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6화 (126/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6화

제32장. 우리 행보관님은 연예인(1)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지나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행보관실에서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필두는 무심코 달력을 바라봤다.

본래 그는 주말에도 부대에 출근을 하곤 했다. 하나 이번 주는 그게 좀 힘들어졌다.

민혜정과의 데이트 약속 때문이었다.

부대 업무 탓에 혜정과 자주 만나지 못했던 필두는 얼마 전, 혜정의 목소리에서 서운해 하는 감정을 캐치했다.

본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주기적으로 얼굴을 보는 게 좋다.

물론 주말마다 기독교 종교 행사를 통해 혜정을 만날 수는 있었다. 하나 종교행사와 데이트는 엄연히 다르다.

혜정이 원하는 건 종교행사보다 데이트다. 필두도 그걸 잘 알기에 데이트 약속을 잡기로 했다.

그게 이번 주 주말이다.

‘어차피 바쁜 업무도 없으니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필두 정도 되는 능력남이면 하루 이틀 만에 다 해치울 수 있었다.

혜정과 만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미리 끝내뒀다.

주말까지 단 하루 남은 상황.

본래 오늘, 당직 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눈치 좋은 부사관과 전포대장이 알아서 근무 로테이션 변경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행보관님, 파이팅입니다!’

꿀밤이라도 먹여줄까 하다가 간신히 참아냈다.

대신 남의 연애에 관심 끄고 본인들 연애나 신경 쓰라는 말로 되돌려줬다.

여자 친구가 있는 자만이 부릴 수 있는 패기였다.

여하튼 혜정과의 데이트 약속이 잡힌 주말까지 마음의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슬슬 퇴근 준비라도 할까.”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다. 본래대로라면 8시까지는 남아 있는 게 필두의 일상이었으나 당분간은 일찍 퇴근하며 컨디션 조절에 신경을 쓰고 싶었다.

마나 수련도 그간 게을리했고 말이다.

퇴근 준비를 마친 필두가 행보관실을 나섰다.

“나 먼저 가마.”

“고생하셨습니다, 행보관님!”

삼포반장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팔에 차여진 완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삼포반장은 이번 주 당직 로테이션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필두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늘 하루, 당직 근무를 서게 되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당직 서게 해서.”

“아닙니다! 행보관님이 여태까지 저희 신경 써주신 거에 비하면 이 정도야 새 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부사관들이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마다 필두는 이들을 대신해 땜빵 당직을 여러 번 서준 적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들보다 상관인 자가 땜빵 근무를 서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극구 사양하는 분위기였으나, 지금은 서로가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한다. 군대라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예, 알겠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삼포반장은 웬만하면 필두에게 연락은 자제하려 했다.

너무 필두에게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두에게 연락할 만한 상황은 하나뿐.

실제상황이 걸렸을 때다.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안심하고 필두를 배웅해 줬다.

* * *

간만의 정시 퇴근에 이은 주말 휴식은 필두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기상 이후 청바지와 반팔 티 하나를 꺼냈다.

바로 입으면 됐지만, 순간 갈등이 들었다.

“반바지를 입을까.”

그만큼 날씨가 꽤 더워졌음을 뜻했다.

“반바지는 좀 시기상조이기도 하고. 그냥 긴 쪽이 좋겠군.”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결정을 내린 뒤에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혜정이 사는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의 도착했어. 마트 앞이야.”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한층 더 가까워진 사이를 증명하듯,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필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종교행사에 올 때 매번 입고 오는 수수한 차림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 화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딱 봐도 데이트용 의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데이트를 할 때에는 유독 의상에 많은 신경을 쓰는 혜정이었다. 본래 여자는 변화의 종족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매번 만날 때마다 다른 이미지를 선사하는 혜정의 매력에 필두도 이제는 제법 빠져든 느낌이었다.

데이트 코스는 사전에 미리 합의를 봤다.

삼성동에 있는 대형 몰에서 쇼핑과 식사, 그리고 영화 관람. 이후 야간 드라이브 후에 예약해둔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기로 했다.

일요일에 종교행사가 있지만, 원래부터 혜정 없이 목사와 군종병이 진행했었기에 그녀의 부재는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게다가 필두와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는 말에 오히려 목사는 더 놀다 오라며 독려를 했다.

여하튼 부모님께도 허락도 받았으니, 놀러 가는 데에 부담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차가 생각보다 많이 밀린다는 점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이 밀리네.”

“그러게.”

혜정이 뒷좌석에 손을 뻗어 가져온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물통이었다.

“커피 타 왔는데 마실래?”

“좋지.”

더운 날씨에 냉커피는 그야말로 극호라 할 수 있었다.

차가운 냉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운전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갔다.

남은 예상 도착 시간은 30여 분 정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발견한 혜정이 기쁜 미소를 선보였다.

“필두 씨. 인터넷 봤어?”

“아니. 왜.”

“어제 필두 씨가 나왔던 다큐멘터리 방영됐었잖아. 아직도 검색어에 필두 씨 이름 올라와 있어.”

“그래?”

민허와 9090대대가 무장공비 둘을 생포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전선을 사수하다!’가 어제 공중파 채널을 통해 상영되었다.

반응은 실로 상상 이상이었다.

실화를 각색해 만든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SNS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필두를 영웅으로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도착하면 사람들이 필두 씨 막 알아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군.”

“왜에. 좋잖아. 안 그래.”

“별로.”

연예인처럼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사인하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는 연예인 체질이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타입이라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묻어가는 타입이었다.

그런 필두가 유명인이 되다니. 본인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하루 반짝하고 잠잠해지겠지.”

희망 사항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혜정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유지했다.

“애인이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평가 들으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지네.”

낯 뜨거운 말이 될 수도 있었으나, 혜정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를 안주 삼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드디어 목적지로 삼았던 대형 몰에 도착했다.

차를 정차시킨 뒤에 가장 먼저 의류 매장으로 향하는 이들.

혜정이 필두의 옷을 사주고 싶다는 말을 했기에 첫 번째 목적지는 의류 코너로 잡았다.

“사람 많네.”

혜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하나 이상한 점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유독 필두 쪽으로 향했다.

“여보, 저 사람 혹시 어제 그 다큐에 나왔던 군인 아니야?”

“그러네! 무장공비 생포한 그분!”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필두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저기. 혹시 강필두 원사님 아니세요?”

“예, 맞습니다만.”

“어제 방송, 잘 봤어요!”

“악수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전 사인 부탁드릴게요!”

뜬금없이 사인 요청까지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인기에 필두는 정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장소인데, 인파까지 몰리니 직원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다른 분들 지나가야 하니까 길 좀 터주세요!”

결국 직원들이 인원 통제에 들어갔다.

우선은 자리를 뜬다!

그것이 필두가 고른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자!”

“어디로 가게?”

혜정이 목적지를 물었다. 동시에 필두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마스크 사러!”

* * *

현 미세먼지 상황이 ‘좋음’임에도 필두는 본의 아니게 일회용 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군인이라는 것을 가리려고 일부러 캡 모자도 구입해 곧장 눌러 썼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두의 노력 덕분일까. 피신처로 잡은 카페 내에는 필두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한편, 경계 모드로 들어간 필두와 다르게 혜정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키득키득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의 모습에 필두가 불만을 토해냈다.

“뭐가 그리 즐거워.”

“아니, 필두 씨가 당황해 하는 모습 처음 봐서. 가끔 필두 씨가 ‘혹시 사이보그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 때 있었거든. 워낙 감정적인 면모를 안 보여주니까. 근데 오늘 보고 알았어. ‘역시 필두 씨도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야.”

“그것참 다행이군.”

혜정에겐 남의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필두는 참으로 난감했다.

흑마법사 조직과 마주 했을 때보다도 더 당혹스러웠다.

물론 이 정도 관심은 레디너스에서도 충분히 받아봤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인지도 면에선 드리무어 시절이 더 높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왜냐하면 드리무어란 이름은 레디너스 전체를 벌벌 떨게 한 악인이었으니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필두가 적지 않게 당황해 하는 기색을 보이는 건 바로 악인으로서 유명해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반대로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대한민국 최전선에서 북한을 상대로 나라를 지킨 훌륭한 영웅! 군인으로서 귀감과 모범이 되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악인이라 불리며 레디너스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린 드리무어인데, 이곳에 와서는 영웅 취급을 받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당분간은 바깥에 다니기도 힘들겠군.”

“그럼 우리 데이트는 어쩌고?”

“지금 데이트가 중요한가.”

“당연하지!”

“…….”

혜정도 나름의 고집 있는 여자다.

안 그래도 파견이니 뭐니 하는 것들 때문에 필두를 자주 보지도 못했는데, 이제 와서 데이트 횟수까지 줄인다고 하니 혜정이 어찌 가만히 넘어가겠는가.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래도 모처럼 데이트를 나왔는데 혜정에게 미움받는 건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그 화를 풀어주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남자로서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트는 논외로 칠게.”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야 혜정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새겨졌다.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까.

잠시 한숨을 돌리며 차가운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켤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의 정체를 확인한 필두가 자신도 모르게 의아함을 표현했다.

“나 PD가 왜 전화를…….”

다큐멘터리 열풍을 만들어낸 나 PD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강필두입니다.”

-행보관님! 안 바쁘셨나 보네요.

“예. 무슨 일입니까.”

휴일에 전화를 건 목적을 물었다.

그러자 나 PD가 믿기 힘든 제안을 건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방송에 출연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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