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트레이드
“그럼 당장 데리고 와!”
이사장이 너무 좋아하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그러죠.”
성예진은 조만간 드라마를 찍게 되고 거기서 크게 주목받는다. 첫 주연작으로 신인 연기상을 휩쓸고는 쭉 탑스타를 유지한다. 그 전에 데리고 와야 한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거겠지?”
이사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물론 성예진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과 얼굴 빼고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이사장이 저렇게 웃는 것을 오랜만에 본 탓에 더욱 그랬다.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나는 일단 그렇게 말하고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성예진은 드라마를 찍기 전에 CF로 데뷔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그 시절 유행했던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거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서점에 있는 잡지를 다 사서 뒤졌다. 몇 개 살피지 않았는데 성예진의 인터뷰가 실렸다.
나는 그 길로 잡지사를 찾아갔다.
* * * * *
잡자사에서 알려준 대로 성예진의 현 소속사를 찾아갔다. 성예진의 소속사는 그다지 큰 곳이 아니었다. 말만 잘 하면 성예진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속사의 사장은 일개 엑스트라를 대하듯이 나를 대했다.
“용건이 뭡니까?”
“성예진씨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누구? 성예진? 당신 뭔데?”
“네, 저는 D미디어에서 일하고 있는 박준수라고 합니다. 원래는 미용사고요.”
나는 시답잖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장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사장은 내 명함을 보더니 명함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히트곡 알려주는 미용사… 그 사람인가?”
“네? 아…… 그걸 어떻게?”
내 말을 들은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악수를 청하였다. 표정도 180도 달려져 있었다.
“아, 진작 말씀하시지. 그래 성예진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요?”
“네, 성예진씨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애가 스타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데, 그쪽에서도 알아주니 기분이 좋군요.”
“네, 성예진씨는 이 소속사보다 우리가 더 잘 케어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놓치고 싶지 않네요. 반드시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겠어요.”
사장은 내가 성예진을 주목하는 것이, 마치 성예진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꼈다. 내가 히트곡을 전부 찍어준다는 말을 익히 들었었기에, 성공하는 스타를 알아보는 능력도 있을 거라고 믿은 모양이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에게 인정받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큰일이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니, 저는 다른 말은 더 하고 싶지 않네요. 이만 가주시겠어요?”
“저기 그러니까.”
사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를 밀어냈다. 참으로 고약한 양반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를 설득하는 것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사장실을 나왔다.
“미안한데 양보는 없으니까. 그만 가주시죠. 저는 바빠서 이만.”
“아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사장은 나를 복도에 남겨두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몇 걸음 채 안가서 내게 돌아왔다.
“혹시 지금 노래하는 곡이 히트할 노래인지 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 다시 생각해 볼 것 같은데요?”
참으로 고약한 양반이다.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일 뿐,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내게 히트곡만 알아내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사장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는 싱글거리며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랑 일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D미디어보다 훨씬 많이 드릴 수 있거든요.”
“됐습니다. 저는 의리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음, 그러시던지요.”
사장은 또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면 차갑게 변하는 것이 그의 특징인 듯 했다.
사장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녹음실이 있었다. 그 곳에서 걸그룹 연습생들이 한창 연습 중에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들은 2001년에 데뷔하는 걸그룹 슈가즈였다.
“어, 저분들인가요?”
“네, 어때요? 아주 예쁘죠? 그쪽 회사 간판인 핑크를 넘어설 그룹입니다.”
“아…… 네.”
그녀들은 분명 핑크만큼 예쁘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만큼 뜨지 못한다. 아유이만 뜨고 나머지 멤버들은 고만고만할 뿐이다.
어? 그러고 보니 슈가즈에 아유이가 없다? 핵심 멤버가 없는 것이다.
“노래는 적당히 뜰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핵심 멤버가 없잖아요.”
“핵심 멤버?”
“저 그룹에는 일본인이 한명 있어야 어울려요. 요새 글로벌 프로젝트로 외국인 한명씩 넣는 거 몰라요?”
“아, 알죠! 아는데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요.”
당연하지. 아유이는 우리 소속사에서 데리고 있으니까.
나는 아유이와 성예진을 트레이드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안 그래도 이사장이 아유이를 끼워 넣을 만한 걸그룹이 없다며 한탄하고 있던 터였다. 요즘 탈랜트 위주로 메니지먼트를 하다 보니 걸그룹에 신경 쓰지 않은 탓이었다. 남 주기엔 아까운데 딱히 키울만한 능력은 없는, 그런 상태라고 하겠다.
“그럼 우리가 데리고 있는 일본인 아이 한 명과 성예진을 트레이드하는 것은 어떤가요?”
“오! 괜찮은 아이가 있습니까?”
“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저 그룹의 이미지와 아주 잘 맞는 아이가 있거든요.”
“그럼 어서 데리고 오시지요.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사장은 다시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양은냄비 같은 양반이다.
“아, 그 전에 성예진씨 프로필 사진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네, 이리로 오시죠.”
사장은 아주 잘나온 성예진의 사진을 내게 건네주었다. 풋풋하고 아름다운 성예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빛 그 자체였다.
* * * * *
“아유이를 내놓으라고?”
이사장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아유이는 꽤나 귀여운 아이다. 다른 소속사에 양보하기 싫을 것이다. 나는 준비해 온 성예진의 사진을 이사장에게 내밀었다. 이사장은 성예진의 사진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쁘네?”
“네, 이쁘죠. 실물은 더 이쁩니다.”
물론 성예진을 본적은 없다. 짐작만 할 뿐.
“연기를 잘 해야 할 거야. 이쁜 것만 따져서는 안 되거든.”
“연기도 곧잘 할 겁니다.”
성예진은 한 번도 연기력 논란을 일으킨 적이 없는 배우다. 그만큼 내공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 그럼 추진해봐.”
이사장은 전보다 약간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일 년 동안 내게 차가운 얼굴이었다. 내겐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럼 당장 추진하겠습니다.”
나는 그 길로 아유이를 데리고 갔다.
상대편 사장은 아유이를 보자마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귀엽고 엉뚱한 매력은 사장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단 두시간만에 사장은 아유이에게 푹 빠졌다.
“안뇽하쎄요. 아유이에요.”
“딱이네. 딱이야!”
사장의 함박웃음이 두 시간동안 이어진 끝에, 아유이와 성예진의 트레이드가 끝났다.
사장은 내게 히트곡 몇 개를 더 선별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걸 들어주고 나서야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다. 이사장이 천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 * * *
이사장과 성예진의 일로 상의하고 있는데, 나의 전화기가 울려댔다.
부우우웅.
나는 전화를 받다가 실수로 스피커폰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나야, 만국 그룹 회장님이 자꾸 전화를 해서.”
나는 전화가 스피커폰인줄 알고서 황급히 껐지만, 이사장은 이미 통화 내용을 다 들은 후였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만국 회장님이면 그 회장님 말이니?”
나는 이사장과 겨우 좋아진 마당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다.
“네, 그냥 좀 알게 되었어요.”
“이야, 세상 참 좁구나. 안 그래도 그 회장님께 청탁을 할 일이 있거든.”
나는 이사장이 무리한 부탁을 할까봐 겁이 났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하였다.
“뭔데요?”
“어, 우리 수정이 새 드라마 협찬.”
“아, 그거 말해 볼게요.”
그 정도야 나에겐 식은 죽 먹기다.
“이야, 정말이야? 가능한 일이야?”
“네, 아마 가능 할 겁니다.”
이사장은 뛸 듯이 기뻐했다. 요 며칠 동안 이사장과 피디와 왕수정 본인까지 들락날락 했어도 안 되던 일이 나의 한마디에 된다고 하니.
나는 오랜만에 이사장이 근심을 거두고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하였다. 하지만 또 아기동자 분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 * * * *
“언제까지 내가 이런 분장을 해야 하는 건지, 대체 내가 뭔 짓을 하는 건지.”
나는 분장을 하는 내내, 궁시렁 거렸다. 거울을 보는 것도 싫어서 눈도 뜨지 않았다.
“분장 하나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데, 뭐 어떠슈.”
양 기자는 내가 회장님의 눈에 든 것이 은근히 부러운 눈치였다. 향후 2020년까지도 재벌 탑텐에 드는 어마어마한 그룹의 회장님의 눈에 든 것이니 당연히 부러울 일. 다만 본 케릭터가 아닌 가상의 캐릭터로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푸흡.
그렇지, 웃지 않으면 집사님이 아니지. 회장님의 집사님은 오늘도 오차 없이 웃음을 날려 주셨다. 나는 옆의 거울을 다시 보며 애써 참아주었다. 다음에도 또 웃으면 그때는 입에다 찹쌀떡이라도 물려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이고, 동자님 제가 몰라 뵙고 실수를 범했습니다. 세상에, 말씀하신게 다 이루어지더군요. 너무 놀랐습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은 내가 적어주었던 메모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바로 남북 정상회담이 적힌 메모지였다.
“이게 이루어진다는 말이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렇단 말이죠.”
나는 다시 메모지를 적기 시작했다.
[남북이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니, 금강산 관광 사업을 준비하십시오.]
회장님은 메모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게 큰돈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은 기뻐하며 웃었다. 나중에 그게 틀어지고 큰 골칫거리가 된다는 말은 그때가 임박해서 들려주면 된다. 너무 빠르게 알려주면 오히려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장님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나는 마무리로 왕수정의 드라마가 잘 될 것이니 그것을 협찬하라는 메모를 적어주었다. 회장님은 알았다고 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 일로 이사장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 * * * *
김소연 한의사의 김다이어트는 예상대로 빅 히트를 쳤다. 그녀는 사업 수완이 남달라서, 홍보도 직접 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덕분에 나는 크게 홍보비를 들이지 않고 회사의 이미지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한 달 매출 다 주어도, 그 제품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남겨서 우리는 손해 볼 것이 없어요.”
조이사가 말하자 대머리 이사가 맞장구를 쳤다.
“맞스무니다. 첫 스타트부터 대단한 제품을 내놓은 덕에 우리 회사의 이미지가 상승했으무니다.”
이미지 상승은 물론이고, 첫 달 매출을 다 넘겨주고 나서, 그 뒤에 팔리는 수익만 갖고도 이익은 충분했다. 거기다 헤어 매니큐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용 시장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제품을 따라하는 제품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헤어 매니큐어 짝퉁이 출시되었다. 원조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매니큐어는 우리 회사만의 차별화가 필요한 시점이무니다. 많은 회사에서 우리를 따라하고 있어서 골치가 띵 때립니다.”
“네, 우리 회사만의 고급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다들 한마음으로 고급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름만 만들었을 뿐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은 거라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내놓은 뒤에 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게 제대로 뽑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고급화와 함께, 같이 시도해 볼 아이템이 있거든요.”
“오, 그것이 무엇이무니까?”
회귀해서 미용재벌