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매직약을 독점하라(3)
“일본을 같이요?”
“그래. 나는 가서 화장품 쇼핑하고 니들은 가서 일본 제품 회사에 가는 거지.”
시세이#는 화장품에서도 알아주는 회사였지만, 헤어제품 쪽에서도 알아주는 제품을 많이 만들었다. 김성순 여사는 화장품을 사러 가고, 나와 김 실장은 헤어제품을 구하러 가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김 실장과 나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미용 재료상으로서의 위기를 벗어날 기회임은 물론이고, 유 사장을 견제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가야한다.
“그럼, 지금 당장 가시죠.”
“엥? 정말이야? 나야 땡큐지 가서 내 머리를 해준다는 뜻이잖아?”
“물론이죠. 여사님 머리는 언제든지 제 몫이니까요.”
“좋았어. 내일 당장 떠나자고. 어머, 전담 미용사까지 데리고 여행이라니 좋아라.”
김성순 여사는 신나하며 짐을 가지러 갔다. 김 실장과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정말 다행이네 진짜.”
“저분이 외모에 관심이 워낙 많으셔서 아들한테 의사 때려치우고 화장품 회사를 차려보라는 말까지 하셨어요. 하하.”
“그나저나 일본말 하나도 모르는데 큰일이구만.”
“책이라도 사서 가면 되겠죠.”
우리는 일본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한참이나 의논하고서 집에 돌아갔다.
* * * * *
1998년의 도쿄는 1998년의 서울보다 더욱 도시적이었다.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화려한 겉모습의 도쿄.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헤어스타일도 천편일률적인 서울의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분방했고, 활기가 넘쳤다.
2021년에야 서울이 더욱 발전하고 멋지고, 세련되어졌지만 그때 당시에는 도쿄가 더 세련되었었다. 일본에서 나온 잡지를 사서 보면, 향후 1년 뒤에 서울에서 유행을 할 정도니 두 도시의 차이는 엄청났다.
사실 대한민국이 일본의 유행 선도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2021년의 대한민국은 여러 의미에서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와, 마치 10년 뒤의 서울을 보는 것 같네요.”
“엥? 그게 뭔 소리야? 서울이 도쿄를 따라잡으려면 20년은 족히 걸릴걸?”
“맞아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20년 정도 뒤쳐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데요. 10년 뒤에 딴소리하지 마시죠 들.”
10년까지도 기다릴 필요 없이 2002년만 되어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 사람이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세이# 본사인 히가시신바시에 도착하였다. 시세이# 본사가 있는 시오도메 타워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기야, 시오도메 타워. 저 앞에 나와 있구만.”
김여사님이 가리키는 시오도메 타워 앞에는 웬 대머리 아저씨가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
대머리는 제일교포 2세로 한국어는 약간 서툴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김여사님이 말하던 세시이* 간부가 바로 그 대머리였다.
“킴요사님이 어찌나 칭찬하셨는지 모립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스무니다.”
“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머리는 친절하게 웃으며 김여사를 포함한 세 사람을 데리고 회사로 들어갔다.
“사장니문 현재 만나는 것은 힘드를 것 같스무니다. 그래서 지금 그 마법의 스뜨레이뜨 담당자이신 무라까와 쓰지마상을 만나보시고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될 것 같스무니다.”
“그래, 고생했어.”
“금방 온다고 해쓰무니다.”
세 사람은 매직 스트레이트 담당자인 쓰지마상을 만나려고 사무실에 앉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담당자가 30분이 다 되도록 안 오는 것이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안 와?”
“오겠죠, 뭐.”
세 사람이 조금 기분이 상해 있을 무렵, 쓰지마상이 들어왔다. 쓰지마는 거만한 얼굴로 들어와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나는 그의 거만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주세요.”
쓰지마가 나의 말을 자르며 자기 할 말을 툭 뱉자, 대머리가 난감한 얼굴로 쓰지마를 쳐다보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한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어서 통역하세요. 저것들이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니까.”
대머리는 얼굴과 이마까지 벌게지도록 당황하였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까지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때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을 많이 무시했었다. 대머리가 제일교포 3세로 간부가 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저 쓰지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듣도 보도 못한 미용실에, 주식회사도 아닌 사업자와 꼬부랑 할머니까지 같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냥 통역해 주세요.”
“그니까, 누가 봐도 저 스끼가 우릴 무시하는 게 느껴지네, 쌍노무시끼.”
“아, 미안하무니다. 저 스끼가 워낙 싸가지가 없스무니다.”
대머리의 말에 세 사람이 피식 웃었다. 쓰지마는 세 사람이 웃자,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날 가지고, 저것들이 웃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한국 사람이 워낙 웃는 상이라 그렇죠.”
“기분이 나쁘군요. 오늘은 더 말을 할 가치가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해주세요. 난 이만 바빠서.”
쓰지마는 그렇게 말해놓고 휙 돌아섰다. 나는 화가 난 얼굴로 쓰지마를 붙잡았다. 쓰지마를 포함한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쓰지마는 순간 움찔했지만 고개를 더 뻣뻣하게 쳐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례하게.”
“당신들 약만 개발했지 제대로 사용하는 법도 모르잖아! 매직스트레이트도 기술이 있어야 제대로 된 머리를 만들 수 있어. 내가 당장 저 할머니 머리를 완벽한 일자로 만들 수 있거든!”
대머리는 나의 말을 쓰지마에게 빠르게 전달했다. 쓰지마는 나의 말에 약간 동요하는 것 같았지만, 특유의 비웃는 표정은 여전했다.
“당신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당신들과 거래를 나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회의를 하고서 답해 줄 테니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쓰지마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는 냉정하게 나가버렸다. 나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고 서 있었다. 그 와중에 김여사는 조금 삐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할머니라고 한 것이 마음에 쓰여서 였다.
“어떻게 나한테 할머니라고 할 수가 있어. 내가 안티에이징에 얼마나 신경 쓰는데!”
나는 그제야 김여사에게 실수한 것을 깨닫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제가 흥분을 해가지고.”
“몰라잉.”
“나도 죄송하무니다 여사니무. 저 시끼가 원래 싸가지가 업스무니다.”
* * * * *
세 사람은 일단 하루 동안 도쿄에 머물기로 하고 일어났다. 회사 복도를 지나가다, 실험실 같은 곳에서 곱슬머리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직 기계도 처음 나온 그 기계가 아닌 여러 가지 버전으로 실험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아직까지 매직약을 활용한 가장 정확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저것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는 쇼핑하러 돌아다니면 되는데 두 사람은 뭐 하고 있을 거야?”
김여사가 선글라스를 끼면서 물어보았다. 김여사의 원래 목적은 쇼핑이니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도 도쿄를 돌아다니면 되는데,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는데다, 지리도 모르고, 가고 싶은 곳도 딱히 없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딱히 가고 싶은데도 없어서,”
“나도 돈을 많이 안 가져와서.”
나는 쉬는 동안 뭔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둘러보다가 대머리 간부를 보고 할 일이 생각났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데, 시간이 날 때 그의 머리를 해주면 보답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할 일이 있겠네요.”
대머리는 내가 자기를 쳐다보자 멋쩍게 웃으며 다른 곳을 둘러봤다. 나는 대머리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이사님, 제가 파마를 좀 해드려도 될까요?”
“네? 제 이 빡빡이 머리를 파마해주시무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무니까?”
“아, 저 머리에 파마하면 목도리 도마뱀 될 것 같은데?”
“와하하, 사모님 그게 무슨”
대머리 이사님은, 가운데 머리가 없고 이마부분만 조금 길게 길어져 있었다. 가운데만 제외하고는 전부 길게 나 있어서 꼴이 그다지 멋지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몇 달째 머리를 자르지도 않은 머리를 젤로 쫙 붙여서 뒤로 묶어놓은 괴상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머리를 파마하면 정말 목도리 도마뱀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진짜 멋지게 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제 머리는, 도쿄 유명 미용실에서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스무니다. 도대체 무슨 파마를 해주신 다는지 모르게 스무니다.”
나는 자신 있다는 얼굴로 대머리 이사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 시절 기술로는 좋은 방법이 없을 테지만, 미래의 기술로는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었다. 그냥 보답을 하는 차원으로 대머리 이사의 머리를 한 번만 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오늘 거래도 없던 일로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준수씨, 그건 아니지.”
“그래. 저 머리를 마음에 들게 어찌 해? 한 원장이 와도 안될 것 같은데?”
“진짜, 자신이가 이쓰무니까?”
“네! 저만 믿으세요.”
“좋스무니다. 그럼 머리가 맘에 들면 두 분 우리 집에서 주무시도록 해드리게스무니다.”
대머리 이사는 흔쾌히 승낙하며, 두 사람을 집으로 모셔갔다. 김여사는 그들과 헤어져서 도쿄의 쇼핑가로 향했다.
* * * * *
대머리 이사의 집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산층의 집이었다. 집에는 아내와 딸이 있었는데, 내가 집에까지 와서 머리를 해 준다는 것이 신기한 듯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하, 정마루 떨리무니다.”
대머리 이사의 머리는 2020년의 스타일인 투블럭 커트로 잘랐다. 투블럭 커트의 윗부분의 긴 머리는 그냥 길게 두었다. 그 긴 머리가 위를 향하게 파마를 말아서 가운데서 만나게 하는 것이 이 스타일의 최종 목적이었다.
대머리 이사의 머리가 싹둑 잘라지자 세 식구는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란 눈치였다. 대머리 이사는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 내 머리가 다 잘라져스무니다.”
“괜찮아요. 울지 말고.”
다 잘린 머리는 정말 괴상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는 비었는데 그 밑으로는 길게 늘어져 있고, 또 헤어라인은 바리캉으로 정돈되어 있는 이상한 머리. 마치 조선시대의 갓을 썼는데 갓의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그런 모양새였다. 대머리의 이사의 가족은 문론, 같이 간 김 실장까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대머리 이사는 거울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이게 뭐시무니까? 이게 사람의 머리가 맞스무니까?”
“하하, 걱정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파마를 해야지요.”
대머리 이사는 나를 피해서 구석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이사에게 다가갔다.
“이 사람이, 나를 코미디언으로 만들 거시무니까?”
“아 참, 걱정 말고 이리 오세요.”
“걱정 마세요 이사님, 저 친구가 1년 만에 저 정도가 된 천재니까요.”
이사는 김 실장의 말에 더욱 경악하며 소리쳤다. 나의 경력이 1년 밖에 안 되었다는 걸 듣고, 눈에 핏대까지 세우며 울어댔다.
“1년? 1년이 경력이무니까?”
대머리 이사는 화장실에 주저앉아서 넋 놓고 울기 시작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