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제35편 겔루 칼립스(1)
“들어갑니다.”
“왔냐.”
예의상 말을 한 내가 천막에 들어서자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는 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런 실을 보며 정말 변함없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은 나는 실의 맞은편 빈 의자에 앉았다.
“앉으라 안 했다.”
“저도 누울까요?”
실의 말에 내가 농담 식으로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실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빨리 꺼져.”
“다녀오겠습니다.”
“3일이다.”
“넵!”
실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고 이내 피식 웃는 실을 뒤로하고는 천막을 나섰다.
인사는 짧을수록 좋은 것이니 말이다.
자! 이제, 설인들을 정리하러 갈 때가 되었다.
그 생각이 든 나는 씨익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동네 마실 나가듯 아주 가벼운 걸음으로 말이다.
* * *
“후우. 겨우 도착했군.”
설인족의 영역 깊은 곳.
엘란 산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넓은 호수에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미친놈. 적진의 영역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어쩔 수 없잖아?”
크산느의 핀잔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찾는 물건이 여기 있으니 어쩌겠는가?
몰래 들어와야지.
-그나저나 길은 잘 알고 있네?-
“후후. 엘로나랑 데이트하러 자주 왔거든.”
전생에서 카자르로 인해 설인들과의 전쟁이 끝난 후.
나는 이곳에 정말 자주 왔었다.
새하얗게 쌓인 눈 사이로 아름답게 펼쳐진 호수.
이곳은 엘란 산맥은 물론, 북부 전체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이었기에 나와 엘로나는 자주 이곳에 와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더욱이 이곳은 나와 엘로나의 첫 키…….
-미친놈.-
“응?”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을 붉히던 나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크산느의 욕설에 인상을 찌푸리며 크산느를 바라보았다.
-음흉한 미소나 지워.-
“크흠.”
아…… 나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나 보다.
크산느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고 크산느는 그런 내가 한심한지 파닥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슬리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봐준다.
아무튼.
나는 호수에 들어가기 전, 겉옷을 벗고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수영하기 전에 준비운동은 필수이니 말이다.
-설마…… 들어가는 거냐?-
준비운동을 하는 나를 보며 크산느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짓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보물이라 하는 것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는 법이야.”
-여기는 호수다.-
“거기서 거기지.”
태클을 걸어오는 크산느를 가볍게 무시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대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풍덩!
“아우~ 시원하다!”
냉 속성 내성으로 인해 뼈가 시릴 정도의 호수 물은 정말 시원했다.
한여름에 계곡 물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기분이 아주 좋았다.
-훗.-
그런 나의 모습이 웃겼던지 크산느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이내 호수 깊은 곳으로 사라진 나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호수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미친.
끝이 없었다.
지금 10분 정도 숨을 쉬지 않은 채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고, 물의 무게로 나의 몸이 무거워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괜찮은 거냐?-
“으음!”
크산느의 물음에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하여 보여주고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아직은 버틸 만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후.
“푸하하! 씨X!”
죽는 줄 알았다.
나는 호수의 옆쪽, 만들어진 인공의 동굴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들어섰고 이내 만들어진 길을 따라 헤엄치니 빛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면 위로 올라와 동굴의 바닥에 올라선 다음 숨을 헐떡거리며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 이곳에 왔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아…….”
아무래도 전생의 카자르한테 낚인 것 같았다.
뭐? 수영해서 5분 만에 도착했다고?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다.
-괜찮냐?-
그런 나를 보며 크산느가 파닥거리며 물었고 나는 대답할 힘도 없었기에 손을 휘저어 주고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아직 공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신기하군.-
그런 나를 내버려둔 채 파닥거리며 동굴의 주위를 살펴본 크산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굴 벽에 박힌 보석.
어둠을 밝혀주는 이 보석은 아무 공급 장치도 없는데 저절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대의 물건이야.”
10년 후 마나 스톤이라고 불릴 물건.
마나석보다 더 응축된 마나가 들어가 있으며 긴 세월이 흘러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아도 저절로 마나가 조금씩 사라지는 마나석과는 달리 영구성을 가진 마나 스톤.
어두운 밀실을 밝히기에는 최고의 물품이었으며,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해, 마나 스톤 한 개로 일개 평민이 남작의 작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나 스톤이 이 동굴에는 수십 개가 벽에 박혀있었다.
나는 크산느에게 마나 스톤을 간단하게 설명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나 스톤으로 밝혀지는 한 개의 길.
저 길 너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는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제국의 정원보다 넓은 장소에 도착했다.
“와아…….”
걸음을 멈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오른쪽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 푸른색의 배경으로 이루어진 벽에는 거대한 드래곤이 새겨져 있었다.
드넓은 바다.
그곳의 위에서 하늘을 날며 포효하는 드래곤.
마치 살아있는 듯 역동적인 모습에 나는 감탄하며 뭐에 홀린 듯이 벽면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벽을 만졌다.
번쩍.
우웅!
그 순간!
조각되어있는 드래곤의 두 눈에서 빛이 나더니 동굴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전생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 상황에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크산느는 당황하지 않은 채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앞에 봐.-
놀라서 허둥대는 나의 귀에 들리는 크산느의 목소리.
그런 크산느의 말에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축복이 있기를.-
푸른 머리 푸른 눈의 아름다운 여인.
드래곤이 사라진 벽면, 그 앞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감히 그녀의 행동에 반항할 엄두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그 순간.
여인은 빛이 되어 사라졌고, 여인이 사라진 곳에는 아름다운, 대검이 하나 바닥에 꽂혀있었다.
“찾았다.”
내가 찾은 물건.
설인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물건이 나의 눈앞에서 자신의 고운 자태를 자랑하듯 당당하게 서 있었다.
검은색의 손잡이,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색의 검신, 검신 정중앙에 적혀진 푸른색의 고대문자.
고대문자를 읽을 수 있는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푸른색의 문자를 읽었다.
“겔루 칼립스(gelu chălybs)”
* * *
북부, 엘란 산맥의 깊은 절벽.
“북해신이시여…….”
그곳에 천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중 가장 한 가운데.
높은 제단에 올라선 한 노인이 푸른색의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북부를 침범한 야만인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그 노인은 하늘을 향해 아련한 목소리로 말하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힘을 주시옵소서!”
노인이 지팡이를 흔들자 아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말을 따라 했다.
판게아 대륙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신을 찬양하는 모습.
판게아 대륙인들은 기본적으로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이 등장한 적도 없으며, 신이 인간들에게 도움을 준 적도 없었다.
가끔, 자신이 신의 아들이니, 신이니 하는 인간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황제, 또는 왕의 명령에 의해 제재당했다.
무고한 백성들을 홀려, 정말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나아가 가정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건이 많이 있었기에 대륙에서는 좀처럼 신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데 북부의 깊은 곳. 문명과 조금 떨어져 지내 보이는 이곳에서 인간들이 신을 찬양하고 있었다.
“올라오라.”
지팡이를 흔들던 주술사가 이내 지팡이를 멈추고.
제단 아래, 아름다운 옷을 입은 한 소녀를 보며 말하자 소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계단을 오른 소녀는 천천히 제단의 정중앙으로 걸어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은발에 은색의 눈. 새하얀 피부. 아름답지만 아직은 어린 소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단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았다.
“후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중년인은 두 눈을 감았고 주변에 있던 청년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제단의 중앙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부디…… 설인족에게 영광이 있기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소녀는 이내 결심을 한 듯 손에 힘을 주고는 단검을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덥석.
그 순간.
소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움직이게 못 하는 것을 느끼고는 두 눈을 떴다.
굳은살이 가득한 사내의 손.
그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소녀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손의 주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검은 머리에 붉은색의 눈이 너무나도 인상적인 잘생긴 미남.
그가 자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자살하려고 그래?”
* * *
“후우. 다 챙겼지?”
-너도 참 어지간하다.-
겔루 칼립스를 챙긴 나는 미리 준비해놓은 가방에 마나 스톤을 넣으며 크산느에게 물었고 크산느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자식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말이다.
이 정도면 흉작이 들었을 때, 전 백성에게 3년간 밀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그냥 놔두고 가라고?
그런 미련한 짓을 하면 벌 받는다. 벌 받아.
아무튼 그렇게 가방에 모든 마나 스톤을 챙긴 나는 습관적으로 나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졌다.
내가 마나를 넣으면 이 반지는 아름다운 대검, 겔루 칼립스로 변한다.
역시 신물이다.
북해신의 물건이라 전해지는 겔루 칼립스.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동글에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좋은지 따뜻한 태양이 나를 비추었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야 저기 뭐냐?-
그렇게 햇빛의 따사로움을 즐기던 나는 의문 섞인 크산느의 목소리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은발 은안의 한 소녀가 제단 같은 곳에 오르더니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전생에서 15살.
내가 자살하려고 시도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야 저거 말려…….-
크산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이미 소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덥석.
그러고는 소녀의 심장으로 움직이는 손을 잡았다.
나의 행동에 소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자살하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