.

“전도혁.”

“일병 전도혁!”

필두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하나포 포상 쪽으로 걸음걸이를 유지하던 도혁이었으나 제대로 걸리고 말았다.

한석호에게 돌아가 보라는 식으로 손짓한 뒤에 도혁을 대신 추궁했다.

“무슨 일이냐.”

“…….”

말을 하기에는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필두도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행보관실로 따라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필두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행보관실에 들어오자마자 필두의 일침이 가해졌다.

“그 말년병장 두 녀석이 집합시킨 거 같던데. 맞나.”

“알고 계셨습니까?”

“뻔하지.”

포상을 나오는 인원 중에서 유일하게 오구철과 서수일, 두 사람만이 선임급 병사였다.

나머지는 죄다 후임급이었다. 이 구성만 봐도 답이 나왔다.

어차피 필두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어도 금세 들통난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도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털어놓기로 했다.

도혁에게 실시간 보고를 들은 필두의 소감은 한마디로 축약되었다.

“쓰레기 짓이나 하고 다니는군.”

제1포대는 강필두의 부대다. 근데 감히 필두를 놔두고 주인 행세를 하려 하다니. 그건 필두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당분간은 좀 지켜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슬슬 움직여야겠어.”

행보관 강필두의 차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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