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단발머리를 유행시켜라(3)
승철은 나를 보자 당황하며 장갑을 벗어 던졌다. 선정도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조금 도와주면 일찍 끝내준다고 해서.”
“응, 요기 앞 카페에서 종일 기다린다고 그러는 거 일이나 하라고 내가 데려왔어.”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회귀 전, 연애할 때 내가 매주 하던 짓이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는 조금 행복했었지. 지금은 승철이 그걸 하고 있는 것이고.
“팔불출 새끼.”
“냅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근데 넌 여기 왜 온 거야? 일하다말고?”
“아, 그게 모델 좀 해주라고.”
“내가? 또? 이번엔 뭐 똑단발이라도 해?”
“응.”
승철과 선정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 아예 빡빡 밀라고 하지 왜!”
“엄정희 알지? 그 사람 앨범 컨셉으로 추천할 머리 미리 좀 보여 달라고 해서 그래. 엄정희처럼 예쁘고 세련된 사람, 우리 주변에 선정밖에 더 있냐? 좀 도와줘.”
나는 선정이 꼭 도와줄 거라고 믿었지만, 승철이 그걸 반대할 것이 두려워서 미리 아부를 좀 떨었다. 하지만 아부랄 것도 없이 선정이 정말 예쁘다는 건 사실이다.
선정도 나의 말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근데, 진짜 엄정희가 똑단발을 한데?”
“응 니가 도와주면 할 거야.”
선정이에게는 이것이 기회이다. 엄정희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탑스타니까.
하지만 승철은 선정과 결혼을 목표로 사귀고 있는데, 똑단발을 하면 업스타일을 하지 못하니 당황스러웠다.
“머리 잘 안 자랄 텐데……….”
“근데 너 이러고 있는 거 한 원장님이 알면, 곤란하지 않겠냐?”
“야 이씨, 치사하게 이러기야?”
“너 혹시 업스타일 때문에 이러는 거면, 내가 홍부자 쌤한테라도 찾아가 볼 테니까 제발 도와주라.”
“와, 업스타일 대모 홍부자한테 내 머리를 맡게 해준다고? 그럼 당연히 해야지.”
그 시절, 업계에서 업스타일로 알아주던 분이 홍부자 선생님이다. 그분에게 업스타일을 배우려면 돈은 물론이고 엄청나게 정성을 쏟아야만 하는데, 그걸 해준다고 하니 어떤 미용사가 안 좋아 하겠나.
“선정야 너 좀 변했어.”
“근데 오빠, 내가 왜 업스타일을 해야 해?”
“야, 왜 모르는 척 해?”
나는 둘이 꽁냥거리는 것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는걸 보느니 그냥 안하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안 할거면 다른 사람 알아보고.”
“아니야 할 거야. 할게.”
“야, 진짜 하려고?”
사랑에 빠져가지고, 홍부자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차버리다니.
원래 저 녀석이 저러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까지 변한 걸까?
하긴, 홍부자 선생님을 섭외하는 건 뻥이나 다름없다. 내가 무슨 수로 그분을 모셔오겠는가?
“그래, 그럼 오늘 저녁에 당장 해보자. 넌 오지 말고 선정이만 보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봐야지!”
“엄정희에게 브리핑용으로 하는 거라고 했잖아. 앨범 나오기 전까지는 비밀이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머리를 해주면 엄정희에게 브리핑을 한다고 해도, 그 머리를 그대로 하고서 승철을 만날 텐데, 그 자리에 승철을 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냥 승철과 선정이 꽁냥 거리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 * * * *
“샤기커트 하고 좀 어땠어?”
“완전 개털이더라. 머리가 진정이 되질 않아. 풍선이 따로 없다니까?”
나는 선정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저런 털털하고 귀여운 매력에 반했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일자 단발머리로 자를 거야. 그리고 나서 매직하고 검은색으로 염색할거야.”
“뭐? 중학교때 머리를 하라고?”
“아니, 그거랑은 다르지. 좀 더 세련되고 예쁘게.”
“참나. 똑단발이 어떻게 세련된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 시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딱 그 기장의 단발머리를 했었다. 귀밑 3센티에서 조금만 더 자라도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머리를 세련된 머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런 머리를 소화하고, 거기다 유행까지 시킨 대스타가 바로 엄정희다. 그런 그녀의 헤어를 스타일링 하는 것만으로도 미용사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앞서 엄정희가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그녀의 머리를 하는 헤어디자이너들은 업계 탑급이라고 생각해도 무관했다.
“자, 이제 시작하자.”
나의 가위가 선정의 목덜미를 스쳤다.
사각사각.
선정의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카락을 거의 다 자를 무렵, 승철이 미용실 문을 두드렸다.
“야!! 문열어! 빨리 열라고!”
“어휴, 저 자식이 진짜.”
“참나, 못 말린다 정말.”
나는 마지막 가위질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승철은 선정에게 달려가서 선정의 머리카락을 잡고 징징댔다.
“정말 잘랐어? 아 이 아까운 머리를….”
“왜 왔어? 술 먹었어?”
“그 형님이랑 먹다가 구경 가자고 해서. 들어오세요 형님.”
그러자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서 있던 유 사장이 미용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웬수같은 유 사장이 들어오자 승철을 살짝 흘겨보았다.
“오랜만에 와보네 여기. 잘 지냈는가?”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이고, 재수씨도 여전하시네.”
승철은 우리가 왜 웬수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선정만 쳐다보고 있는 승철을 보자니 더욱 열불 터진다.
“보다시피 피똥 싸면서 뛰어다니고 있죠. 누구 때문에.”
“근데 한밤중에 남의 애인은 불러다 뭐더는 짓이여? 애인 허락은 받고 한 거여?”
“어쩔 수 없이 허락 한 거죠. 엄….”
하는데 내가 승철의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 한 나의 노력이 승철의 입에서 작살나기 바로 직전에 겨우 막은 것이다.
“뭐? 엄마 허락이라도 받은 것이여? 허허.”
“죄송하지만, 작업에 방해되니 이만 가주시죠?”
“야, 나는 그냥 옆에만 있게 해줘어.”
“그럼 그쪽만 가주시죠.”
“허허, 이자식이 시방 그쪽이라고 혔냐?”
“그냥 가주세요. 업무방해로 신고하기 전에.”
“뭣이여? 어린놈의 새끼가 주댕이를 쫙 찢어벌라.”
유 사장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가왔다. 선정은 뜻밖의 상황에 겁을 먹고 쳐다보았다. 선정의 모습을 본 임승철이 유 사장을 붙잡고 말렸다.
“아이고 형님, 이만 갑시다. 나 가볼게 흑흑.”
승철이 겨우 유 사장을 달래며 나가는데, 나는 그를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갔다가 바로 와. 니가 매직 잡게 해줄테니까.”
“뭐? 진짜? 응 알았어”
나는 승철을 지금 보낸다면 엄정희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일단 유 사장만 먼저 보내기로 한다. 둘이 꽁냥 거리는 것을 보는 게, 유 사장을 보는 것 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아서였다.
“빨리 갑시다, 형님. 나 첫 매직이에요.”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그때 매직은 탑급 헤어디자이너들만 잡을 수 있었다. 일개 스텝은 감히 잡아볼 수 없었는데, 그걸 잡게 해 준다고 하니 승철도 들뜰 수밖에 없었다.
“매직은 유화가 생명이라. 그거 잘 해놓으면 머리 잘 나올 테니 걱정 마.”
“걱정 안 해. 내 남친인데.”
“그래.”
승철은 유 사장을 금방 택시에 태워서 보내놓고 다시 돌아왔다. 100만원짜리 매직기계를 처음 잡아볼 생각에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나는 매직 중화를 마치고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가며, 다음에 있을 검은색 염색은 승철에게 맡겨 버렸다.
“염색은 검은 머리 하는 거니까 블루블랙으로 해주면 돼. 나 피곤해서 먼저 가볼게 마무리 부탁해.”
“어 그래 걱정 마.”
“들어가 오빠.”
사실 밤늦게까지 머리를 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젊은 몸이 좋은 게 활기가 있어서니까. 둘이 꽁냥 거리며 잘 놀라고 빠져주는 것이다.
* * * * *
다음날, 나는 선정을 끌고서 헤어를 손봐주고, 연예인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메이크업까지 받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랑머리는 선정의 존재를 각인하게 된다.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지만, 내가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뭔가 부족한데.”
“왜? 완벽한데?”
나는 선정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끌고 갔다. 백화점에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구색을 맞추어야 하니까.
노랑머리는 그것까지 보고, 어쩌면 선정과 내 사이가 보통사이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정을 데리고 엄정희의 사무실에 갔다.
엄정희는 선정을 보자마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의 컨셉이 정말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컨셉은 엄정희가 그렇게 아끼고 의지하는 대한민국 탑 헤어디자이너가 고안했었던 컨셉이니까.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와, 진짜 멋지다. 앨범 컨셉이랑 딱 맞는 것 같아요.”
“그 앨범 대박 나겠네요.”
선정은 본인의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엄정희를 보며 내심 기뻤다. 미용사로써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 같아서 자존감도 올라갔다. 자신도 언젠가 연예인의 전담 미용사가 되고 싶은 생각마저 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경단녀가 될 것이다. 인생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으니까.
“이거 준수씨랑 다음 작업도 같이 하고 싶어지네요.”
“아, 아닙니다. 이미 최고의 헤어팀과 같이 하시고 계신걸요.”
엄정희의 앨범 발매일이 다가오고, 엄정희는 약속대로 우리의 미용실로 찾아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를 맞이한 [스타일 헤어]의 자존감도 아주 높이 치솟았다.
나는 엄정희의 머리를 자르고 손질하는 시간에만 다섯 시간을 소비했다. 엄청난 집중력과 노력으로 엄정희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고, 보는 사람과 시술을 받는 사람도 긴장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 순간순간을 그냥 놓칠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든 나는 사진 기사를 불러와서 전부 남겨두었다. 엄정희는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가 선물을 하나 할까 하는데, 어때요?”
“아, 뭐 저야 감사하죠.”
“좋아요, 오늘 찍은 사진을 잡지사에 보내주시면 준수씨 인터뷰까지 실려서 나가게 해줄게요.”
“아, 정말이에요? 감사합니다.”
“대신 내 욕하기 없기. 호호”
“당연하죠. 칭찬만 수천가지인데.”
엄정희는 후에도 꾸준히 스타일 헤어를 방문했고, 심지어 다니던 미용실을 바꾸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전국에 단발머리 열풍을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의 매직약 인기도 하늘로 치솟았다.
* * * * *
그렇게 새로운 역사가 쓰여 지고 있는 시점에, 노랑머리와 유 사장이 만나고 있었다. 유 사장은 얼마 전의 굴욕을 씻기 위해서 뭐든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나는 이제 복수는 안한다니까요.”
“긍게, 니가 거 들어간 이유를 밝히면 니는 거서 더 이상 일하지 못하는 거는 알고 있재?”
“그럼 내가 복수할 의지가 생기죠. 당신한테”
“너는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거 아녀?”
“뭐든 하진 않죠. 사람은 안 죽인다니까?”
“박준수가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만 알아봐주면 된당께?”
노랑머리는 유 사장의 말을 듣고 선정을 떠올렸다. 그동안 준수가 여자에게 뭔가를 해 준 것은 선정이가 유일하니까.
“이 뭐여 알고 있구먼?”
“알면 뭐?”
“얼마면 되겄는가?”
유 사장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들었다. 십만원짜리 수표가 여러 장 들어있었다. 그걸 본 노랑머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갖고 싶은 것이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