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재준의 등장
나는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을 제시하며 작가에게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작가는 웬만하면 그 조건을 들어줄 것이다. 아니, 들어줘야 한다.
“조금 실례되는 조건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작가는 나의 말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네, 무슨 조건인가요?”
“다영이가 데뷔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데뷔는 시켰지, 내가.”
이사장이 다영을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시켰었다. 거기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이 많이 늘었었다.
“주인공으로 말이에요.”
“네? 그게 가능할까요?”
작가는 뜻밖의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황당한 조건이 아닌가?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데뷔시킨단 말인가? 이사장조차 나의 제안이 황당한 듯 보였다.
“다영이가 촬영한 부분을 살려달라고요. 찰떡같이 소화 한다고 인터뷰까지 하셨잖아요.”
“그랬지. 아주 찰떡같이 잘 어울렸어요. 다영씨가. 흑흑 진짜 아까운 인재인데.”
“제가 연기 연습을 진짜 많이 시켰답니다. 어휴.”
“그니까요. 그 부분 다시 찍지 말고 살려주세요. 그래야 덜 미안할 테니.”
“누가 미안해요?”
“제가요.”
김설아가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작가는 안 그래도 다영과 닮은 사람을 섭외해서 다영의 촬영 한 부분을 살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닮은 사람도 없거니와 연기도 형편없었기에 새로 캐스팅 한 배우가 전부 다시 찍어야 할 판이었다.
“닮은 배우도 없고, 좀 닮았다 하면 연기가 너무 형편없어서 나도 죽겠어요. 겨우 캐스팅 한 배우가 얼굴이 너무 달라서 다영씨 부분을 다시 찍는데 합의 했어요.”
“아이고, 돈이 많이 들겠네요.”
“제가 생각한 게 있는데, 좀 들어보시겠어요?”
“뭔데요? 뭐라도 좋으니 말해주세요. 전 도저히 모르겠어요. 앞으로 80회는 더 진행해야 하는데 연결이 쉽지가 않아요.”
일일연속극은 120회가 기본으로 인기가 있으면 200회까지 늘리는 경우도 많은데, 이 드라마는 후에 160회까지 늘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실 다영씨가 이 드라마를 찍지 않았다면 비디오가 그렇게까지 퍼지진 않았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 뒤라서 비디오도 여기저기 팔려나갔던 것이다.
“제가 보니까. 다영씨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는 부분까지 촬영을 했더라구요.”
“그래, 그거 찍으면서 멍이 좀 들었는데.”
“그랬죠. 그 이후로 복수를 결심하거든요. 아우! 그래서 연기력이 중요하거든요 복수의 화신!”
원래 드라마는 다영이 화장법을 바꾸고 머리스타일을 짧게 자른 뒤에 복수에 나서는 것인데, 이 상황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2021년이야 얼굴을 갈아엎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에는 성형 기술이 형편없었기에 이런 설정을 하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성형을 하는 사람을 무슨 죄인 취급하던 시기라서, 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형을 시키는 거예요. 미국으로 가서 말이죠.”
“네에에?”
“성형은 오버 아닌가?”
이사장은 이 의견에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시절 남자들은 여자가 성형한 것에 대한 반감이 좀 있었기에 그러했다.
반면, 작가는 매우 놀란 얼굴로 한동안 멈춰 있더니, 갑자기 깔깔 거리면서 웃었다. 박수까지 쳐가며 웃다가,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어 있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한국은 아직 성형이 익숙지 않아서 그렇죠. 그니까 그걸 아주 먼 타지에서 하고 온다면, 어떤 얼굴로 바뀌어도 상관이 없을 테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맞아, 맞아. 아주 찰떡이야. 당신이 날 살렸어요!! 고마워요!”
작가는 매우 흡족해하며, 연신 고맙다고 하였다.
다영의 연기는 약속대로 방송되었고, 마케팅을 따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찾아와서 작품을 홍보해 줄 정도로 초반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원래 160회까지 연장 되었던 작품은 200회까지 연장되며 마지막까지 큰 사랑을 받았다.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작품이 끝나기도 전임에도 다영은 신인연기상의 후보에 올랐다. 원래는 작품이 끝나야 주는 것이 맞는데, 다영만 예외로 후보에 올랐다. 사실 원래는 다영이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작품이 끝나자마자 비디오 사건이 터지면서 다영의 수상이 물건너 갔었다. 덕분에 김설아가 수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영이 신인연기상을 수상하고야 만 것이다.
다영을 대신해서 수상한 이사장은 고맙다며 눈물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젝키스와 핑크까지 가수상을 수상하였다. 그 해는 그야말로 이사장의 한 해가 된 셈이다.
김설아는 다영이 연기상까지 타자 미안함을 씻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었다.
* * * * *
“정말 잘 되었어요. 다영씨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김설아는 내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다. 다영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일 촬영장에서 뵐게요. 설아씨.”
“네, 그때 뵙죠.”
내일 김설아의 CF촬영이 있는 날이다.
그곳에서 드디어 재준을 만나게 된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박준수 선생님, 손님 오셨어요.”
“넵.”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오늘 예약한 손님은 다름 아닌 박주영 작가님이었다. 피부병이 악화될 때마다 대작을 쓴다는 그 작가님 말이다.
이번 작품은 대작의 첫 신호탄이 되는 작품으로 김설아도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다. 역시, 작가님은 작품의 퀄리티에 맞게 피부병이 심각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보일 정도로.
“아, 안녕하세요!”
“제가 출판 기념회가 있어서 이 꼴을 하고서 왔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셔서 그런걸 텐데요.”
“아이고, 그걸 알아주시다니. 그래서 제가 책을 가져왔어요.”
“우와, 이거 영광입니다!”
박주영은 내게 친필 사인이 적힌 책을 선물해 주었다. 박주영 작가의 초판은 훗날 경매에 나올 정도로 귀한 초판이 되는데, 거기에 사인까지 해주다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럼 머리카락을 좀 잘라주시겠습니까?”
“네! 앉으시죠.”
박주영 작가는 피부병이 매우 심각하여 머리에도 비듬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사실 미용실에서 달가워 할 수 없는 손님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성스럽게 대하였다. 그게 훗날 내 미용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을 예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뿐이다.
* * * * *
다음날, 김설아의 CF 촬영 현장에 도착한 나는, 김설아 옆에서 낄낄대고 있는 고재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자식이?”
그러고 보니 고재준이 김설아를 좋아하긴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말이다.
하긴, 김설아는 만인이 좋아하는 여인이었으니 그가 흠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수씨!”
“준수?”
김설아가 나에게 손은 흔들며 웃어주자, 고재준이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회귀하기 전 고재준의 다리 사이를 기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회귀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의 분노 게이지도 점점 차올랐다.
“박준수?”
고재준이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놈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걸 지금 들어낼 수 없다. 그렇다고 기뻐 웃어줄 수는 없기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본 김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고재준?”
“오랜만이네. 유명한 미용사가 되었다더니, 김설아씨 담당이야?”
“어, 설아씨 담당 미용사야.”
“두 분이 아는 사이신가 봐요?”
“네, 동창이에요.”
그제야 설아씨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나는, 억지웃음을 거두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설아씨를 보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유학 갔다더니, 언제 왔어?”
“어, 잠깐 왔는데 김설아씨가 우리 기업 CF를 찍는다고 해서 왔지.”
우리 기업. 정확히 말하면 재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업이다. 재준은 현재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용으로 사업을 전환하고 난 뒤부터 아버지의 관심도 받게 될 테지.
“니가 뭔데 여길 와? 하하. 아버지 기업은 형 건데.”
“뭐??”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와 버렸다. 그를 도발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가 웃는 건 더 못 봐주겠다.
“아니, 설아씨 지금부터 헤어랑 메이크업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지.”
“그래, 알았어. 김설아씨 나중에 식사 한번 해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네, 알겠어요.”
김설아가 재준을 보며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진심을 토해버렸다.
“김설아씨는 내가 좋아하는 분이니, 너랑 식사하는 건 좀 참았으면 좋겠다.”
“뭐?”
“네?”
내 말에 나도 놀라고, 설아씨와 재준도 놀랐다.
“나랑만 식사할거야. 너는 너 좋다는 여자 많잖아.”
“하하, 그래. 근데 김설아씨도 이 녀석이 좋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설아의 얼굴도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성을 차리고 재준을 바라보았다.
“네. 저도 박준수씨를 좋아합니다.”
갑작스러운 고백 타임. 내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벌개졌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재준에게 말하고 있다. 이보다 짜릿한 일이 또 있겠는가?
“설아씨?”
“하하, 이거 본의 아니게 둘의 오작교가 되어주었군. 알았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노려보았구나? 둘이 잘 해봐.”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나중에 뵐게요.”
“네, 설아씨. 나중에 뵙죠.”
재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지금부터 설아씨의 머리를 해야 하는데, 왠일인지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 이거 밥을 안 먹어서 그런지 배고파서 손이….”
“호호. 네, 그렇군요.”
머리를 하는 동안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영부인이 될 사람이다. 내가 자중해야 한다.
“제가 좋아하긴 하지만, 설아씨는 저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대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대통령쯤 되어야 할 것 같네요.”
김설아는 대통령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더 선을 긋는 소리로 들렸다. 본의 아니게.
“대통령쯤 되는 사람을 만날 겁니다.”
“그게 무슨!”
김설아는 내 말에 기분이 상해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머리가 끝났다.
“거절을 참 이상하게 하시네요? 박준수씨.”
“그게… 아니고.”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눈치 없게 그 타이밍에 눈물이 핑 돌았다. 거절이 아닌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급하게 눈물을 닦긴 했지만, 김설아가 그걸 보고 말았다. 왜 눈물이 조금 나왔는지 궁금한 얼굴로.
“전 이만 커피를 가져올게요.”
“네.”
나는 황급히 그 곳을 빠져나갔다.
* * * * *
재준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을 보니, 이제 그가 미용 관련해서 사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가 사업을 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유 사장을 만나는 것이었다. 재준이 유 사장을 만나면서 모든 사업이 제자리로 가게 된다. 그걸 막아야 재준을 넘어설 수 있다.
거기다 유 사장의 행태가 도를 넘어섰다. 더 이상 그를 봐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를 망하게 해야, 재준도 사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유 사장을 혼내줄 방도를 생각하며 신문을 펼쳤다.
“어? 이게 이제 오픈하는구나?”
조간신문 속 기사 몇 줄을 보자, 유 사장을 혼내줄 방법이 생각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랑머리가 있어야 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