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미국에서 날아 온 망나니(1)
남자는 모든 말들을 듣고 있었던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은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투자를 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는 바로 은미의 아버지 이만수였다.
“아빠?”
은미가 아빠인 만수를 알아보고 말했다. 은미의 말을 들은 노랑머리는 너무 놀랐지만 침착하게 만수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만수는 노랑머리는 쳐다보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노랑머리는 만수가 너무 냉정하게 나오자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투자 할 테니, 저놈과 내 딸이 헤어지게 해 주시오.”
만수는 오늘 작정하고 왔다. 은미와 노랑머리를 헤어지게 하려고 말이다.
은미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은 진정 생각하지 않은 듯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빠, 왜 이러세요. 정말!”
그러자 만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저 놈 정도만 되어도 말리지 않겠어.”
만수는 다시 노랑머리를 손가락질 하였다.
“넌 어떻게 저런 놈이랑 그럴 수가 있냐? 너는 왜 그러냐. 정말?”
만수는 자신의 딸을 애지중지 기르며, 최고의 신랑감을 만나게 해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노랑머리라니? 자신의 하나뿐인 외동딸이 그런 전과자와 사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사실 만수가 아닌 다른 부모라도 말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노랑머리는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더니 만수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제가 부족한 놈인 거 알지만, 은미 사랑하는 건 확실합니다.”
노랑머리가 무릎을 꿇고 말했지만, 만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은미가 노랑머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러지마, 당신 잘못한 거 없어.”
두 사람을 본 만수는 기가 막힌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
“그리고 니 돈도 사실 내 돈이니, 그거 빼서 투자할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알겠어?”
만수는 두 사람을 노려보고는 나가려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나는, 만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채로 쓰겠습니다. 이자는 3부로 하죠.”
“네? 그건 아니죠!”
내 무모한 말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채가 뭐시무니까? 그거 사람 망하게 하는 거 아니무니까?”
나는 일단 투자를 받아서 회사를 설립하면 금방 갚아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실 내가 가진 자산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어가면서, 거기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투자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김주원 회장에게 부탁하면 되겠지만, 지금은 그걸 쓰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차리기만 하면, 수익이 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성공할만한 아이템만 가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나의 말에 당황하고 말리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단호했다.
“주식에 들어간 돈 전부 내어주시죠.”
만수는 뜻밖의 말에 발길을 돌려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의 배포에 관심이 가는 표정이었다.
“사채가 뭔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3부 이자가 어느 정도인지도 아는 거겠지?”
“그럼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한테 절을 하실 일이 생길 겁니다. 그땐 이자를 깎아주셔야 할거구요.”
“뭐? 무슨 깡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돈은 마련해주도록 하지.”
만수는 나의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 사채를 빌려주기로 하였다. 사실 그동안 노랑머리를 조사하면서 나에 대한 것도 많이 조사했었기에, 내가 돈을 못 갚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다.
“제 조건은 주식에 넣은 돈만 달라는 겁니다. 은미씨 주식도 포함해서요.”
“그건 왜지?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나?”
“조만간 주식 시장에 변동이 있을 거라는 소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4월에 주식 폭락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에 모든 사람들의 주식을 전부 빼내야겠다고 계산하고 있던 터였다. 당장 주식을 빼라고 할 때는 욕을 좀 먹을지도 모르지만, 4월 이후에는 모두 나에게 큰 절을 할 것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만약 변동이 없을 땐, 어쩔 건가?”
“그럼 회사를 은미씨에게 넘기겠습니다.”
“뭐?”
“아이고 머리야.”
“저게 진심이무니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한 도전이다. 만수는 잘하면 회사 하나를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마다한다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좋아. 만약 변동이 있다면 무이자로 전환하도록 하지.”
“그럼 돈이 마련 되는대로 다시 연락 주세요.”
노랑머리와 은미는 자신들을 볼모로 잡지 않고 일을 해결한 나에게 다시금 감사했다. 김 실장, 대머리 이사와 조씨만 오늘의 일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나는 흥분한 두 사람을 겨우 달래서 보내고, 한숨 돌렸다.
이제 투자를 받고서 회사를 설립할 일만 남았다. 그 회사의 첫 사업은 붙임머리와 김소연의 김다이어트가 될 것이다. 두 사업 다 대박을 칠 아이템이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그보다 먼저, 한 원장의 결혼식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미안한 마음 없이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 * *
나는 사업 진행에 앞서서 한 원장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 전까지는 언제 할지 감도 없었던 결혼식이, 나의 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한 원장은 사실 결혼 한다고 선언만 했지, 언제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는데, 내 덕분에 하는 셈이다.
“야야, 여 청첩장 나왔데이.”
“와 이제 진짜 결혼을 하시는구나.”
한 원장은 조 원장에게 정식으로 청혼까지 하고, 그녀와 살림도 합쳤다. 조 원장의 미용실은 [스타일 헤어]의 분점으로 바뀌며, 연예인들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원래 조 원장의 소원이 연예인 전담 미용실이었으니, 소원 성취를 한 셈이다.
3월, 한 원장과 조 원장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결혼식 사회는 나의 부탁을 받은 유재섭이 맡아 주었다. 나와는 저번에 잠깐 보았는데, 오늘은 내가 직접 찾아가서 부탁한 것이었다. (동거동감)이라는 프로그램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라서 유재섭을 섭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유 그렇게 큰 금액을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재섭은 내가 거액을 주고 사회를 맡기자 내심 좋았지만, 자신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받을만한 실력을 갖고 계십니다. 앞으로 더 유명해지실 건데, 미리 가치를 높여드린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유,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 제가 잘 안 풀려서 걱정이 많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유재섭은 다른 설명할 필요 없이 큰 MC가 될 것이고, 그게 아마 올해 가을부터 시작될 것이다. 미리 잘 보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원장의 결혼식은 유재섭을 필두로, 핑크와 젝키스, 송애교와 왕수정 등 수많은 탑스타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어느 대형 연예인의 결혼식에도 뒤지지 않을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졌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나의 설아씨는 스케줄이 바빠서 내 얼굴만 보고 돌아갔다. 그녀가 너무 바쁜 것은 나쁘지 않지만, 너무 못 봐서 속상한 요즘이다.
김설아가 바빠서 돌아갔다. 이후, 나의 관심은 결혼식 시작 전에도 오지 않고 있는, 한 원장의 아들인 조셉에게 쏠렸다.
“아드님은 언제 옵니까?”
“니가 울 아들보다 더 낫다 아이가? 니가 해라 까짓 거.”
한 원장은 내가 아들만큼이나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결혼식장 입구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탁탁탁탁.
누군가 서둘러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조셉일 거라고 생각하고 주목하였다.
나는 조셉의 실물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아치, 미국에서 안 좋은 것만 잔뜩 배워 온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헤이, 와썹. 한선호씨 결혼씩에 왔는데, 어딨지?”
“설마 조셉?”
“오 나 알아?”
“오 마이 갓!”
조셉은 정장은커녕 찢어진 청바지와 온갖 장신구를 걸치고, 코에는 코걸이까지 한 진짜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결혼식장에, 그것도 아빠의 결혼식장에 저렇게 온 것 자체가 민폐이고 꼴불견인데, 그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를 급하게 화장실로 끌고 갔다.
“빨리 따라오라구요!”
“왜? 우리 파더 좀 보고!”
나는 조셉의 옷을 벗기고 나의 옷으로 갈아 입혔다.
“헤이 맨, 대체 왜 이래? 난 프리한 게 좋아!”
“프리 좋아하시네. 아버지 결혼식에 이러고 오는 놈이 세상천지에 어딨냐고?”
나는 조셉을 겨우 달래서 정장을 입히고 내보냈다.
“빨리 아버지한테 가서 결혼식 참석해요.”
“헤이 맨, 그 옷 너무 잘 어울려! 멋진 걸?”
“하아, 알았으니까 빨리 가보라고요.”
조셉이 나가고 그의 옷을 주워 입은 나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 옷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양아치가 따로 없네.”
나는 당장 가서 다른 옷을 사서 갈아입어야 했다. 하지만 그 옷을 입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화장실 밖에는 나의 얼굴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데, 거길 어떻게 통과한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나는 일단 전화로 노랑머리를 불렀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제 식 시작한다고요.”
노랑머리가 화장실에 들어왔지만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숨었어요?”
“여, 여기야.”
“뭐해요? 거기서.”
탁.
우하하하하하.
화장실 문을 열어제낀 노랑머리는 나의 모습을 보자마자 껄껄대며 웃었다. 아마 지금까지 본 노랑머리의 웃음 중, 가장 크게 웃는 모습일 것이다.
“그게 뭐야 진짜. 대박 웃겨.”
(참고로 대박이라는 단어는 2000년부터 유행했습니다.)
노랑머리가 하도 크게 웃어서 민망해진 나는 화장실 문을 닫아버렸다.
탕. 철컥.
“가라. 가라고!”
“에이 왜 그래요? 천하의 박준수께서.”
“나 좀 밖에 데리고 나가줘. 가리고서 말이야.”
“나가서 옷 사 입고 오게요?”
“그래야지 별 수 있냐?”
“알았어요. 문을 열어야지.”
철컥, 탁.
와하하하하.
노랑머리는 나를 보고 또 웃어댔다.
“야, 안 닥쳐?”
내가 진짜 화가 난 듯 소리치자, 그제야 웃음을 멈추는 노랑머리.
“나갑시다. 빨리.”
“어유… 조셉 진짜.”
나는 노랑머리의 자켓으로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렵게 1층에 도착한 나는, 자켓을 노랑머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넌 결혼식 잘 진행되게 신경 쓰고, 내 사정 원장님께 전달 좀 해줘. 알았지?”
“네, 걱정 말고 그 옷 좀 빨리 갈아입고 와요. 으하하하.”
노랑머리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대며 결혼식장으로 올라갔다. 나는 1층에 있는 수많은 하객들의 눈총을 받으며, 결혼식장을 빠져나갔다.
* * * * *
빠아앙.
차가 다니는 대로변에 섰다.
대로변에 서니 더욱 창피해진 나는, 옷을 사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
빵빵. 빠아앙.
택시는 빈차임에도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나의 차림새 때문에 태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택시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흰색 벤이 나의 앞에 섰다.
끼이익. 스으윽.
“박준수씨?”
흰색 벤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