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억을 받아내다
인턴 디자이너는 정식 디자이너가 되기 바로 전 단계로, 여자든 남자든 머리를 맡아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력을 검증받기 전이기 때문에 손님을 가려서 받아야 한다. 즉, 맡아서 해줘도 나중에 문제 될 것이 없는 사람들만 해주는 것.
그래서 나는 며칠 동안 손님이 없었다. 사실 나쁠 건 없다. 진짜 인턴이라면 많은 손님을 해주고 익혀야 하지만, 나는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해주었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었다. 어쩌면 미용실 입사 중 가장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약서만 들고 돈을 주지 않고 있는 김주원을 만나러 갈 타이밍이다.
“잘 계셨습니까?”
“그래, 자네 오셨는가?”
김주원은 나를 보자 방긋 웃어주었다. 내가 받아 온 계약이 얼마나 큰 계약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미용계를 뒤집어 놓을 제품의 독점권이니, 작은 것은 아니지.
“계약서는 다 확인해 보셨겠죠?”
“그래, 내 시세이#에 직접 확인해 보았지. 정말 어려운 계약을 따냈더군.”
“회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김주원도 같이 웃었다. 그동안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을 테지.
“그래, 약속한 돈은 무이자로…….”
“근데 회장님은 언제 회귀하셨습니까?”
오아영의 말로는 1998년에 회귀하였다고 했다. 지금 물어보는 건 그를 떠보려는 것이다.
“나야 뭐……, 그건 왜 묻지?”
“2002년에 월드컵이 어디에서 열리는지는 아십니까?”
“그야 일본이겠지.”
회장님은 지금 추측을 하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느 시대에서 왔는지 알려주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한국과 일본입니다. 그럼 2000년 이후의 사건들은 전혀 모르고 계신 거네요?”
“그래서?”
“그럼 제가 향후 23년 정도의 미래를 다 알려드리는 셈인데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신다고요? 미래를 아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몸소 겪으셨잖습니까?”
김주원이 지금까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건,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려주는 미래의 정보의 가치는 김주원이 쌓은 부의 가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알고 가는 길과 모르고 가는 길은 천지차이 입니다. 향후 5년 정도만 알려드리고 다른 회장님을 찾아 갈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돈을 더 주지 않을까요? 무당에게도 몇억을 뿌리는 사람이 쎄고 쎘는데?”
“허허, 그래 알겠네. 그냥 주도록 하지. 대신 2021년까지 전부 알려주어야 해.”
“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전부 알려드리도록 하죠.”
“대신 나도 조건을 하나 더 달지. 다른 회장은 도움주지 않는 걸 약속해줬으면 해.”
“네, 경쟁 입장의 회사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은 다른 사건을 만들게 된다. 돈을 주무르게 되면, 주변에 돈 있는 사람이 붙게 마련인데, 다른 회장님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실제로 다른 회장님을 만나게 되고 도움도 주게 되니까. 미래는 아무리 회귀자라도 함부로 장담하면 안 되는 일이다.
“다른 회사는 괜찮다는 말로 들리는데?”
“저도 앞으로 회장님이 목표니까요.”
내 말을 들은 김주원이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재밌다는 얼굴로.
“그래, 알겠네. 내 회사와 같은 걸 만드는 회사만 아니면 괜찮네. 됐지?”
“네, 그럼 약속한 겁니다?”
“그래, 당장 현금을 주도록 하지.”
김주원이 비서에게 손짓하자, 비서가 가방을 들고 왔다. 현금과 수표가 잔뜩 든 가방이었다.
“총 2억이야.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아,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2억이면, 은마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그럼, 자네만 믿고 있겠네. 자주 만나자고.”
“네, 맛있는 것만 사주시면 언제든지.”
“허허, 그래 다음엔 호텔 라운지에서 보지.”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김주원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물론 손에는 2억을 들고서.
그리고 김주원에게는 나중에 크게 빼먹을 거리가 하나 있다. 회귀의 반지는 그때 쓰기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 * * * *
“아버지 당장 피자집을 차려드릴게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외쳤다. 아버지는 내 말이 믿기지가 않는 듯 재차 물었다.
“정말 피자집을 차려준다는 말이야?”
“네! 종로에 아주 크게 차려드릴 수 있습니다!”
“어이쿠 야, 종로는 무슨.”
“그럼 가로수길에 차리면 되겠다!”
“가로수? 난 아무데나 괜찮다.”
가로수길은 지금부터 차려서 자리 잡을 시기에 엄청 뜨는 곳이니, 그곳에 미리 자리를 잡는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거기에다 알아봐 드릴게요. 돈 걱정은 마시고 피자 맛있게 만드는 방법만 연구하세요.”
내 말을 들은 어머니가 뛰쳐나왔다.
“야! 피자가게라니? 돈이 어디서 나서? 아니 그건 그렇고 니 아버지는 그걸 무슨 수로 차린다는 거야? 만들 줄이나 아니?”
어머니의 폭풍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활짝 웃으시며 어머니를 끌고 가셨다. 아마도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 준희의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학비는 부모님이 대 주셔야 여러모로 편안해지는 길이다.
앞으로 검사님이 되실 준희를 생각하자,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래서 몰래 준희의 방을 살펴보는데, 준희가 머리를 쥐어뜯는 것이 아닌가?
“야! 무슨 일이야? 왜 머리를 뜯어?”
준희는 갑자기 내가 문을 열자 잠시 인상을 썼지만, 이내 진정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전보다 훨씬 힘없는 모습이었다.
“공부가 안 돼!”
“뭐? 진짜야? 니가?”
“응, 어쩌지?”
“무슨 과목인데?”
“독일어.”
“어?”
독일어, 하니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설아다.
“과외라도 붙여줘?”
“그래줄 수 있어?”
준희는 한결 풀이 죽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고양이가 밥 달라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 S대로 알아볼게.”
“와, 오빠 최고!”
준희는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는 춤까지 추었다. DJ DOC의 버스 관광춤을 추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자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헌데, S대 독일어 과외를 알아보려면 김설아를 만나야 하는데, 그녀는 왜 그런지 몰라도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 * * * *
“설아씨? 안 그래도 미용실을 옮기고 싶어 하던데, 무슨 일 있는 거니?”
“네? 설아씨가 왜 그래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
“저번에 샴푸 건으로 너한테 실례를 했다고 하던데?”
“아, 그건 아닌데……, 다른데 옮기는 건 정말 싫어요. 제발 말려주세요.”
샴푸 사건으로 내가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설아씨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미용실을 옮기는 것은 너무 싫었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TV로만 보는데 만족했지만, 이제 한시라도 못 보면 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너 정말 설아씨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감히 무슨.”
사랑은 아니다. 내게 사랑은 이미 없는 감정이니까. 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은 참기 힘들다.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
“너 정도면 괜찮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설아씨도 너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 제가 어떻게 그렇게 좋은 여자를…….”
그렇게 말하는 도중, 김설아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사장님, 저……, 어? 준수씨?”
“앗 설아씨!”
나는 설아씨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볼 때마다 반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아니, 내가 볼 때 마다 반하는 재주가 있는 건가?
아무튼, 설아씨가 들어오자마자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 꼴을 보고 이사장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이래도 안 좋아해?”
“아니라니까요!”
“뭐가 아니에요?”
김설아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김설아의 샴푸향이 내 곁으로 다가오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오버스럽게도.
“아니, 흡. 저 부탁드릴게 있어요.”
“뭐죠?”
“미용실 옮기지 말아주세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날 본 김설아는,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이렇게 부탁하니 평생 준수씨네로 가야할 것 같네요.”
“우앗! 정말이죠? 약속한 겁니다?”
“뭐, 계약서라도 써드릴까요?”
“네! 절대 안 옮긴다는 계약서 필요합니다!”
“어머, 진담이세요?”
“흠흠, 나 좀 바쁜데 말이야.”
이사장이 헛기침을 하며 고조된 내 감정을 끌어내렸다. 하마터면 코피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상태였다. 김설아는 내 얼굴이며 표정이 너무 재밌는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증인이 있으니 계약은 안 써도 될 거예요.”
“네, 하하.”
“그리고 내가 보여준 시나리오는 봤어? 뭐가 뜰…….”
이사장은 다음 말을 하려다가 김설아를 쳐다보았다. 나가라는 의미다.
김설아는 눈치 빠르게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미용실에서 봐요 준수씨.”
“아, 네!”
김설아가 나가고, 이사장과 한참 이야기하던 중, 한 원장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근데, 한 원장님이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아주 장한 일을 해냈다고?”
“아, 아닙니다. 장한 일이라뇨.”
“그래서, 거래처를 끊는 방법에 대해 묻더구나. 자연스럽게 끊는 방법 말이야.”
“아, 유 사장 말씀이신가봐요.”
“응, 유 사장인지 뭔지를 오늘 끊어낸다고 하더구나.”
이제 그와 거래했던 물품도 김 실장의 것으로 다 체인지 하였다. 미용실에서는 제품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고객의 머리가 바뀌기 때문에, 최대한 비슷한 제품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제품의 적응기도 마쳐야 한다. 이제 겨우 그게 끝났으니, 유 사장도 끊어내야 하겠지.
“쉽게 물러나지 않을 사람인데, 걱정이네요.”
“그래, 니 말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내 걱정은 그냥 한 걱정이 아니었다. 유 사장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 *
한 원장은 그 시각, 유 사장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한참이나 생각한 끝에 한 전화였다.
“유 사장, 우리 잔금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잔금처리, 미용실과 재료상은 미수금을 항상 깔고 있다. 그게 일종의 계약금 같은 거라서 그게 있는 한 미용실과 재료상은 계속해서 거래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잔금을 처리한다는 말은 계약을 철회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우당탕탕.
유 사장의 책상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책상이 넘어지면서 온갖 서류와 전화기 등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러자 울리던 전화기가 멈추고 망가졌다. 순간 주변이 아주 고요해 졌다.
“박준수 개자슥이 결국 나를 쳐내?”
유 사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대는데, 밖의 소리가 들어왔다. 웬 남자의 고함소리였다.
“그냥 취직 시켜 달라고요!”
유 사장은 사무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호감형은 아니지만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스타일 헤어에 스텝으로 가게 해 달라고 찾아와서 난리치던 남자다. 그때는 재료상에서 미용실에 취업을 알선하는 일도 맡아서 하였다.
스타일 헤어는 미용실 취업 초창기에 테스트를 두 번에 걸쳐서 진행하는 만큼, 사람을 가려서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유 사장이나 김 실장의 재료상을 통해서만 스타일 헤어에 취직할 수 있었다.
창문 너머의 저 남자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유 사장을 닦달하는 중이었다. 그는 전과자라서 취직이 반려되었던 인물, 바로 노랑머리였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