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단발머리를 유행시켜라(1)
“엄정희 지금 긴 머리 아이가? 갸가 그 머리를 단발로 자를 거라고 보나?”
“그러게요, 다른 연예인은 없나?”
“그 사람이 딱 이에요. 재고의 여지가 없어요.”
한 원장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가끔씩 말투에서 나이든 티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것도 귀엽게 보였을 테지.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이다. 그냥 니가 50 다 된 중년 같은 말투를 쓸 때가 있어서, 웃기다 아이가?”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할 것이다. 원래 나이는 비슷하니까. 그렇다고 굳이 어린애들 말투를 쓸 이유도 없다. 몸이 워낙 어린 나이니, 그냥 어른스러운 어린놈이라고들 생각하게, 포지션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양아치보다는 그게 낫잖아요?”
“허허, 그치. 계속 그렇게 하그라.”
“형이라고 불러야 할까 봐요. 하하.”
나는 그들이 그러는 와중에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엄정희를 어떻게 만나고, 또 어떤 식으로 설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사장을 만나봐야 했다.
* * * * *
“니 말대로 다영이 그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어.”
“아, 그렇군요. 잘 되었네요.”
안다영은, 주말 드라마에 조연으로 캐스팅 된다. 그거야 원래 정해져 있는 거니까.
“다영씨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넌 알고 있었니?”
“알면 뭐하겠어요. 저는 관심이 없는걸요.”
내 단호한 말에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넌 웬만한 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더구나. 한 명만 빼고 말이야.”
이사장이 뭔가 아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하긴, 내가 김설아를 좋아하는 것은 지나가던 강아지도 눈치 챌 것이다. 얼굴에 다 써져 있으니까.
“저 여자한테 관심 없다니까요?”
안다영에게 관심 없다고 했을 때보다, 훨씬 강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해버렸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민망스러울 정도로 딱 맞게 말이다.
이사장은 내 말투와 표정을 보고 혼자서 또 피식 웃고는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네가 여자를 싫어하는 거 안다니까? 너 나 좋아하잖아?”
“네에에에에에? 이사장니이임!”
“하하하하, 알았어. 농담이야.”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사장실을 박차고 나갈 뻔하였다. 그러다 겨우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났다.
“저 근데, 엄정희랑은 친분이 있으신가요?”
“아, 엄정희랑은 내가 친분이 없는데.”
낭패다. 내가 기댈 대라고는 이사장뿐인데, 엄정희 말고는 대안이 없는데, 큰일이 났다.
“아, 꼭 만나봐야 하는데.”
“내가 엄정희는 모르지만, 주영호랑은 잘 알거든? 주영호를 만나서 부탁해보지 그러니?”
“아! 네네. 주영호라면 그 작곡가로 유명하신 분 말씀이시죠?”
“그래, 주영호가 엄정희랑 절친 이니까, 가서 좀 만나보고 이야기 해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주영호라면 그때 당시 가장 잘나가는 작곡가이자 MC다, 너무 바빠서 만나는 것조차 힘들 텐데, 그를 만나게 해 준다는 것 자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주영호라는 사람에게 호감을 줄 방법이 뭔지를 생각했다. 그는 현재 가장 잘 나가기 때문에 뇌물 같은 것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인기도 많아서 딱히 욕심이 없을 것이다.
“아, 그 사람한테 잘 보여야 할 텐데.”
“너는 그런 재주가 있잖아?”
“네? 무슨 재주요?”
“넌 내가 찾던 이미지와 딱 맞는 핑크 멤버를 추천했잖아. 이여리 말이야.”
“아, 그건.”
이여리는 어차피 이사장이 데려올 멤버인데, 조금 먼저 데려오게 했을 뿐, 내가 한 건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이사장과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거다 그거! 그거네요.”
“응? 그래 그거. 니가 가장 잘 하는 거 그거.”
어차피 이사장이 했을 일, 어차피 주영호가 할 일, 그걸 먼저 알려준다면 주영호도 이사장처럼 나의 편이 될 것이다. 빨리 주영호를 만나고 싶어졌다.
* * * * *
나는 이사장이 알려준 주영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주영호는 잠시의 짬도 내기 힘든 탑스타였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에도 곡 작업을 하고 있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내가 작업실에 들어오자, 펼쳐놓았던 악보를 뒤집는 영호. 자신이 작업한 악보를 누군가가 보는 것에 예민한 까닭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사장님의 소개로 온 박준수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주영호는 친절한 눈을 하고서, 나의 몸 구석구석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 헤어 스타일리스트 인지, 얼마나 세련된 사람인지, 또 얼마나 깔끔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내 모습에는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냥 평범하고 깔끔한데, 머리는 세련된 그 정도였다.
주영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나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음료를 마시는 동안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그런 분위기가 싫은 주영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사장님이 잘 좀 부탁한다고 하시던데, 친하신가 봐요?”
“네. 조금 친한 편이죠.”
“아, 그렇군요. 용건부터 물어봐도 될까요?”
주영호는 바쁜 사람이었다. 잠시 시간이 나는 동안에는 곡 작업을 해야 할 만큼 그의 1분, 1초가 중요했다. 그런 비싼 시간을 얻어낸 것이다.
“제가 헤어스타일리스트 인거는 들으셨죠?”
“네, 들었죠.”
“그래서 저희가 엄정희씨의 헤어스타일을 맡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음, 소개를 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주영호는 잠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희 머리 맡아주는 사람 정말 잘하는데, 그 사람보다 잘할 수 있어요? 당신이? 뭔가 다른 무기 같은 걸 가져오신다면 생각해 볼게요. 당연히 뭔가 더 있으시죠?”
당연히 뭔가를 준비, 아니 생각해 온 나였다. 하지만 그게 통할까?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잘난 주영호에게 음악으로 어필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노래, 하나가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나는 주영호가 이 시점에는 분명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가 나중에는 작곡을 할 거지만 아직까지 완성하지 못한 곡, 포이즈를 들려준다면 그의 환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나.
주영호는 갑자기 웬 노래를 들어보라고 하나? 했다. 내가 갑자기 노래를 들려준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에, 신기하면서도 의심부터 들었다.
“아니, 무슨 노래를 한다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노래 음은 제대로 전달하는 중이었다. 노래 가사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그 영역은 다른 것이니까 일단 음만 흥얼거리는.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던 주영호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것 봐! 그 노래 내 노래잖아!.”
“네? 헉.”
헉, 주영호가 이미 이 노래를 작곡한 것인가? 나는 예상 밖의 반응에 놀라 노래를 멈추었다. 노래가 나오려면 한참 있어야 하는데 벌써 나왔다면, 내가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었다.
“당신 뭐야? 내 노래 어디서 들었냐고?”
“아니, 그게… 난 들은 게 아니고.”
“당장 나가! 이사장님도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해!” 주영호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나를 내보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쫓겨나 버렸다.
그나저나, 이사장과 주영호의 사이까지 갈라놓았으니, 내 입장도 난처하게 되었다.
나는 일단 이 이야기를 이사장에게 전하였다. 이사장도 뜻밖의 전개에 당황한 것 같았다.
“뭐? 왜 그렇게 되었어?”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아요.”
“아니야, 그 사람 성격 좋아서 금방 다시 연락 올 거야 기다려.”
이사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나를 위로했지만, 당대 최고의 작곡가에게 더 이상 곡을 받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할 줄 몰라 발만 구르고 있었다.
* * * * *
“뭐여? 거기 그냥 취직하러 간 건 아니제?”
“내가 알아서 해요. 일은 배워야지 놀아요?”
유 사장과 노랑머리가 따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이 되지도 않은 어색한 만남, 밥맛이 좋을 리가 없었다. 둘 다 편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가 봉께, 박준수는 성공에 눈이 먼 놈이여. 그걸 막는다면 눈이 뒤집힐 거여.”
“아니, 욕심에 눈이 뒤집힌 사람은 아니야. 당신 눈빛이랑은 뭔가 다르던데?”
성공에 눈이 먼 눈빛은 당연히 유 사장의 눈빛과 비슷할 것이다. 그의 눈빛과 박준수의 눈빛은 그 근원 자체가 다르다.
“뭐? 이 새끼가 자꾸 시비를 털어 샀네?”
“아, 됐고, 그놈에게 복수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웬일인지 도움만 받고 말이야.”
전략이 놈에게 통하고 있었다. 노랑머리는 박준수에게 받은 것 때문에 더 이상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돌아서는 중이었다.
“여자친구는 어데 사는지 알아봤고?”
“여자에 관심이 없어.”
“응? 그럼 설마?”
“아니, 그냥 바빠. 오지게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노랑머리가 목격한 준수의 하루 일상은 늘 미용실, 집에 머물렀다. 그 흔한 회식도 필요할 때만 갔고, 시간이 나면 운동 같은 걸로 체력을 만들기에 바빴다. 여자라면, 지나가는 여자에게도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여자는 실컷 만났으니, 더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나면 뭔가를 할 거 아녀? 그런 게 뭐신데?”
“시간 나면 봉사활동을 가. 무자게 피곤하게 산다니까?”
봉사활동은 온전히 노랑머리를 위한 시간인데, 그걸 굳이 유 사장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나름 처세술이 좋은 놈이다.
“뭘 빼앗아도 거품을 물고 화내지 않을 새끼야 그 새끼는.”
“긍게, 그 새끼를 직접 혼내주던가 하믄 될 거 아녀.”
유 사장이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막대기를 잡아들었다. 금방이라도 뒤통수를 갈길 요량으로.
“그런 방식은 먹히지 않을 거야. 때리면 그냥 때리라고 버틸 놈이거든.”
“그랑께 미친놈이 된 거여. 지멋대로 남의 일을 빼앗는 미친놈이.”
“미친놈은 나랑, 당신도 포함인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뭐라고 씨부리는 거여?”
“암튼 난 복수 접는다. 내 전 여자친구가 복수 해주면 돈 준다고 해서 한 건데 그년이 감옥에서 날 배신했어.”
노랑머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유 사장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야 임마!! 너 복수하려고 성형한 거 아니었어?!”
그러자 나가려다 말고 돌아온 노랑머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 여친이 해준 거라니까? 복수하게 해준다면서. 난 복수 안 해도 괜찮은 것 같아. 그냥 기술 배우려고. 기술 좋던데 그 양반?”
“너 이 새끼…, 너 짤리게 한다?”
탁!! 퍽.
그러자,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치는 노랑머리. 탁자에서 음식과 병들이 떨어져서 아수라장이 된다.
우당탕탕!
노랑머리는 살기를 품은 눈빛으로 유 사장을 내려다보았다. 곧 멱살을 잡아 패대기칠 기세로.
“그럼, 진짜 복수를 해야겠지. 너에게….”
유 사장을 노려보던 노랑머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나가버렸다. 유 사장은 분노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 * * * *
“빨리 좀 와봐. 지금!”
나는 이사장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뛰어갔다. 이사장의 사무실에 그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주영호가!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