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57화
제39장. 오랜만의 재회(2)
막사로 올라가는 과정에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이야, 소진언! 너, 머리 많이 길었다?”
관사에서 막 나온 하나포 반장이 때마침 면회실을 나오는 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인상이 꽤 변했지만, 한눈에 봐도 소진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가 길어진 것뿐만 아니라, 노란색으로 염색까지 했다. 전역한 지 아직 1년이 채 안 지났음에도 소진언의 외형 변화는 꽤 컸다. 아마 멀리서 봤다면 이게 소진언인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포 반장을 보자마자 진언이 곧장 아는 척을 해왔다.
“하나포 반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살아계시죠?”
“얌마. 누구 노인네 취급하냐.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 주제에.”
“하하하! 그랬었죠.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전역할 때 이미 형이라고 실컷 불러놓고서 이제 와서 양해 구하는 거냐.”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기로 유명한 간부가 바로 하나포 반장이다.
“막사 올라가는 길이라면 나도 같이 올라가자. 근데 이게 다 뭐냐?”
“요건 치킨이고, 이건 보쌈이고, 저건 피자입니다.”
“야, 돈 왜 이리 많이 썼냐.”
“애들 먹여주고 싶어서 많이 샀어요. 그리고 저, 취업했습니다.”
“취업? 교대 들어갈 거라며.”
“그냥…… 하다가 도중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요.”
“하긴, 사람 사는데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만 돌아가겠냐. 이 이야기는 나중에 술자리 있으면 하자.”
“예.”
하나포 반장과 함께 막사를 향해 올라가는 이들.
면회실은 위병소 바로 근처에 붙어 있다. 하나포 막사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가장 먼 곳은 제2포대지만, 제1포대도 그렇게까지 가까운 건 아니었다.
대대 연병장을 가로질러 제1포대 사열대 앞에 도착한 하나포 인원들과 소진언, 그리고 하나포 반장.
조항이 앞장서며 진언에게 다음 행보를 물었다.
“진언이 형, 행보관님한테 인사드릴 거지?”
“음, 그럴까?”
막사까지 들렸는데, 행정반을 들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소진언을 막사까지 초대한 당사자는 행보관, 강필두다. 그가 막사 방문까지 허락해 줬는데, 얼굴 하나 안 비춘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행보관님, 안에 계시지?”
“어.”
“그럼 바로 들어가자.”
“알았어. 나머지는 잠깐 여기서 대기해라. 행보관님한테 외부 음식물 반입해도 되는지 허락부터 맡고 난 다음에 다른 분과한테 돌리자.”
“예, 알겠습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먹을 것에 연관된 공문이 많이 내려왔다. 외부 음식 절대 반입 금지. 그것이 원래 9090대대의 방침이었기에 간부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다.
행정반 문을 연 조항이 먼저 복귀를 알렸다.
“행보관님, 저희 막사로 복귀했습니다.”
“진언이는.”
필두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항의 뒤에서 등장한 진언이 거수경례를 했다.
“충! 성! 민간인 소진언! 행보관님께 인사드립니다!”
“민간인이 무슨 거수경례냐. 그보다 뭔가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진언이가 사온 음식들이냐.”
“예. 아까 키 넣었을 때 말씀드렸던 치킨, 피자, 보쌈입니다.”
“병력들한테 다 돌려라. 이미 위쪽에 허가는 받아뒀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역시 필두였다. 필두가 힘 좀 쓴다면 9090대대 내부의 일은 웬만하면 그의 의도대로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
이미 대대장도 필두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국민 행보관이라 불리는 강필두의 말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대대장이라고 한들, 그런 짓은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활관 문 너머로 병사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치킨, 피자, 보쌈이란 말인가!
이런 맛도 있기에 군 생활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행정반에도 때아닌 치킨 파티가 열렸다. 군대 내에서 정말 맡기 힘들다는 치킨 냄새가 가득 퍼지자 당직병과 당직사병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포장을 다 뜯는 순간, 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진언이 형!”
“그래. 아, 맞다.”
진언이 손을 뻗어 닭 다리 하나를 잽싸게 낚아챘다.
“행보관님도 여기, 닭 다리 한번 드셔보세요.”
“음, 그럴까.”
보통은 이런 건 거절하곤 했다. 그러나 진언이 어렵게 사온 치킨인데, 그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힘들었기에 닭 다리 하나를 건네받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맛은 그닥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킨 맛을 칭찬했다.
“저, 군 생활 하면서 이렇게 맛있는 치킨 처음 먹어봅니다!”
“나도!”
맛있는 이유가 있었다. 치킨을 너무 오랜만에 접하기 때문이었다.
자주 먹다가 한동안 먹지 못하고 다시 먹었을 때, 그거야말로 천하일미(天下一味)일 것이다.
그렇게 치킨 파티를 벌이는 동안, 필두가 소진언을 향해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와라. 이야기나 좀 나누자.”
“예.”
이미 병사들과 한 번씩 인사는 다 주고받았다.
소진언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필두도 잊지 못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그간의 회포를 푸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행보관실로 들어가자,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긴 달라진 곳이 없네요.”
“달라져 봤자 사람만 달라지겠지.”
필두가 말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제1포대 행보관, 당사자라는 건 굳이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까진 없었다.
필두는 영원히 9090대대 제1포대 행보관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다른 부대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건 모든 군인들의 숙명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곳에 최소 1년 이상은 머물러야 한다. 지금 당장의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하나포 반장한테 들었다. 교대 준비하려던 거, 포기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포기한 이유가 뭔가.”
“이유는…….”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안 해줘도 된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교대 편입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던 소진언이다. 그런데 전역하고 난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게 된 걸까. 필두는 내심 그게 궁금했다.
그래도 이건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기에 꼭 말해라 닦달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소진언은 더 이상 필두의 부하 신분도 아니고 말이다.
필두에게 개인 프라이버시 정보까지 들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래도 고민이라는 게 타인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좀 무게감을 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진언의 입이 서서히 움직였다.
“여자 친구 때문에요.”
“여자 친구? 원래 있었나.”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창생이었거든요. 근데 전역하고 난 다음에 썸 타다가 사귀기로 했어요.”
“축하한다.”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사정이 있어서 결혼을 좀 빨리해야 할 거 같아요.”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해서 취업부터 먼저 한 건가.”
“예.”
“개인 사정이라는 건…….”
“여자 친구가 임신했거든요.”
“그렇군.”
주변에 한두 번 정도는 있을 법한 결혼 계기였다.
그래도 계획에 없는 임신이라 해도 진언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본인의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래도 진언은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대에 입학해서 교사가 되는 게 꿈이긴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이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포기가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을 한 거라 인식하기로 했어요.”
“좋은 현상이군.”
진언이 이렇게 멘탈이 좋은 녀석이었나.
한때 자신의 부하였다 하더라도 필두는 병사들에 대해 100% 완벽하게 다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그 사실을 지금, 유감없이 깨달았다.
“결혼식은 올해 하반기 때 하려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행보관님, 주례 맡아주실 수 있나요?”
“내가? 주례를?”
“예. 오늘 부대에 온 건, 그 부탁도 드릴 겸해서입니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결혼식 주례라니. 필두는 그렇게까지 나이를 많이 먹거나 한 게 아니었다.
물론 주례가 반드시 연세 지긋한 사람만 해야 한다는 규율이나 법칙 같은 건 없었다. 사회적인 지위만 어느 정도 받혀준다면, 누가 와서 주례를 본다고 한들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필두는 유명인사라 할 수 있었다. 국민 행보관, 강필두라는 별칭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종종 출연하는 TV 프로그램 덕분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필두를 알아보는 이들이 제법 된다. 저번 주에도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비 오는 날인데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혜정과 데이트를 해야 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행보관님!”
간곡한 부탁에 필두가 결국 항복 선언을 내비쳤다.
“알았다. 그때 일정이 된다면, 해주는 쪽으로 하마.”
“정말입니까?”
“그래. 단, 훈련 일정과 맞물리면 내가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다. 그건 알아둬라.”
“예, 알겠습니다!”
진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 *
위병소 앞.
하나포 분대원들을 비롯해 하나포 반장, 진언과 친했던 병사들 몇몇이 위병소 입구까지 진언을 배웅해 주기 위해 나섰다.
필두도 그곳에 속해 있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행보관님.”
진언과 악수를 주고받던 필두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못 물어봤군.”
“뭡니까?”
주례 제안 때문에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미처 거론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새로운 가족이 생길 텐데. 두렵다거나 하는 그런 건 없나.”
진언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사실 필두도 어찌 보면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임신이라는 결정적인 계기는 없지만, 주변에서 이제 슬슬 가정을 꾸리라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당사자인 혜정도 그걸 원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혼사가 거행되지 못한 이유는 필두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
한 번 소중한 이들을 잃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필두를 옭아맸다.
트라우마.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미래의 필두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그 와중에 진언이 필두에게 중대한 힌트를 들려줬다.
“저 혼자라면 분명 힘든 길인데, 옆에서 누군가가 같이 걸어준다면 두려움보다 오히려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필두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진언이 말하는 ‘큰 힘’의 정체를.
그것은 행복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같은 시간을,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감정이 생성된다.
필두도 한때 그 감정을 느꼈을 때가 있었으니까.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그걸로 충분하다. 그보다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라.”
“예, 행보관님! 그럼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충! 성!”
마지막도 거수경례로 마무리 짓는 소진언의 모습에 옛 기억이 오버랩 되듯 겹쳐졌다.
병장 소진언. 그리고 지금은 민간인이 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꿈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진언을 배웅해 준 이후에 사열대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춘 필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필두의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번에 하신 말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저번에?
되묻는 그의 어머니에게 필두가 재차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결혼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