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납치사건(1)
유 사장은 수표 다섯 장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50만원이면 그 시절 스텝의 한 달 월급이었다. 당연히 구미가 당길 것이다. 하지만 노랑머리는 그걸 마다하고 팔짱을 꼈다. 손이 저절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백만원의 유혹도 이겨낸 난데 그까이꺼 뭐.”
스텝 통과 테스트에 주어진 백만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 백만원? 좋아.”
유 사장은 수표 다섯 장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노랑머리는 참을 수 없는 듯 눈을 감고 소리 질렀다.
“으, 손이 말을 안 들어.”
노랑머리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도 팔짱을 풀지 않자, 유 사장이 인상을 쓰며 수표 열 장을 더 꺼내 놓았다.
“자, 십초 안에 결정하드라고.”
노랑머리는 순식간에 팔짱을 풀고 그 돈을 손에 쥐었다.
“나중에 딴소리 없기?”
탁.
그 손을 덥썩 잡는 유 사장. 돈을 가져가기 전에 정보를 달라는 제스처였다.
유 사장의 눈빛을 본 노랑머리는 체념을 하며 말했다.
“아니 이 불쌍한 양반이 친구의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더라구요.”
“뭐? 그게 뭔 소리여, 알아듣게 말을 허드라고.”
“유승철의 여자친구에게 정성을 쏟던데?”
“뭐시여? 그게 참말이여?”
“참말이유. 이건 이제 내꺼네?”
노랑머리는 유 사장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이백만원을 쓰윽 빼서 들었다. 수표 스무 장을 들고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노랑머리, 많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야, 이거 짭짤하네.”
유 사장은 지갑에 있는 돈을 전부 빼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걸 본 노랑머리는 눈이 뒤집혀서 가지려고 손을 뻗었다.
“왜왜? 또 돈 주게?”
유 사장은 돈을 다시 지갑 속에 넣으면서 노랑머리를 쳐다보았다.
“이거 다 줄 수 있어. 뭐하나만 해주면.”
“뭐? 말만 해.”
노랑머리는 침이 흘러나오는 것을 겨우 삼키고, 지갑으로 들어가는 돈을 바라보았다.
유 사장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노랑머리를 쳐다보았다.
* * * * *
“박 쌤, 박 쌤은 왜 차 안사요?”
노랑머리가 일하다 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집과 미용실만 오가는 중이라 딱히 차가 필요 없었다.
“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서요.”
“그럼, 휴대폰은 왜 안사요? 돈도 많이 벌잖아요.”
“아, 그것도 필요가 없어요. 전화 걸 데도 없고.”
“그러지 말고 하나 사요. 내가 싸게 사는데 알려줄게요.”
“아니 뭐, 굳이.”
“내 친구 도와주는 거라서요. 어머니 모시고 혼자 힘들게 사는 놈이 있어서.”
물론 거짓말이다. 노랑머리는 나에게 꼭 휴대폰과 차를 사게 하려고 결심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아, 그렇군요.”
그는 나를 설득하려다 어머니가 간암으로 고생하신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는 몰래 손으로 눈을 찔러서 눈물을 쏙 뺐다.
“그 자식 어머니가 간암에 걸렸어요. 병원비가 없어서 고생한다고, 흑흑.”
“아, 그거 참…….”
나는 결국 노랑머리의 설득에 당해, 차와 휴대폰을 사게 되었다. 차는 중고로 좋은 값에 샀고, 휴대폰은 그때 가장 좋은 모토로라로 샀다. 노랑머리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며, 정말 잘 샀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그게 맞는 말이었다.
“휴대폰을 사면 뭐하냐. 전화 올 사람도 없고, 온대도 맨날 이사장님 한 원장님.”
휴대폰을 산 뒤, 정말 이사장님과 한 원장님만 뻔질나게 전화했다. 물론 다영에게 번호를 알려준다면 자주 전화를 했겠지만, 다영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당연히 이사장님이나 한 원장님이겠거니 하며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정이란 여자를 데리고 왔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야, 이 새끼들아 날 집에 보내달라고!”
전화기 너머로 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본능적으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전 마누라에 대한 예의라고 해야 하겠다.
“선정아! 선정아!” “주소 알려줄 테니, 이곳으로 와라.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
“야 이 개#끼야! 선정이를 왜 납치했냐고!”
납치범들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리고 곧 문자가 도착했다. 선정이 납치된 장소가 적힌 문자였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그 장소를 찾아 달려갔다. 마침 맞게 나의 차에는 옵션으로 네비게이션이 달려있었다.
“다행이다 이걸 예상이라도 한듯…….”
나는 범인이 전화번호를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거기다가 마침 차를 샀고, 거기다 네비게이션이 달렸다. 노랑머리가 이일에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는 유 사장의 친척이라서? 아니면 정말 복수를 하기로 한 건가?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늦은 저녁이라 차는 막힘없이 씽씽 달렸다.
* * * * *
경기도 인근, 선정이 납치되어 있다는 한 폐건물에 도착한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를 멈췄다. 건물 2층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가져나온 방망이를 들고서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승철이가 오기 전까지는 버텨야 하니까.
“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분명 선정의 목소리였다.
나는 급한 마음으로 뛰어가다가 넘어질 뻔 한다. 겨우 중심을 잡고 다시 일어나는데, 웬 덩치들이 나의 앞을 막아섰다.
“니가 박준수인가?”
“그래, 선정이는 어딨어?”
나는 잡고 있던 방망이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곧 덩치들이 나를 둘러싸고, 방망이를 잡은 손은 금세 저들에게 잡혀버렸다. 나는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온갖 매질을 당했다. 저들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나를 때렸다. 그냥 승철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걸, 후회가 밀려왔다. 남의 여자 때문에 이게 뭔 개고생인가.
선정이는 그들이 있는 곳 바로 위층에 감금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위에서는,
선정을 감금한 놈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선정은 이 틈을 타서 몸을 묶어놓은 밧줄을 풀었다.
다행인 것은 선정이 커트 과정을 배우려고 가위를 늘 소지하고 다녔단 사실이었다. 선정은 주머니에 있는 가위를 꺼내들고, 밧줄을 잘랐다. 비싼 미용 가위라서 그런지 밧줄을 끊는 일은 금방 끝이 났다. 문제는 저 덩치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덩치 큰 바보에겐 원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아으, 나 쉬 마려운데 어쩌죠?”
덩치는 귀찮은 듯 인상을 팍 쓰며 다가왔다.
“싸서 말려.”
“아까 듣자하니 곱게 모셨다가 집에 잘 바래다주라던데? 그냥 싸라고? 그게 잘 모시는 거냐?”
덩치는 선정을 때리려는 듯 손을 들었지만, 차마 때리지는 못했다. 보스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우 존만한게 진짜.”
덩치가 선정을 일으키는 찰나였다. 선정은 눈을 딱 감고 덩치의 목덜미에 가위를 갖다 댔다.
“꼼짝 마, 움직이면 니 목이 달아난다.”
덩치는 목덜미에 닿은 쇠가 날카로운 것을 느끼고는 겁을 집어먹었다. 선정은 그가 겁먹은 것을 눈치 채고는 목에다 더욱 세게 가위를 밀어 넣었다. 덩치는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겁을 먹었지만, 센척하며 떠들었다.
“뭐, 뭐야 이 #친년이.”
“엎드려 이 자식아.”
덩치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게다가 덩치 값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가위가 날카로운 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덩치는 좀 전의 당당함은 벗어던지고 애원하듯 말했다.
“저기…, 그냥 있으면 집에 바래다 준다니까요? 왜 도망치려고 해요?”
“오줌마려서 그런다 이 자식아.”
선정은 덩치를 바닥에 눕히고 그의 발과 손을 의자에 붙여서 묶었다. 그 위에 테이프까지 꼼꼼하게 둘러서 따라 나올 수 없게끔 만들어 놨다. 덩치를 애벌레처럼 만들어 놓고는 도망치려 나서는 선정.
“악.”
선정이 나오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지만, 내가 그곳에 들어오다가 소리를 들었다. 선정은 그걸 알리가 없었다. 선정을 납치하고 전화로 부른 사람이 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도망가기 위해 달려 나갔다. 마침 나는 앞문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선정은 뒷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좀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덩치들에게 둘러싸여 실컷 얻어맞고 있다가, 급기야 기절을 하고 말았다.
* * * * *
선정은 건물을 나오자마자 달려 나갔고, 길을 따라 쭉 뛰어갔다. 어떻게든 서울로 가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서울 표지판을 따라서 걷고, 뛰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중, 서울 방면에서 오는 차가 보였다. 그 차는 선정의 앞에서 멈췄다.
“선정야! 선정야! 괜찮은 거야?”
차에서 내린 사람은 승철이었다. 가증스럽게도 차를 몰고 같이 와준 사람이 바로 유 사장이었다. 유 사장은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하고 인상을 쓰며 차에서 내렸다.
선정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승철의 품에 안겼다. 강한 척 하며 뛰쳐나오긴 했지만, 선정도 힘겨운 여정이었다.
“왜 이제 왔어….”
“미안해, 미안해. 너무 늦었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여? 누가 제수씨를 여다 끌고 온 거여?”
유 사장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선정을 걱정하는 척 했다. 사실 유 사장은 선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승철이 좀 더 잘 사는 여자에게 장가가게 하고 싶었던 그는, 승철이 선정과 헤어지는 걸 바라고 있었다.
잘생기고 멋진 승철이 그걸 이용해서 부자인 여자와 결혼하게 하여,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설립하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게, 누가 널 납치한 거야? 대체 왜?”
“아까 그놈들이 오빠한테 전화 했잖아?”
“어? 아 그게.”
준수는 출발하고 나서 승철에게 전화를 걸어 납치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승철은 바로 유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이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암튼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겠어요.”
선정이 승철이 들고 있던 유 사장의 휴대폰을 받아들고는 119를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유 사장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유 사장은 얼른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받았다.
“여보시오. 어 잘 되었네. 철수 해. 뒤처리는 걱정 말고.”
전화를 끊은 유 사장은 선정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준수가 계획대로 실컷 두드려 맞았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제 이 두 사람을 끌고 집에 가면 된다. 죽지는 않았을 테니 뒤처리도 따로 할 필요 없었다.
“곧 경찰이 여그 온다고 허니께 우리는 빨리 가는 게 좋겄어. 경찰서에서 진술하고 그럼 골치 꽤나 아플 텡께.”
“여기 조폭들 엄청 많이 있던데요? 걔들 다 잡아 족쳐야죠.”
“조폭?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렇긴 한데.” “긍게 그놈들 몰려나오기 전에 도망쳐야제!”
유 사장은 대충 둘러대고 두 사람을 끌고서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1998년도에는 생각보다 많은 범죄들이 그렇게 묻히고 했었다. 오늘의 일도 아마 묻힐 것이다.
* * * * *
조폭들이 철수한 폐건물에는 나의 신음 소리만 들렸다.
그때, 그 건물에 누군가가 들어서더니, 내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