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단발머리를 유행시켜라(2)
“준수씨! 어서 좀 와봐요.”
바로 어제, 나를 매몰차게 내쫓았던 주영호가 내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뭐가 어찌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영호에게 다가갔다. 이사장은 기분이 몹시 좋은지 웃고 있었다.
“어? 주영호씨? 무슨 일이세요?”
주영호는 다짜고짜 나의 앞에 악보를 내밀었다. 바로 포이즈의 악보였다.
“이거 좀 봐요. 이게 일주일전에 내가 써놓고 책상에 넣어둔 거거든요.”
“아, 네. 악보네요.”
주영호가 굳이 그걸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찾아왔을 리가 없는데, 그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근데. 준수씨가 가고 난 뒤에 이걸 찾아봤는데, 아무도 만진 흔적이 없어요.”
“그렇군요.”
“그렇군요라뇨. 그니까 당신이 내 노랠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나밖에 모르는데!”
이 불가사의한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찰나에 이사장이 끼어들었다.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보았던 이사장이기에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얘가 원래 꿈을 잘 꾸거든. 가끔씩 꿈에서 히트할 노래를 듣는 모양이야.”
전에 내가 터보의 (회상)이 뜰 거라고 말했더니, 이사장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전부, 터보의 이미지랑 안 맞는 노래라서 안 뜬다고 했었다. 하지만 (회상)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전부 내가 무당이네, 뭐네 말이 많았는데, 그때.
“꿈에서 봤어요. 그 노래를 누가 부르고 히트 치는 걸 미리 봤다니까요.”
그 이후 이사장은 가수들이 앨범을 내기 전에 나에게 먼저 들려주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히트곡을 지정해주었다. 노래방 레전드 곡을 고르는 일은 물마시듯 쉬운 일이었다. 덕분에 이사장은 히트할 곡을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사실이면 왜 미용을 하는 건가요? 당신은 엔터테인먼트 쪽 인재인데?”
“그러게 말이여, 맨날 꼬시는 데도, 곧 죽어도 미용한다네?”
미리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한들, 그건 다 저들의 재능과 땀이 이루어낸 성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다. 그나마 가장 재능이 있는 일이 미용이다.
재준이 미용 사업을 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아! 그럼 포이즈도 히트한다는 거네?”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던 주영호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자신의 노래가 히트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하면서.
“네! 히트할겁니다! 그것도 빅히트!”
“이야, 믿어도 되는 거죠? 나 믿는다?”
“믿어라, 믿어. 어? 그러고 보니 아직 가수 없잖아? 이봐 그 노래 나줘! 내가 우리 애들 시켜서 .”
이사장이 흥분한 얼굴로 악보를 받으려고 하자, 내가 이사장을 막아섰다.
“그건 엄정희가 해야 히트 친다구요. 다른 사람은 안 되는데요!”
“야 임마, 명곡은 누가 해도 명곡이야.”
“하하, 안 그래도 정희씨에게 줬어요. 자 갑시다, 준수씨.”
주영호가 나의 팔을 잡고 일어나더니,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말했다.
“정희씨 만나고 싶다면서요? 같이 가자구요.”
“헉, 정말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나는 주영호를 따라가다 말고 거울을 슬쩍 보았다. 아무래도 당대 최고의 탑스타를 만나러 가는데 멋지면 더욱 좋으니까.
* * * * *
일산, 한적한 카페에서 엄정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영호가 카페에 들어서자 환하게 웃는다.
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데다, 햇살까지 받아서 빛이 나고 있었다.
“와, 진짜 너무 예쁘다.”
“핑크 애들 못지않게 예쁜데?”
“공기가 달라요 걔들이랑.”
상큼한 핑크 멤버들과는 다른, 원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앉아있는 엄정희.
“노래 진짜 좋더라. 맘에 쏙 들어.”
“그럴 줄 알았어. 딱 니 노래라니까.”
나는 그때까지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멀뚱멀뚱 서 있었다. 꿈에서나 보았던 엄정희를 근거리에서 보다니.
엄정희는 꺼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주영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쟨 대체 뭐야? 새로 온 매니저?”
“어, 인사해. 박준수씨라고 헤어디자이너야.”
“아,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엄정희는 여전히 시답잖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기 위해 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지만, 그게 오히려 내 표정을 기괴하게 만들었다.
나의 표정을 본 주영호가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하, 준수씨. 아까의 그 당당함은 어디 간 거야?”
“아니… 그게, 너무 아름다우셔서,”
“어머머.”
“역시 엄정희 앞에서는 모든 남자가 쭈글이구만.”
“별소릴 다하네. 근데 여긴 왜 온 거에요, 준수씨?”
나는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엄정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앨범 헤어를 담당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엄정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엄정희가 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 멀뚱하게 보고만 있었다.
“이 나라에서 최고라 칭하는 사람들이 내 헤어 담당이에요. 그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어요?”
“네. 잘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인 엄정희를 담당하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최고의 디자이너들이겠지.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나는 이번 한번만 합류하면 되는 것이다.
“이번 포이즈 앨범 하나만 작업하고 빠질 겁니다. 그 이후에는 그분들과 작업하시면 됩니다.”
나는 집 나갔던 정신을 얼른 챙겨 넣고, 딱 부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쁜 거에 정신을 못차리는 건 프로의 자세가 아니니까.
엄정희는 내 태도가 바뀌자 금세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그 노래에 맞는 헤어는 생각해 오셨나요?”
“네, 물론이죠.”
포이즈 노래 컨셉에 맞는 스타일을 제시하라는 이야기겠지. 나는 노래의 분위기와 가사 등을 떠올렸다.
노래는 친구의 남자를 빼앗았던 여자가 그 남자와 이별을 하면서, 그동안 그녀에게 미안했다고 하며 당당하게 이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가사와 작곡이 절묘하게 이루어진 명곡으로, 단발머리로 자른다는 컨셉을 잘 연결해서 설명해야 했다.
“남의 남자친구를 빼앗은 여자가, 그 남자와 사귀다 헤어졌잖아요. 그 남자는 다시 그 여자에게 가는 거고, 그러려면 아주 쿨하게 보내줘야겠죠.”
“그치, 그런 가사도 정말 좋더라구.”
“내가 썼지만, 가사도 잘 나왔어. 하하.”
“그러려면, 여자는 머리를 자르잖아요. 과거의 인연을 끝낸다는 마음으로.”
“설마, 내 머리를 자르라는 거 에요?”
“오, 파격적인데?”
“네, 단발로 잘라버리는 거죠. 남자에 대한 미련을 단칼에 자르듯이 머리도 싹둑.”
엄정희는 이야기를 듣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난 듯 한 얼굴을 하고서.
“당신의 제안도 단칼에 자르고 싶네요.”
“네? 아니 그게 무슨.”
“왜? 난 좋은데? 노래랑 정말 잘 어울리는데?”
“만약 나랑 계속 같이 일했던 헤어디자이너가 그걸 제안했다면 나는 조금 망설이더라도 오케이 했을 거지만, 당신은 오늘 처음 봤는데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거잖아요.”
“아, 파격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반응이 좋을 겁니다. 진짜로요.”
나의 말은 사실이다. 엄정희의 단발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니까. 게다가 그 머리를 엄정희가 찰떡같이 소화했었다. 엄정희이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나도 좋은데 아주. 준수씨 생각보다 일 잘하네. 다음에도 같이 해야겠네.”
“그래. 생각 자체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머리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 샘플 같은 걸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네, 아무래도 긴 머리를 자른다는 것이 여성분들에게는 고민거리니까요.”
“맞아요. 나는 연기도 같이 하는 입장이라서, 그런 부분이 고민되긴 하거든요. 그 머리를 한 다른 여성분의 사진이라도 좀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엄정희가 바로 오케이 할 줄 알고 그런 대비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그 사진을 보자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일, 어떻게든 설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좋습니다. 그 머리를 직접 시연한 뒤에 모델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음, 좋아요. 망설임 없이 당당한 게 마음에 드네. 다음엔 직접 연락을 주세요.”
엄정희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엄정희의 전화번호를 받다니, 회귀를 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명함을 받아 들었다.
“네. 조만간 연락드리죠.”
* * * * *
“똑단발을 한다고? 그게 아무한테나 어울리는 줄 아나?”
“그렇긴 하죠. 우리 샵에서 좀 누가 모델을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그래, 뭐 야그나 해보자.”
한 원장은 여직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다들 바쁜 와중에 원장실로 모여들었다.
“엄정희에게 제안할 단발 헤어스타일을 먼저 시연해 보려고 하는데, 모델로 참여…….”
나는 말을 하다가 말고 여직원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여직원들 중 누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가 엄정희 단발을 소화할 만큼의 모발과 얼굴을 가진 사람도 없어 보였다.
“단발은 너무 촌스러울 수 있는데?”
엄정희의 단발은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그걸 커버할만한 세련미를 가진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들이 세련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머리 스타일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난 머리 자르는 거 싫은데.”
다들 헤어스타일을 파격적으로 바꾸는 것에 반감이 있어 보였다. 하긴 엄정희도 망설이는 마당에 저들도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
거기다 문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델에게 시연한다면 엄정희도 그걸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좀 더 엄정희의 분위기를 소화해낼 모델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회귀하기 전에, 선정이 그 머리를 따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선정이는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를 갖고 있었고, 또 그 단발을 아주 잘 소화했었다. 거기다 샤기커트를 해 놓아서 적당히 질감이 처리된 모발이라, 단발을 잘라도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아, 모델 할 사람 생각이 났어요. 죄송합니다. 다들 일 보세요.”
나는 사람들을 두고 갑자기 뛰쳐나갔다. 장갑을 낀 손으로 들어왔던 다른 직원들이 허무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지?”
“다행이네. 단발이라니 너무 싫다.”
“야야, 오데가노?”
* * * * *
나는 미용실에서 뛰쳐나와서 곧바로 지하철에 들어섰다. 선정의 전화번호를 모르니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돈암동 미용실에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버스를 타면 엄청 시간이 많이 걸리던 시절이라, 복잡하더라도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돈암동에 도착한 나는, 선정이 일하는 미용실에 찾아갔다. 알다시피 돈암동도 대학가라서 미용실이 엄청 많았다. 그 중, 가장 잘한다는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는 선정.
사실 회귀 전에 선정이는 동네 미용실에만 다녔었다. 큰 미용실이랑 동네 미용실, 그 기술의 차이는 사실 엄청나지 않았다. 특히 파마나 커트 같은 건 오히려 동네 아줌마가 디테일하게 잘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트렌드라던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능력 같은 거는 강남권이 낫다. 통계적으로 말이다. 그런 그녀가 제2의 명동이라고 불리던 돈암동에 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야?”
“아 그게, 모델을 좀.”
“뭐야? 잠깐, 여기 왜 왔어?”
분명 선정을 불렀는데, 그녀의 옆에는 승철이 따라 나왔다. 승철의 손에는 미용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뭐야? 너 여기서 일해?”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