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납치사건(2)
“살려주세….”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걸 본 뒤, 살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소리쳤다.
“쌤, 괜찮아요?”
나를 향해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노랑머리였다.
“위에 누가 있는데, 데리고 가야 해.”
“네.”
노랑머리는 나를 좀 더 잘 눕혀놓고 2층으로 향했다. 그는 2층을 다 돌아다녔지만, 사람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웬 공간에서 누군가 묶여있던 흔적을 발견했다.
“여기 있었나보네.”
선정이 있었던 현장에는 가위로 잘린 밧줄이며 의자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노랑머리는 그걸 쭉 보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없어요. 풀려난 것 같아요.”
“아 다행이…….”
“박 쌤, 정신차려요. 쌤.”
나는 노랑머리의 말을 확인하고 다시 기절해 버렸다. 노랑머리는 나를 들쳐 업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 * * * *
잠시 뒤,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노랑머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좀 괜찮으세요?”
나는 노랑머리가 오늘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노랑머리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 니가 납치하라고 시킨 거지?”
노랑머리는, 기껏 구해줬더니 다짜고짜 멱살을 잡는 나를 보며 짜증을 냈다.
“아니 기껏 택시까지 타고 가서 구해줬더니, 내가 납치 했다구요?”
“아니면 거기 내가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리고 납치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에, 핸드폰에, 네비게이션까지 사게 했잖아! 니가 계획한 게 아니면 뭐냐고!”
나의 말을 들은 노랑머리는 잠시 망설였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납치계획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그걸 이야기하려면 자기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데, 그러면 쫓겨날게 뻔한 상황이었다.
“납치될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를 사게 하고 핸드폰에 네비게이션까지 사게 한 거죠. 박 쌤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니가 납치를 시켜놓고 내가 잘 버텨주기를 바랬다고?”
“아뇨, 유 사장 그 개자식이 시켰다고요. 나한테 시켰는데 내가 안한다고 하니까. 다른 조폭 놈들을 돈으로 사주해서 납치를 시켰어요. 그걸 알고 있는데, 뭐라도 해서 대비를 시켜야 할 거 아닙니까?”
나도 유 사장이 배후인 건 눈치 채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 내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유 사장 뿐이니까. 거기다 노랑머리는 유 사장의 측근이니, 그가 유 사장이 시킨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노랑머리는 은연중에 나를 돕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넌 유 사장 친척이라면서, 그걸 나한테 믿으라는 말이야? 왜? 왜 날 생각해주는 척 하는 거냐고? 왜?”
노랑머리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한테 배울 게 많으니까요. 나도 당신처럼 좋은 미용사가 되고 싶으니까….”
“유 사장이 좋은 미용실 소개해줄 거야. 거기 가.”
결과적으로는 그가 나를 도와주었지만, 그를 옆에 두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 더 이상 그를 받아주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유 사장은 사실 내 친척이 아니니까요. 사실 난, 난 당신 옆에 있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라서, 그냥 착한 척 좀 해봤어요. 그래야 덜 미안하니까.”
“친척이 아니라고? 나한테 뭐가 미안한 건데?”
그가 누구인지 알긴 하지만, 일단은 시치미를 떼어 봐야겠다.
노랑머리는 갑자기 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 사실, 당신한테 복수하려고 거기 들어갔어요. 나 누군지 몰라요?”
결국, 내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노랑머리.
그를 알아보았지만, 지금은 뭐라 할 말이 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 그 절도사건 노랑머리잖아요.”
“그래. 하하.”
나는 노랑머리를 한번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오는 여유라고나 할까.
“알고 있었어요? 난거?”
“그냥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어쩐지 졸라 열심히 가르쳐주더라니, 알고 그런 거였어?”
“아니, 진짜 그놈이라면 내편으로 만들어야 내가 살해당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하하.”
노랑머리는 갑자기 나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조폭들에게 맞은 게 아파 낑낑대며 노랑머리를 안아주었다.
“미친 박 쌤아, 사람이 왜 그렇게 착해. 내가 사실 당신 반쯤 죽이려고 거기 들어간 거였단 말이야.”
“니가 아직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면, 그런 과거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그거 잊을 만큼 모든 영혼을 쏟아 붓는 일을 찾지 못했을 뿐이니까.”
“미친…, 내가 이제부터 당신 보디가드 해줄게요. 걱정 말아요.”
“아니 근데 이게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미쳤데.”
“나 같은 놈을 제자로 받아주는 게 미친 거지.”
노랑머리는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이고, 아픈데 더 아프게 그러네.
“야야, 아파 죽겠어.”
노랑머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 사장 이 개자식한테 복수하고 오겠습니다.”
“안 돼! 그러면 한 원장님이 너에 대해 알 거 아냐.”
한 원장님이 노랑머리의 정체를 안다면, 당장 그를 자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놈이 벌을 받아야지요.”
“그냥 이중첩자 노릇을 해. 오늘처럼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게 말이야.”
“아, 뭔가 흥미진진하네요. 좋아요.”
유 사장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럴 때마다 노랑머리가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는 것이다. 유 사장의 행동에 맞대응 함으로써, 그에게 더 큰 데미지를 입하기 위해서는, 노랑머리가 유 사장의 계략을 미리 알려줘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유 사장을 혼내주기는 해야겠지.”
“그렇죠, 반은 죽여 놔야죠.”
노랑머리는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 사장이 이 납치사건을 시킨 배후라면, 그는 조폭들을 신고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이용하면 되겠다.
“혹시, 그 조폭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
“네, 알죠. 내가 소개해줬거든요.”
“아, 그래? 그럼 걔들을 좀 만나게 해줄 수 있나?”
“네,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래? 그럼 그것들 좀 만나야겠어.”
일단 그 조폭들부터 만나기로 한다. 어차피 그놈들도 돈을 받고 한 것이니까, 또 돈을 준다면 다른 일도 맡아 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 * * * *
유 사장의 차는 막힘 한번 없이 서울에 다다르고 있었다. 선정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승철은 선정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유 사장에게 물었다.
“그들이 대체 왜 준수에게 전화를 한 겁니까?”
“조용히 좀 허드라고.”
선정은 작은 소리로 코까지 골고 있었다. 깨어나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사장님한테 원한이 있었으면 사장님한테 전화 했겠죠.”
맞는 말이다. 유 사장은 승철에게는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겠다고 판단했다.
“나, 그 새끼가 하도 날뛰어서 내가 손 좀 봐줬어.”
“네? 아니 그런데 왜 선정이를 납치해요?”
“그건 모르제. 난 걍 그놈의 여자친구를 납치하라고 했응게.”
유 사장은 승철을 잃는 게 두려웠다. 어떻게든 승철이 나를 싫어하게끔 만들어야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승철의 여자친구를 몰래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그자식이 니 여자친구를 넘봤나보지. 여자친구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걸 보고 걔들이 눈치를 깐 거 아니겄냐? 거기다 니 여자친구를 데리고 쇼핑을 해불고 그라든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 걘 선정이를 진작에 싫다고 했는데.”
“원래 사람이 자기 마음과는 반대로 말하드라고. 안 그런가?”
“그래도 그건 아니죠.”
유 사장은 어떻게든 승철이가 준수를 증오하게끔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싫어하게 되고, 그걸 빌미로 승철이를 통해서 나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 *
“그 꼴로 대체 어딜 가려고요?”
다음날 아침, 맞아서 엉망이 된 몰골로 병원을 나섰다.
노랑머리가 걱정이 된 듯 쫓아 나오며 나를 붙잡았다.
“그놈들 만나러 가야지.”
“그놈들한테 더 맞으면 어쩌려고?”
“그니까 너랑 같이 가는 거잖아.”
“아니 내가 언제 따라간다고 했냐고?”
“지금 따라오는 건 누구냐고?”
노랑머리는 한숨을 팍팍 쉬며 나를 쫓아갔다.
“아우, 못 말려.”
노랑머리는 툴툴대면서도 나를 쫓아 차에 탔다.
놈들의 아지트 앞에 차를 댄 나는 노랑머리에게 차 열쇠를 맡겼다.
“넌 일단 여기 있다가, 내가 안 나오면 공중전화로 신고를 해.”
“같이 안 들어가고?”
“너 저놈들이랑 감방 동기라면서, 이제 저런 놈들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 나랑 같이 최고의 미용사가 돼야지.”
나는 노랑머리에게 윙크를 하고서 놈들의 아지트에 들어갔다. 노랑머리는 정색을 하면서도 나의 친근함이 싫지 않은 듯 피식 웃었다.
노랑머리는 내가 걱정되었지만, 잘 해결하고 올 것을 믿고, 앞쪽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뭐야? 어제 그놈이네?”
“니네 보스 좀 만나자.”
“왜, 더 맞을라고?”
내가 다가오자 조폭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어제 북어쳐럼 두드려 맞던 놈이 너무 당당한 기세로 들어오는 것이 신기할 테지. 곧 놈들의 보스가 나의 앞에 섰다.
“여긴 뭐 할라고 왔나?”
딱 보기에도 험악한 얼굴의 보스가 나의 앞을 막아섰다.
보스의 카리스마가 주변 공기를 장악했지만, 나는 그에게 지지 않으려 몸을 쫙 폈다.
“어제 맞은 거로 신고하면, 여기 놈들 몇 놈을 감옥에 보낼 수 있어.”
“이 새끼가 더 맞아야겠네.”
“가만있어.”
깡패 놈 하나가 나를 또 때리려고 하자 보스가 그를 막았다. 맞는 게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었다. 죄를 지은 것들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너희들을 용서해줄 수 있겠는데, 물론 대가도 지불할거고.”
나의 말에 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머지 놈들도 나의 말을 흥미롭다는 듯 듣고 있었다.
“뭐냐? 일단 들어나 보지.”
나는 주머니에서 돈 봉투를 꺼내 들었다.
돈 봉투부터 꺼내자 놈들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 * * * *
“박준수가 가게에 나오지 못했어요.”
승철의 말을 들은 유 사장은 아침부터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예상대로 실컷 두드려 맞고 아파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사무실에 들어가려는데, 조폭들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니들?”
“같이 좀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딜 가자고? 나 바쁜 사람이야.”
덩치들은 유 사장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를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유 사장은 뒷좌석에 앉아서도 길길이 날뛰며 소리 질렀고, 이에 짜증이 난 덩치들이 유 사장의 입에 테이프를 붙여버렸다.
“좀 조용히 갑시다. 기절시키기 전에.”
덩치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유 사장을 쳐다보자, 겁먹은 유 사장은 마네킹처럼 멈춰 서서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있었다. 그를 태운 차는 나를 불러냈던 폐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