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난 소중하니까요(3)
설마…….
“네, 암튼 감사합니다. 나중에 사례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공장에 선물 하는 걸로 하고, 고객 중 몇 분께 연락을 드릴 겁니다.”
나는 공장장이 건넨 전국 유통 상태지를 받아들고서 공장을 나섰다. 하나 걸리는 것은 공장장의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이 공장을 나서는 순간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럼 그거 가지고 어떻게 하는 거야?”
“거기에 나온 재료상에 연락해서 공장에서 나왔다면서 가장 많이 팔아주는 미용실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야지. 사은품을 준다면서 말이죠.”
“오, 그래서?”
“그래서 김 실장님의 직원들에게 각 지역에 있는 그 미용실을 직접 보고 잘 되는 곳이 맞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거죠.”
“응, 그래 그게 1주일이면 되겠네.”
“그 중 몇 군데는 우리가 가서 직접 확인해보구요.”
“응, 준수씨만 믿고 있을게.”
김 실장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 * * *
“여기 대학로 쪽에 있는 미용실인데 규모도 중간 이상이고, 무엇보다 탈색약 소비가 서울 강북권에서 1등이라고 하더라고, 한번 같이 가볼 거야?”
“네, 여기 저도 알아요. 정말 잘 하는 미용실이죠.”
나는 그 미용실이 어디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회귀하기 전, 결혼 전까지 다녔던 미용실이니까 말이다. 대학로에서 가장 잘하고 유명하며, 개그맨들 단골도 꽤나 많았던 미용실이었다.
“여길 다시 올 줄은 몰랐네요.”
나는 마치 고향에 온 사람처럼 감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김 실장이 옆에 없었다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미용실 쇼윈도우 안에는 나와 함께 스텝 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나를 갈구면서도 챙겨줬던 홍 선생, 조 원장 등이 전부 한곳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뒤를 돌았다.
“근데, 여긴 굳이 확인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보증할게요.”
“정말 잘 하는데 맞아?”
“네, 잘 하는 곳이에요.”
“그래, 그럼 다음 장소로 가 볼까?”
김 실장은 나온 김에 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다른 데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은 저 사람들만 쳐다보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순간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저 그냥 여기에서 잠깐 있을게요. 생각할 것도 많고, 그래서요.”
나는 차안에서 미용실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밤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들이 미용실을 나오면 다 같이 술 한 잔 하러 갈 거고, 그들을 따라 옆에서 술이라도 마신다면 좋을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미용실에서 스텝용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나오더니 나의 차를 거세게 두들겼다. 욕설도 서슴지 않은 것을 보니 누가 생각났다.
“야, 이 새끼야. 남의 미용실 앞에서 몇 시간 째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냐?”
그 여자는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범상치 않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가 귀찮은 듯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가 얼른 닫아버렸다. 그녀는 바로 이은서인 것이다.
“어쭈? 너 내가 아는 새끼지? 문열어 새꺄!”
나는 깜짝 놀라서 시동을 켜고는 손살같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은서는 나의 차를 끝까지 쫓아오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달리기는 어찌나 빠른지 차가 따라잡힐 정도였다. 잡히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야 #새끼야! 잡히면 조져 버린다! 너 #발 디졌어.”
은서는 뛰어오다가 말고 나의 차 번호판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빨리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은서가 출소한 것을 알고 그녀의 미용실 앞에서 감시하다가 들킨 셈이니 꼴이 우습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얼굴만이라도 들키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9824 검은색 그랜저. 기억해둔다 칵 퉤.”
은서는 가래침을 찰지게 뱉고는 다시 돌아갔다. 가면서도 연신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은서가 돌아가는 것을 본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갑자기 제가 왜 저기서 나오냐.”
은서는 미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진 않았는지, 출소하자마자 미용실에 취직했다. 강남권에서는 얼굴이 조금 알려진 탓도 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있기에, 대학로 쪽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게 하필이면 내가 일하던 그 미용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다행이네, 그나마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것 같네.”
나는 은서가 다시 미용사의 길로 가게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은서는 성격이 지랄 같아도 미용에 재능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서가 나쁜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꿈을 버리지 않았을 뿐, 환경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 * * * *
“정말 이 미용실들이 전부 잘 하는 곳이란 말이죠?”
프레데릭은 내가 가져온 서류들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정말로 이 숙제를 다 해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네, 직접 확인을 해 보시죠.”
“아 그럼 여기를 가봐야겠네요. 이곳에서 가깝고.”
“네? 여기는.”
프레데릭이 짚은 곳은 다름 아닌 은서가 있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수많은 미용실 중 그곳을 택한 것이다. 프레데릭은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더욱더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얄궂게도.
“여기 가고 싶은데요?”
“거, 거기 말고 다른 데는 어떤가요?”
“아뇨, 저는 여길 가고 싶습니다.”
프레데릭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니 더 가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그럼.”
“왜 그러는 거야? 거기 잘하는 곳이라며?”
김 실장이 겁먹은 얼굴로 따라오며 물었다. 아마도 그 미용실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미용실에는 정말 문제가 없다. 은서만 없다면 말이다.
“가보시면 알아요. 내가 왜 이러는지.”
“아니, 가서 잘못되면 어쩌려고?”
김 실장은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는 쫓아 나왔다. 프레데릭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자신의 안목이 정말 좋다고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여기에요. 이리 오시죠.”
프레데릭이 건물을 나서는데, 웬 젊은 여자 두 명이 다가왔다. 두 여자는 모두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 헤어 모델이 되어줄 두 분입니다.”
“아, 그럼 이분들이 직접 미용실에 가는 건가요?”
“네, 한분은 블루블랙을 시술한지 6개월이 되셨구요. 한분은 버진헤어 입니다.”
“그럼 저는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 같이 가고 싶으시면 가시던가요.”
“아유, 아닙니다. 저도 바쁜 사람이거든요.”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은서를 직접 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 이따가 이 모델분들과 미용실 앞에서 뵙도록 하죠. 거기는 나오실 거죠?”
“네. 물론입니다.”
나는 신이 나서 대답하고는 얼른 차로 들어갔다. 김 실장은 나의 반응이 대체 왜 저러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참고서 나의 차에 올라탔다.
“왜 그러는 거냐고? 왜?”
“이은서, 이은서가 거기 미용실에 있어요!”
“어? 걔 벌써 출소했어?”
“네. 출소하자마자 미용실에 취직했나 봐요.”
나는 이은서를 보자마자 노랑머리에게 전화를 하였고, 노랑머리는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하게 이은서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이은서는 감옥에서 열심히 미용일을 배웠고 취직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실력을 쌓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좋지 않은 사람들과 엮였고, 그들 때문에 굉장한 돌아이가 되었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었다.
“근데 내가 봤을 때는 이은서보다 그 노랑머리가 훨씬 나쁜 놈인 것 같던데?”
“아니에요! 노랑머리는 사실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니까요. 원래 뒤에서 시키고 조종한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잖아요!”
이은서는 노랑머리를 남자친구이자 종처럼 부려먹곤 했다. 노랑머리에게 미용실에서 나가는 심부름꾼의 돈을 훔쳐 오라고 시킨 것도 이은서였고, 미용실을 털라고 시킨 것도 이은서였다. 노랑머리는 그저 이은서가 시킨 대로 하다가 감옥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회귀 전에는 이은서가 아닌 노랑머리만 혼자 감옥에 갔었다. 억울하게도.
“그렇긴 하지만……, 박준수씨는 실컷 두드려 맞고도 그놈 편을 드는 거야? 너무 착한 거 아닌가?”
“편을 드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 아무튼 좀 이따가는 조심해야겠네. 이은서가 나오다가 보기라도 하면 욕부터 할 것 같아.”
“그죠, 아마 욕도 보통으로는 안할 겁니다.”
그때, 뒤에서 쫓아오던 이은서는 그 와중에도 욕을 바가지로 했었으니까, 가까이서 본다면 더 무서운 욕을 쏟아낼 것이다. 나는 상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김 실장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 * * * *
“이야, 두 사람 다 완벽하게 머리를 해냈네.”
모델로 보낸 두 여자의 머리는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긴 내가 도봉동에서 가장 좋은 실력을 지녔다고 칭찬받았던 것도, 다 이 미용실에서 쌓은 실력 덕분이었다. 그 미용실에서 한 것이니 당연히 완벽하게 해냈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잘하는 미용실이었군요.”
프레데릭은 적잖게 실망한 듯 보였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는 상상을 하고 나왔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제가 심사숙고하여 고른 미용실입니다. 사실 강북권에서 탑10에 드는 실력을 지닌 곳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신의 실력의 반이 이곳에서 쌓아올린 것이니, 미용실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좋은 곳에 잘도 들어갔네. 걘.”
김 실장이 혼잣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프레데릭이 김 실장을 쳐다보았다. 김 실장은 이내 말을 아끼고 고개를 숙였다. “네?”
“아뇨. 별거 아닙니다. 계약서는 가져오셨죠?”
“네, 그럼요.”
프레데릭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가지고 온 가방을 꺼내들었다. 꺼낸 계약서는 이면계약서였다. 계약에서 불리한 부분은 뒷장에 감춰둔 그런 계약서였다. 나는 2021년까지 살면서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들은 사람이다. 그가 그런 계약서를 놓치고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나는 계약서의 뒷장을 떼어내며 프레데릭에게 내밀었다.
“이런 속임수를 대기업에서 할 줄은 몰랐네요?”
“아 이런, 그거 실수로 붙여진 겁니다.”
프레데릭은 깜짝 놀라하며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일개 미용사가 저런 이면계약서까지 알고 있다는 데에 매우 놀란 눈치였다.
“제가 완벽하게 숙제를 해드렸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시지요?”
“네, 물론입니다. 그래서 두 케이스의 모발을 보낸 건데 두 명 다 완벽하게 해냈더군요.”
“그럼, 약속대로 저의 조건을 말씀드리죠.”
“네, 일단 말씀하시죠.”
나는 이 계약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건 사실상 대기업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 아니니까,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은 그냥 받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아무 조건이나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대한 대기업에 아무 피해가 없으면서도,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조건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저의 조건은…….”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