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997년, 응답하라(1)
“뭐하시는 겁니까?”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덩치 두 명과 다른 직원들이 전부 달려들었다. 반지는 아무리 힘을 써도 빠지지 않았다. 어쩌지?
이렇게 그만둘 수 없다. 놈들을 막으려면 인질극이라도 벌여야 한다. 나는 가위를 들고 김주원의 목에 댔다. 어차피 가기로 했으니, 이곳에서 일은 전부 사라질 테니.
“원하는 게 뭡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잠시만, 잠시만 뒤돌아 있어!”
나는 가위를 김주원의 목에 더 세게 눌러댔다. 김주원의 목에 작은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자, 다들 겁먹은 듯 손을 저었다.
“아, 알았으니까 상처 더 내지 마시고요.”
다 죽어간, 식물인간이 된 회장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저렇게들 하는지. 재벌의 힘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저들이 뒤를 돈 사이에, 반지를 빼낼 물건을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가위로 김주원의 손가락을 잘라야 하니까.
나는 주변이 있는 것들을 살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딱히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다시 가위와 바리캉을 보던 나는 바리캉 오일을 생각해 내었다.
“오일!”
나는 가지고 온 가방을 살폈다. 분명 여기 어디에 두었는데?
바스락, 바스락.
내가 김주원을 놔두고 뭔가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본 덩치들이 눈치를 살폈다. 빨리, 빨리 찾아야 하는데!
찾았다! 휴대용 바리캉 오일을 손에 들고 있는데, 덩치들이 달려들었다.
헙! 젠장, 캡슐을 삼켜버렸다.
나는 재빨리 오일을 까서 김주원의 손에 발랐, 아니 뿌렸다.
“으윽! 제발.”
덩치들이 나를 붙잡았지만, 김주원의 손가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반지를 빼려하자, 손가락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빠드득.
으악!
김주원의 손이 부러지고, 결국 반지도 빠져나왔다. 만세! 덩치들이 달려들고, 내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덩치 두 명이 내 몸에 올라타 갈비뼈까지 으스러지는 바로 그때,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가자! 1997.
* * * * *
순간 주변이 전부 한 공간으로 빨려들더니 이내 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주변이 전부 바뀌고 20대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두 번째 회귀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생경하게 느껴진다.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느낌이랄까.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바로 피카디리 극장이었다. 종로의 상징 피카디리 극장 앞이라면, 분명 미용학원을 가고 있는 중이다.
“와 피카디리네. 미용학원 가는 중이구나.”
그에 답하듯 나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었다. '미용사 시험을 앞두고 손에서 가위를 놓지 마'라는 학원 원장님의 조언을 따라 매일 손에 가위를 들고 다닌 나였다. 나의 열정은 만렙이었지만, 미용사 시험을 3번이나 떨어졌었다. 학원을 자그마치 6개월이나 다녀서 겨우 합격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인가?”
나는 피카디리 극장에 걸린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극장 간판에는 < 고스트 맘마 > 가 걸려있었다. 옷차림으로 봐선 2월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첫 시험 치기 전이구나!”
나는 학원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첫 회귀에는 시작부터 그녀를 만나러 갔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빠! 오빠 같이 가!”
“응? 이 목소리는?”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박선정, 나랑 결혼했던 여자다. 지금은 둘이 한창 썸을 타고 있던 시기다. 이 여자랑은 결혼해서 오만정이 떨어졌고, 아이도 없었다. 거기다 내 친구랑 바람까지 피운 여자다. 만나서 크게 득이 될 게 없는 사이다.
“왜 그렇게 뛰어다녀 힘도 좋아 오빠는.”
“힘?”
이혼 전, 나를 보면서 돈도 없고, 힘도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박선정이 지금 날 보며 힘이 좋단다. 개가 웃을 일이다.
“학원 같이 가자.”
박선정이 내게 몸을 부비며 팔짱을 꼈다. 으윽, 예전 같으면 그놈의 힘이 불끈 솟아올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냥 이혼한 전처다. 같이 학원에 가는 건 더욱 할 짓이 아니다. 지금 깨끗하게 포기를 시키는 게 그녀에게도 나을 것이다.
“이거 좀 놔줘.”
나는 박선정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최대한 차가운 표정을 짓자. 지금 지금이야!
박선정이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는 그때, 나는 정말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젠장. 너무 추워서 눈물이 났다. 어? 이럼 안 되는데?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아니야, 일 없다고!”
추워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냅다 뛰는 수밖에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으니, 박선정도 나를 포기하겠지 하며.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했다. 10년을 살았던 박선정의 마음도 알 수가 없으니……
* * * * *
“나야 왔어? 어 선정이도 같이 오네……. 안녕!”
엘리베이터 앞, 유승철이 나와 선정이에게 다가왔다. 그땐 승철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을 터라 그냥 넘겨왔던 저 눈빛…… 승철은 선정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나를 속이고 바람을 피웠었고.
“어 그래.”
“안녕.”
선정은 승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학원을 다니던 여자애들이 거의 승철을 좋아했는데, 선정이만은 유독 승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승철의 말에 늘 단답형으로 대꾸했다.
선정이 날 두고 승철을 선택했다면, 내게 이혼의 딱지는 없었을 텐데. 저 둘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었다.
“자자, 그만 떠들고, 준비해야지 이것들아.”
미용학원은 미용의 가장 첫걸음이다. 즉, 여기 모인 애들이 전부 초짜라는 이야기다. 애들 실력은 거의 고만고만하다. 나도 그러했다. 아니지, 조금 모자랐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가끔씩 특출 난 애들이 있긴 하다. 바로 승철이 같은 케이스.
“역시 승철이는 타고났어. 이 섹션 뜬 것 좀 봐 예술이야 정말!”
원장은 승철의 레이어드컷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치려던 원장은, 나의 가위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가위질을 왜 거꾸로?! 손 비잖아!”
나는 그제야 거꾸로 가위질을 하고있는 걸 발견하고 바로 잡았다. 그때 당시 가위질을 거꾸로 하는 법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충격이었을 것이다. 원장은 놀라서 나의 손을 붙잡았다.
“상처는 없지?”
“네 괜찮아요!”
원장은 나의 옆구리를 손으로 꼬집었다. 나는 예전에 원장이 못하는 애들 옆구리를 꼬집던 생각이 났다. 지금도 결국 잘못했다는 뜻이 아닌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아, 미용만 30년이 넘었다고!
“넌 파마도 잘 못 말면서 겉멋만 들어 가지고. 가위 돌린다고 다 일류 미용사니? 그깟 기교 부리지 말고 시간 안에 완성이나 해라. 승철이한테 배워 좀.”
나는 원장의 말을 대충 흘려듣고 말려고 했는데, 승철에게 배우라는 말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마누라도 빼앗아 간 놈에게 회귀 첫판부터 밀릴 수는 없지.
“제가 유승철보다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원장은 물론 주위의 학원생들이 전부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장은 늘 '지금까지 유승철보다 빨리, 정확하게 완성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원장은 나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호호호, 니가 정말 더 잘한다면 내가 학원비를 안 받을게!”
“그 말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만약 지면 어떡할래?”
“지면 승철이 학원비를 제가 대는 걸로 하죠.”
모두가 나의 말에 놀랐고, 승철 또한 당황하였다.
원장은 기가 죽어서 안 할 줄 알았던 내가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순간 움찔했다. 사실 나는 어제까지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던 그저 그런 미용사 지망생일 뿐이었으니까. 내 실력으로는 1년을 다녀도 자격증을 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그런 내가 자신만만하게 승철이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가지쯤 그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원장은 내가 전부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승철이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어차피 후회할 조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스파넬, 이사도라, 원랭스, 롤, 레이어드, 파마까지 전부 하고 빨리, 정확하게 마친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자.”
“네 그러죠.”
원장은 내가 흔쾌히 허락하자 더욱 놀라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봐왔던 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니까. 주변의 애들도 전부 놀라고 있었다.
승철은 완전히 바뀐 내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고, 선정이는 내 모습을 보고 호감을 더했다. 피곤하게도 말이다.
* * * * *
학원 정식 수업이 끝나고, 원생 절반이 남았다. 다들 승철과 나의 시합을 보기 위해서 남은 것이었다.
“원칙은 단 하나 완벽하고 빠르게 완성 하는 거야.”
이까짓 거 껌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가발을 만져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모발과 가발은 뿌리부터가 다르다. 어쩌면 승철에게 좀 더 유리한 시합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승철에게 만큼은 이겨야 한다. 그도 나중에 유명한 미용사가 될 테니까, 애초에 꺾어놓는 것이 좋았다.
“난 당연히 니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도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더 노력할 필요도 없어.”
원장은 승패를 이미 결정한 듯 여유로웠다.
“오빠 꼭 이겨!”
선정이 나의 뒤에서 응원을 해 왔다. 아까 느낀 건데, 선정의 눈빛이 좀 더 느끼해졌다. 윽, 그건 아니잖아.
“자 이제 시작하자 스파넬부터야 알지? 시이작!”
나와 승철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진중한 모습으로 가발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준이 운영하던 미용학원에 강사로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각 스타일을 정확하고 빠르게 자르는 팁을 여러 번 설명했고, 옆에서 연습도 도와줬었다. 현재의 기술보다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방식으로 자르는데, 실패할 리가 없었다. 나의 속도와 정확성을 본 원장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가위질이 예술이네.”
“쟤 언제부터 저렇게 잘했어?”
학원생들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승철은 내가 자기보다 빠르게 해내자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나의 실력으로는, 승철이 콤아웃(마무리)까지 마쳐도 반 이상 자르지 못해왔기에 더욱 그랬다.
“너는 다음 커트 들어가고, 승철이도 금방 하겠네.”
원장은 당연히 승철이 이길 줄 알고 느긋했지만, 그 후에 이어진 커트와 롤을 거치면서 격차가 벌어지자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승철이 왜 평소보다 느린 거야? 평소대로만 하라니까?”
학원생들도 둘의 격차가 벌어지자, 다 보지 않고 집에 가기 시작했다. 승철은 처음 느껴보는 패배감에 흥분하더니 급기야 빗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승철아 시험장에서 이러면 감점이야!!”
그에 반해 나는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레이어드 커트에 들어갔다. 이 커트를 마치면 파마 와인딩에 들어간다.
원장은 승철이 가장 잘하는 것이 파마 와인딩이라 내심 역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마 와인딩이야말로 20년 넘게 기술을 연마한 나에게 찰떡인 기술이다. 동네에서 아줌마들의 머리를 신나게 말아왔던 나의 기술을 일개 학원생이 따라올 리가 없었다. 나는 파마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손을 털었다. 승철은 자존심이 상하여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다.
원장은 롯드를 들춰가며 단점을 잡아내려 애썼지만, 단점이라곤 1도 없는 완벽한 파마임을 느꼈다. 승철은 이제 겨우 롯드 10개 정도만 말았을 뿐이었다. 원장은 내가 승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니가 이겼다 그래 알았어. 학원비 내지마”
“학원비 말고 다른 거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내 말에 원장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드리워졌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