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강남 미용실(1)
나는 얼떨결에 김소연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김소연은 기분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 여드름 모델 하는 겁니다?”
“네 그럼 나도 부탁 좀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나는 한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을 메이크업 모델로 섭외하게 되었다!
거기다 지긋지긋한 여드름을 치료해 준다니, 그것도 그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인 그녀가 말이다. 이건 정말 행운이었다.
* * * * *
회귀 후, 매일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으니, 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회귀하기 전에 먹었던 주식과 땅 정보가 빠듯하게 적힌 캡슐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으으.
더럽고 구역질이 나는 일이었지만, 그게 없다면 재벌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똥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캡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세!
이제 돈 버는 방법이 손에 들어왔으니, 자본금을 얻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아버지에게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IMF가 터지기 전이니까, 아버지도 돈에 여유가 있을 때였다.
“아버지, 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휴일, 온 가족이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가족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말하면 아버지가 들어 줄 확률이 좋으니까.
“그래, 뭘 부탁하려고?”
“돈을 좀 융통해 주셨으면 합니다.”
“뭘 하려고?”
“투자를 좀 하려고.”
“안 된다.”
“아버지, 끝까지 말을 좀 들어보시고.”
“너 미용만 하게 해주면 아무 소리 않고 할 거라고 하지 않았니?”
“아니, 투자하면 무조건 되는 게 있거든요.”
내가 말했지만, 전형적인 투자 망나니의 말투다. 먹힐 리가 없어 보였다.
“그만 닥치고 밥이나 먹자.”
아버지는 내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워낙 그런 분이시지. 그래서 어음을 믿었던 거고, 그래서 망하신 거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음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어음 때문에 인생이 전부 망가진 것이니, 미리 언질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음 너무 믿지 마세요. 그거 현금 아니잖아요.”
“갑자기 뭔 소리니? 니가 뭘 안다고?”
“준수야, 밥 잘 먹다가 갑자기 왜 그러니?”
어머니가 우리를 말리고 나섰다. 엄마는 싸우는 것이 너무 싫으신 평화로운 분이셨다. 그래서 그 무자비한 폭력을 참고 참으셨던 거고.
“오빠 요새 좀 이상해. 저번에는 이상한 테이프 다 버렸다니까?”
“야!”
얼마 전에 내 방에 있던 뭐한 비디오와 사진들을 전부 갖다 버렸는데, 그걸 또 준희가 본 모양이었다. 맨날 날 감시하나보다. 하긴, 그래서 집을 나와 선정이 집에서 살다시피 했었지.
“밥이나 먹자. 밥맛 떨어진다.”
아버지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하였다. 그땐, 작은 일에 화내는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힘들 것 같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따르르릉.
“여보세요, 어 근영엄마. 나 설거지만 하고 갈게. 좀만 기다려.”
요맘때 전화를 하는 사람은 근영 엄마다. 아, 그러고 보니 근영 엄마가 곗돈 들고 튀기 전이구나?
그렇다면, 엄마가 곗돈을 아직 못 받았다는 소리다. 근영 엄마가 엄마의 곗돈을 불려준다고 받아 간 다음날 도망쳤으니까. 그건 조만간 엄마에게 목돈이 생긴다는 이야기고.
“엄마, 설거지 제가 할게요.”
“응? 니가?”
나는 얼른 달려가서 엄마의 옆에 섰다.
엄마는 생전 처음 아들이 설거지를 도운다는 이야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엄마는 돈 없다. 알지?”
“곗돈 조만간 타지 않아요?”
“헉, 그걸 니가 어떻게?”
엄마는 몰래 빼돌린 비자금으로 곗돈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근영 엄마가 날랐을 때 아버지 몰래 혼자 울고 그랬었지.
“곗돈 타면 저 좀 빌려 주세요 딱 한 달만.”
“아…… 정말 돈이 불어나는 게 맞는 거니?”
“네, 진짜니까 걱정 마세요.”
“하, 그래 알았어. 조만간 줄게. 근데 정말 한 달만 이다?”
“네, 알았다니까요.”
이걸 두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다. 근영 엄마에게 돈 뜯길 염려도 차단하고, 내 투자금도 생기고.
* * * * *
미용사 시험 날.
시험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나는 흐트러짐 없는 실력으로 임했다. 너무 정확하고 빨라서 시험관이 감탄하며 나의 솜씨를 구경할 정도였다. 가발로 진행되는 모든 시험이 끝나고 메이크업 타이밍이 되자 모델들이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김소연 한의사가 등장하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가 나의 곁에 오자 승철이가 매우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그 정도로 예쁜 여자를 메이크업 시켜준다는 건 모두가 부러워할 일이었다. 예쁘고 피부가 좋으면, 대충 찍어 발라도 예뻐서 웬만하면 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학원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휴대폰도 없는데 언제 들었는지 다들 같은 말을 해댔다.
“미스코리아 같이 생겼다며? 언제 만난거야?”
“그냥 미스코리아래 대박 예쁜!”
“그래서 얼굴이 폈구나!”
“여자 친구 아니야 그냥 모델 해준 거야.”
“거봐 여자 친구 아니랬잖아.”
선정이는 그들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시험장 건물 앞에 웬 승용차가 섰다. 차에서 클락션이 울리자 다들 그 차를 바라보았다.
차 창문이 내려가더니 김소연이 나를 불렀다.
“빨리 타 가게!”
“아 네! 나 간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달려가 김소연의 옆자리에 탑승했다. 학원생들은 전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정이의 얼굴이 질투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나중에 안 일인데, 김소연 덕분에 선정이가 날 깨끗하게 포기했다고 한다.
“뭐야 애인 맞잖아.”
“와, 재 뭐냐 갑자기 너무 잘나가!”
승철은 기분이 상해서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선정이가 나를 보며 화가 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게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져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 * * * *
“어머, 이게 누구야?”
엄마와 같이 은행에 갔는데, 근영 엄마가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마, 근영 엄마가 웬일이야?”
우리 어머니, 연기 정말 못하신다. 딱 봐도 근영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서 이 곳에 온다고 말하신 것 같은데, 올지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안녕하세요.”
웃는 상, 깔끔한 옷차림,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근영 엄마. 딱 보면 호감형이고, 자세히 보면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양새다. 본래 20대의 나는 근영 엄마를 좋아했었지. 용돈도 가끔 주고 맛있는 피자도 만들어 주었으니까. 피자가 흔하지 않은 시기라서 더 좋았었나 보다. 지금의 나에게는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근데 너는 미용사 시험은 합격했니? 그런 중요한 일을 앞두고 다른데 신경 쓰면 못쓴다?”
“잘 봤어, 그치?”
“잘 봤죠. 당연히.”
“그거야 봐야 아는 거고.”
“저기요? 지금 안 되길 바라시는 말투로 들리는데요?”
“어머, 얘는 날 뭘로 보고. 오호호.”
“그러게 근영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아, 우리 어머니 너무 순진하시다.
아무튼 이 여자는 내가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지금 쫓아 온 것이 눈에 선했다. 이 여자는 온갖 감언이설로 엄마를 속여서 결국엔 돈을 가져갈 것이다. 엄마는 그런 것에 당하고도 남을 멘탈을 가졌으니.
내게 돈을 준다는 약속을 받아내지 않으면 밤이라도 샐 기세다. 그렇다면, 나도 이 여자에게 사기를 쳐주면 되겠지. 바로 공수표를 날리는 거다. 여기 은행에서 돈이 나오면, 그걸 내가 일단 가져가고, 이 여자에게는 며칠 후에 준다고 하면 될 것이다.
“내가 돈놀이를 좀 해봐서 아는데, 너 투자 한다는 데가 어디니? 그거 내가 알아봐 줄 테니 나중에 돈 받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냥 며칠만 쓰고 드릴게요. 그럼 되잖아요?”
“며칠이라니? 며칠 만에 휴지조각이 될 수 도 있어! 너 엄마 피같은 돈을 막 날리고 그럼 큰일 난다?”
“어머나, 그래?”
“뭔지 당장 말해. 안 그러면 한 푼도 못줘.”
“그래, 아들. 뭔지나 좀 알려 줘봐.”
세상에, 저런 쓰레기 같은 여자를 봤나? 지가 등쳐먹은 아줌마들이 몇 명인데?
저 여자는 하루도 내게 돈을 뺏길 마음이 없나보다.
그렇다면, 당장 내일 준다고 하고 일단 돈을 가져가는 게 좋겠다. 은행 문 열기 전에 준다고 하면 우릴 보내주겠지.
“아, 알았어요. 일단 돈 찾아서 가져가고 내일 아침에 찾아오심 바로 드릴게요.”
근영 엄마는 내가 넘어온 것이라 여기고 금방 눈빛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내심 불안해하던 눈빛이었는데, 내 말에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고, 어머니.
“뭘 하루를 갖고 있으려고 하니? 그냥 주지.”
“나도 돈 냄새 좀 맡으려 구요.”
“호호호호호, 돈 냄새 죽이지. 그래 오늘 밤은 돈 냄새 좀 맡아보고 내일 꼭 줘야 한다?”
“네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근영 엄마를 쫓아내었다. 내일 새벽에 나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근영 엄마 애를 좀 태워주려면 그 수밖에 없다.
아 물론 근영 엄마에게 돌려줄 것이 남았다. 사기꾼을 그냥 보내 줄 수 는 없으니까.
* * * * *
“합격이다!”
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했다. 원장은 두말하지 않고, 나를 <스타일 헤어>에 추천해줬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잘 해봐. 근데 넌 그곳에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거니?
“아……. 성공하려구요 하하.”
“그래 성공 좋네. 화이팅이다 녀석.”
원장은 (스타일 헤어)측에서 주는 많은 혜택을 접어두더라도,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학원생 추천에 신경을 썼었다. 자신이 추천한 학원생이 잘 나가야, 학원의 홍보가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추천에 앞서, 내 피부 상태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소연 덕분에 내 피부가 아주 좋아졌으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 여기구나!”
강남 한복판에 100평이 넘는 규모의 미용실, 직원만 수십 명에 달했다.
미용실 입구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들어섰다. 그동안 김소연 원장에게 관리를 받으며, 외모뿐 아니라 자존감까지 상승해 있었기에 면접쯤은 우스운 일이었다.
미용실에 들어선 나는 실장의 안내에 따라 원장실로 향했다. 미용실 직원들이 한 번씩 나를 쳐다보았다. 문득 나의 친구도 전에 이렇게 면접을 보러 왔다고 말한 기억이 났다. 그때 뭔가가 거슬려서 바로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그때 이유가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시작해야 미용사로서 제대로 날개를 펼칠 수가 있다. 이곳에선 동료뿐만 아니라, 유명한 인사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장의 이름은 ‘한선호’. 작은 키지만 다부진 체격이고 선해 보이는 인상 속에 강인함이 느껴졌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1대 남자 미용사 바로 뒤인 2대쯤 되며, 이 미용실에서 수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사의 헤어를 맡으며 미용계를 주름잡는 대단한 인물이다. 이 사람 밑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대학으로 치자면 서울대를 나온 셈이다. 미용계에선, 이곳 출신인 것만 말해도 1절은 먹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키고 크고 인상도 좋네. 괜찮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바닥이 워낙 힘들고 박봉인 건 알제?”
“네 알죠.”
“오래 버티지 않으면 곤란하데이.”
“네 걱정 마세요.”
“마지막 조건이 있다.”
“네 말씀만 하세요!”
“우리 샵에서는.”
나는 순간 기억이 났다. 친구가 미용실을 박차고 나갔던 이유가!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